영화 <우행록:어리석은 자의 기록>(2016, Traces of Sin)
영화 〈우행록〉의 문을 여는 버스 안 장면은 케빈 스페이시가 출연한 〈유주얼 서스펙트〉(1995)를 불현듯 떠올리게 한다. 사건의 끝은 언제나 시작을 배반한다. 관객은 퍼즐을 맞추듯 인물의 정체를 추적하지만, 이미 그 도식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허무한 조작의 시퀀스로 대체된다. 〈우행록〉의 첫 장면은 바로 그 유사한 배반을 통해 관객의 인지에 균열을 낸다. 이 균열은 단순한 반전의 쾌감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온 윤리와 선입견, 그리고 사회적 판단이라는 층위를 벗겨내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비틀기’에 가깝다.
황색 저널리즘의 최전선에서 피로에 절은 일상을 겨우 부여잡으며 살아가는 잡지 기자 다나카(츠마부키 사토시)는, 일상의 비틀린 서사를 인도하는 인물이다. 제법 붐비는 버스 안, 그는 가까스로 자리를 잡지만 곧 중년 남성의 불편한 눈총을 받는다. 그 남성은 마치 사회적 도덕률의 대리인이라도 된 듯 노파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압박하고, 다나카는 내키지 않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겸양의 제스처를 수행한다.
그러나 다나카가 옮기는 걸음은 누가보아도 다리 불편한 존재의 절뚝걸음. 이내 버스의 요동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주변의 시선은 싸늘하고, 혀 차는 소리가 연쇄처럼 이어진다.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상투적 비난마저도 공기 속에서 비틀려 흩어진다. 그 무언의 합의와도 같은 겸연쩍은 탄식을 뒤로한 채, 다나카는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한 걸음으로 사라진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의 복선을 예고한다. ‘장애인 코스프레’라는 윤리적 일탈은 단지 개인의 일그러진 행위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구축한 ‘정의의 자율 신경계’, 곧 외면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공공의 도덕을 사사로이 심문하며, 일상의 윤리를 사회적 의심과 고정관념으로 유지하려는 무의식적 폭력의 구조를 드러낸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인지 틀을 해체한다. 우리는 ‘옳음’이라 믿는 감각 속에서 얼마나 자주 속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속임은 타인의 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선과 믿음, 기계처럼 작동하는 양심의 서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어리석다는 것, 즉 인간이라는 것
‘어리석다’는 말은 국어사전에서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로 풀이된다. 그러나 영화가 던지는 ‘愚’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훨씬 더 아프다.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들의 기록〉은 ‘어리석음’을 윤리의 결핍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숙명에 가까운 것으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내면화된 가면과 허위가 초래한 부작용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정상적인 삶’이라는 궤도를 벗어나거나, 그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진다. 취재가 진행되며 드러나는 이웃들의 증언은 모두 ‘그럴듯한 확신’을 담고 있지만, 그 확신은 모래 위의 탑처럼 쉽게 무너진다. 선입견이 진실을 압도하고, 경험이라는 이름의 편향된 기억은 양심의 의상을 입고 떠돈다. 무엇이 진짜이며, 무엇이 조작인가. 사실이란 무엇인가. 진술의 언어는 언제나 권력의 언어이고, 기억의 복원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그때 영화는 한 가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말하는 정의는 과연 누구의 정의인가?”
우리는 흔히 ‘양심’이나 ‘정의’를 절대적 가치로 신앙한다. 마치 그것들이 자연법처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무게로 작용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양심이란 결국 한 시대의 도덕과 제도가 주입한 사회적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 ‘내 양심’이라 믿었던 그 기준조차 타인의 시선과 제도의 설계 속에서 훈육된 결과일 수 있다.
국어의 어원을 들춰보면, ‘어리석다’의 옛말은 ‘어리다’였다.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서문의 첫 구절처럼, ‘어리다’는 ‘미성숙하다’와 ‘둔하다’라는 뜻을 동시에 품는다. ‘幼’와 ‘愚’는 그렇게 겹쳐진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인간의 성장과 도덕 판단의 비동시성을 가리킨다. 나이는 들어도 윤리적 판단은 미성숙할 수 있고, 사회적 연령은 생물학적 나이보다 훨씬 더디게 자란다.
