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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과 미래는 다르다 - 영화 <해피엔드> (2024)

가까운 미래의 얕은 그림자와 비평의 소음

by 박 스테파노

음악 동아리를 꾸려가는 고등학교 3학년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성장해 온 친구였다. 어느 날, 둘은 이어 합류한 아타(히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과 호기심과 약간의 무모함을 이끌고 중국계가 운영하는 불법 DJ 클럽에 들어선다. 단속에 휩쓸려 클럽이 해산되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탓에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DJ가 이들에게 음원이 담긴 USB를 건넨다. 급히 빠져나온 다섯 명은 늦은 밤 학교 동아리방으로 숨어들어 낯선 EDM의 리듬을 끝까지 들어보려 한다.


코우는 영주 자격이 없는 자이니치라는 처지에서 늘 불안이 따라붙고, 유타는 부유한 부모가 집을 비우는 시간이 잦아 친구들과의 시간이 생활의 공백을 채운다. 오래된 말처럼 ‘질풍노도’라는 표현이 여전히 자리를 잃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떠안고 있는 태생적 한계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주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결여의 존재들이다. 이민자이거나 혼혈이거나 신체적 조건이 취약한. 결핍을 서로의 온기로 덮으며 친구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성장은 이미 하나의 완숙에 가까운 자리에 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미완의 시선을 지닌 이들에게 기성세대가 구축한 체제는 답답한 벽처럼 다가온다. 새벽녘, 일탈의 흥분을 뒤로한 채 학교를 빠져나오던 유타와 코우는 장난삼아 교장 나가이의 자동차를 직각으로 세워두는 짓을 벌인다. 노란색 닛산 Z 시리즈, 교장이 애착을 쏟는 차였다. 분노한 교장은 AI 감시 체계 ‘패놉티(Panopty)’를 도입해 학교 구석구석을 스마트 CCTV로 감시한다. 보안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학생들의 일탈을 실시간으로 적발해 자동으로 벌점을 부과하는 통제의 장치였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복장 불량, 욕설, 흡연, 연애까지. 일상이 빼앗기듯 통제되는 가운데 학생들은 사각지대라고 불릴 만한 몇 안 되는 공간에서 숨을 돌린다. 동시에 비일본인계 학생을 향한 차별적 조치가 노골적으로 강화된다. 예컨대 자위대 홍보 특강에서 비일본계 학생들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참여가 금지되고, 장학금을 꿈꾸는 코우에게 벌점 중심의 강압적 통제는 점차 정체에 관한 근본적 차별로 다가온다. 차별은 우정의 층위를 교묘히 가르며 서로에게 난데없는 틈을 만든다. 유타와 코우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고, 두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지는 기척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들은 교장의 폭압에 맞서기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저항을 준비한다. 유타는 동아리방을 철거한 뒤 창고에 밀쳐둔 음향 기기를 다시 훔쳐내고, 코우는 모범생 후미(이노리 키라라)의 급진적 사고에 마음이 움직여 시위와 모임에 참여한다. 결국 비일본계 학생들은 교장실을 점거하고 교장을 가둔 채 감시 시스템과 폭압적 운영의 중단을 요구한다. 그 무모하고도 절실한 몸부림이 과연 승리를 얻어낼지, 아니면 실패의 쓰라림을 통해 한 단계의 성장을 통과할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두 결과 모두 이들에게는 각기 다른 모양의 ‘해피엔드’로 남을지도 모른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서사학


‘내일’이라는 말은 오지 않은 시간을 가리킨다. 곧 실현되지 않았으며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순간을 향한 지칭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떠한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또 다른 베일을 씌운 말로서, 실체보다 가능성 기대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운다. 심정적 공평함을 부여해 반반의 확률을 설정하더라도, 열 명 중 다섯이 겪지 못할 서사가 미래라는 이름 아래 놓인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미래 서사에 ‘공상’이라는 보조어를 붙인다. 공상(空想)의 글자를 풀어보면 ‘빈 생각’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과 구현의 근거가 희박한 사유를 뜻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잠정적으로 떠올리는 일. 그래서 미래를 향하는 서사는 언제나 ‘불가능’이라는 단어와 일정한 온도를 공유한다. 그 온도에서 과학기술, 판타지, 디스토피아의 상상력이 태어나며, 세계의 경계를 시험하는 장르적 사유가 발생한다. 이때 사변(思辨)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도착한다.


사변장르를 말할 때 우리는 단일한 장르보다 정신의 움직임을 먼저 떠올린다. 사변은 공상의 확장판이 아니라, 현실을 지탱하는 법칙의 틈을 밀어 열어보려는 사유의 손끝이다. 문학과 영화는 그 틈이 서사적 형식으로 가시화되는 장소다. 그러므로 사변적 상상력은 현실을 회피하는 퇴각의 전략이 아니라,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을 되묻는 미학적 행위에 가깝다.


가능 세계의 실험이 ‘지금·여기’라는 현실에 충실한 작품에서 출발한다면, 사변문학은 그 전제를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새로운 조건을 기입하며 세계를 다시 설계한다. 시간과 기억, 윤리와 인식, 기술과 존재 같은 구조적 요소들을 변위시키고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를 살핀다. 그래서 사변은 종종 과학을 호출하지만, 핵심은 과학적 데이터가 아니라 사유의 방향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말 그렇게만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야기의 골조를 세우고, 그 위에 존재론적 긴장이 구축된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현실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보게 하는 일. 사변적 상상력은 세계를 끊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심층을 비감각적 감각과 존재의 미끄러짐으로 드러낸다. 기술과 육체의 결합, 감정의 소거와 회복의 문제, 실체와 그림자 사이의 윤리적 흔들림은 다른 종류의 감각을 열어젖히는 통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해피엔드>를 단순히 ‘근미래 통제 사회를 비판하는 디스토피아 SF’로 축소하기보다는, 사변적 사유가 열어 놓은 감각의 접경지로 보려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


SF가 기술적·과학적 인과와 합리성을 보다 정밀하게 호출하는 장르라면, 사변장르는