“지금의 나이에 0.7을 곱하면 선대의 사회적 나이가 된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냉소 속의 통찰이다. 수명이 길어지고, 사회적 책임의 범위가 확장되며, 윤리적 판단의 지연도 함께 늘어난다. 중년이 되어도 우리는 여전히 윤리적으로 ‘어리다’. 이 어림은 때로 고집으로, 때로 악의로, 때로 무기력한 방조의 얼굴로 변주된다. 결국 인간은 반복해서 어리석다. 왜냐하면 우리는 판단의 피로 속에서 ‘자기만의 윤리’를 새로 세울 힘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시선이 정답이라 믿는 착각 속에서 안도하기 때문이다.
〈우행록〉은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사유의 기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해자와 피해자, 정의와 비윤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영화는 집요하게 들춰낸다. 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면 우리는 또 다른 다나카가 되어,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삶을 비웃을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리는 다나카였는지도 모른다. 슬기롭지 못한 자들이 남긴 기록은 결국 우리 자신의 얼굴이다. 인간이란 사랑과 정의, 선의와 악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일—그것이 영화가 남긴 가장 진실한 윤리이자, 가장 고요한 미학이다.
거짓의 부재가 곧 진실인 것은 아니다
영화는 황색 잡지 기자 다나카의 여동생 미츠코(미츠시마 히카리)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고교 시절 아들과 몸싸움을 벌인 뒤 집을 떠난 부친, 두 남매를 남겨둔 채 새 가정을 꾸린 모친. 그렇게 남겨진 남매는 각자의 상처 속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다. 미츠코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방임과 학대로 내몬 끝에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다나카는 그녀를 면회한 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1년 전 일본 사회를 뒤흔든 중산층 일가족 살인사건의 취재를 시작한다.
그는 희생자 타코우(코이데 케이스케)의 회사 동기를 만나 그의 성격과 삶을 더듬는다. 사랑과 신뢰 같은 인간의 기본 덕목이 결여된 채, 오직 체면과 성실의 규율 속에 살아온 인물. 다나카는 그의 껍질을 벗겨내며, 어쩌면 그가 죽어 마땅했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단정한다.
이어 타코우의 아내 나츠하라(마츠모토 와카나)의 대학 동기 미야무라(우스다 아사미)를 찾아간다. 그녀의 증언 속에서 나츠하라는 겉으로는 청순하고 온화했지만, 속으로는 금수저 집단의 내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목적 지향적 인간으로 드러난다. 사랑받기보다는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존재. 영화는 그런 인간형을 냉정하게 비춘다. 피해자로 등장하는 이들의 삶은 연민보다 불편한 반감으로 다가온다. 그들은 동정하기엔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애도하기엔 지나치게 차갑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애도의 무게를 잃는다. 살해당한 부부와 그 딸에게 감정을 이입하려 해도, 그들의 자기중심성과 욕망 앞에서 분노나 슬픔은 희미해진다. 남는 것은 도덕적 판단뿐이다. 피해자는 누구이며, 가해자는 누구인가. 영화는 관객의 직관을 뒤흔든다.
인간은 복합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그 자체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복합적이다. 기억은 유한하고, 그 유한함은 조각난 기억의 임의적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누군가에게 악마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은인이 된다. 같은 사건도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파괴한 비극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해 가능한 서사의 일부로 남는다.
다나카가 집요하게 추적한 미제 사건은 한밤중 연예인 커플의 스캔들 기사로 순식간에 묻힌다. 가족이 몰살된 사건보다 유명인의 사생활이 더 자극적인 뉴스가 되는 사회.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잔혹할 만큼 정확하게 포착한다. 현실의 무게와 사회적 관심은 언제나 비례하지 않는다. 진실은 늘 관심의 바깥에 있을 수 있다.
타코우의 또 다른 대학 연인은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목적을 위해 여자를 만나고, 목적이 사라지면 관계도 끝냈지만, 그 목적조차 숨김이 없었다고 말한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결과는 어느 한쪽의 피해가 아니라 서로의 계산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타코우를 죽인 이는,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느낀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인다. 이 증언은 피해자에 대한 새로운 균열을 만든다. 이해 가능한 가해, 혹은 연민의 폭력.
이야기는 여기서 전환점을 맞는다. 나츠하라의 대학 동창이자 카페를 운영하는 미야무라가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죽은 나츠하라와 친했던 친구가 사실 다나카의 여동생 미츠코였다는 것이다. 나츠하라는 ‘내부자’가 되기 위해, 외부자였던 미츠코를 그 무리의 남자들에게 넘겼다. 다나카는 이 진실을 듣고, 모든 퍼즐의 끝에서 유일하게 진상을 짐작한 미야무라를 둔기로 내리친다. 그리고 그 범행을 그녀의 옛 연인 탓으로 조작한다.
이 폭력은 동생을 위한 복수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윤리적 실패를 가리기 위한 또 다른 거짓이었을까. 진심과 오만, 연민과 분노, 구원과 복수의 경계가 엉키며, 영화는 관객의 윤리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사건에는 분명 죽은 자와 죽인 자가 존재하지만, 그 사이의 선은 점점 희미해진다. 단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진실은 언제나 반전의 형태로 미끄러지고, 도덕의 균형은 무너진다.
〈우행록〉이 기록하는 ‘愚行’은 단지 일그러진 인간 군상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억의 왜곡, 시선의 편향,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판단’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진실이란 거짓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진실이란, 그 결여와 왜곡을 인정할 때에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다
영화 〈우행록〉은 인간의 무방비한 선입견과 지레짐작 사이에 불쑥 다리를 놓는다. 우리가 상식이라 부르거나, 인지상정이라 믿는 서사의 궤도를 서늘하게 빗겨간다. 첫 장면부터 그 징후는 분명하다.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를 떠올리게 하는 다나카의 절름발이 행세는 일종의 위장이며, 상담소를 찾아가 단숨에 모든 것을 고백하는 여동생의 자백은 진실이라는 미끼를 흘리는 유인 장치다. 또한 여성을 도구 삼아 처세하던 타코우가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 직장을 얻고 자립했다는 회고는, 우리가 익숙히 믿어온 도식에 대한 조용한 반전으로 다가온다.
이 모든 장면은 관성적인 의식의 흐름을 휘감으며,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보편성과 타당성에 날카로운 이의를 제기한다. 이야기의 표면은 잔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뒤틀림과 균열의 진동이 도사리고 있다. 그 뒤틀림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기억은 한계가 있지만, 기록은 그 너머를 증명한다.”
기억은 언제나 나의 인지, 나의 관념, 나의 정체성의 틀을 통과해 세상으로 발현된다. 어떤 사건도 ‘나’의 기억이 되는 순간, 이미 여러 번 굴절된다. 인간의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억이라는 자의적 필터로 현실을 편집하며, 그 편집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다”는 말은 단지 정보의 정확도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에 맞서는 윤리적 태도를 뜻한다. 진실은 기억의 내면보다 기록의 외부에 더 가까이 있다.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믿는 사람조차, 험한 세상의 뉴스를 읽고 혀를 차는 그 기억의 밑바닥에는 ‘나는 정의롭다’는 무의식적 확신이 깔려 있다. 그러나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나’는 늘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로 남는다. 가장 오래된 기록, 곧 성경은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쉽게 미혹당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로 묘사한다. 역사에 남은 숱한 문서들 역시 일관되게 증언한다. 인간은, 어리석다.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일본 추리소설가 누쿠이 도쿠로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러닝타임 내내 서스펜스는 절제되고, 서사의 색조는 무채색에 가깝다. 자극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인간 내면의 파열음을 기록처럼 조용히 복기한다. 그것은 곧 이 시대 일본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노화된 사회 ― 단지 인구 통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감퇴를 말한다. 본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사회, 타인을 도구로 삼는 것이 합리로 여겨지는 사회. 가족은 해체되었고, 연인은 목적의 수단이 되었으며, 동료는 언제든 교환 가능한 소비재가 되었다.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가져온 겉보기의 풍요 속에서 일본 사회는 여전히 견고한 계급 구조 안에 갇혀 있다. 민주주의의 외피 아래 사람들은 불투명한 기준에 따라 분류되고 차별받는다. 그 구조는 더 이상 문제 제기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구조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구조 속 ‘상급 계급’에 무비판적으로 기대어 살아간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구조를 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길들여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일본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 오늘날 미디어와 일상에서 범람하는 ‘인싸’와 ‘아싸’의 구분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새로운 형식이자, 존재의 가치와 위치를 구획 짓는 담론이 되었다. 누구도 그 기준의 기원이나 타당성을 묻지 않는다. 모두가 ‘있어 보이는 무엇’을 좇으며, 그 기준에 닿은 사람과 닿지 못한 사람을 나눈다.
그 결과 사실은 인식의 취사선택이 되고, 진실은 사적인 감각에 묻힌다. 아무도 거짓을 말하지 않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는다. 개인의 불확실한 책임 앞에서 사회라는 구조만이 유일한 가해자로 남는다. 〈우행록〉이 전하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고요하지만 섬뜩하게,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 모두를 구조의 공범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그리고 진실이란 이름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어리석은 자의 기록’이란 결국 인간 그 자체의 기록이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회피했던 자기기만, 합리라는 이름의 폭력.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인 기록은 언젠가 우리의 기억을 밀어낸다. 그리고 묻는다. 정말, 나는 옳았는가.
병폐적 사회와 우매한 인간의 이중창
〈심야식당〉으로 잘 알려진 일본 각본가 무카이 코스케가 시나리오를 맡았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워터보이〉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온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이번에는 살인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이자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남매의 오빠, 다나카 역을 맡아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얼굴의 주름마저 서사의 무게처럼 다가오는 그의 연기는, 삶이란 무엇을 꾹꾹 눌러 참으며 버텨내는 과정인지 묻는다. 다른 출연진들 역시 삶 속에 실제로 스며 있는 비루함과 나약함을 담백하게 표현하며, 관객을 서사 속으로 천천히 이끌어 들어간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정교하게 구성된 작품을 스크린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산업적 효율의 논리에 갇힌 한국 영화계는 장르적 실험보다 대중적 성공의 확률을 택한다. 그 결과 ‘생각을 요하는 영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물론 한국 영화 역시 여러 성취를 이루어왔으나, 문학적 텍스트와의 내밀한 접속, 인간 실존의 심층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일본 영화가 보여주는 내공은 여전히 깊다.
〈우행록〉은 단지 ‘누가 범인인가’를 묻는 추리물의 외피를 빌려, 오히려 ‘누가 인간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한다. 누구도 완전한 피해자이거나 완전한 가해자가 아니며, 누구도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이는 ‘그럴듯한 이야기’ 속에 숨어 있고, 모든 사회는 ‘합리적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유예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스릴러의 규칙과 서사의 기대를 무력화하는 〈우행록〉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게 하고, 결말이 아니라 구조를 되묻게 한다.
기억이 스스로를 미화한다면, 기록은 그것을 무너뜨리는 침묵의 증거다. 영화는 바로 그 침묵의 층위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서스펜스의 흥미를 넘어, ‘비욘드 엔터테인먼트(Beyond entertainment)’의 경지에 닿는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사건이고, 그 사건을 견디는 일이 곧 기록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영화. 철저히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우리의 무지를 비추는 영화.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일본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기억 너머에 숨겨진 무의식의 자서전이며, 병폐적 구조와 우매한 인간이 함께 불러온 불협화음의 합창이다. 어쩌면 지금, 가장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록이 기억보다 위대한 이유가 된다.
기억이란 언제나 인간의 내면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작동한다. 반면 기록은 냉정하고 무심하게, 그 정당화의 틈을 벌려 보여준다. 그래서 기록은 때로 잔인하다. 그러나 바로 그 잔인함이 인간을 성찰하게 만든다. 다나카가 끝내 맞닥뜨린 진실은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견딘 한 인간의 초상에 가깝다. ‘어리석음’이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정의의 서사에만 갇혀버린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그림자이자, 기록이 우리 앞에 놓은 거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진실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우행록〉은 그 모순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말한다. 진실은 늘 한 발 늦게 도착하며, 인간은 언제나 그 진실이 오기 직전의 불편한 침묵 속에서 살아간다고. 그렇기에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윤리의 명령이다. 우리가 끝내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의 잔향이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면, 그때 비로소 ‘기록은 기억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깊이 있게 이해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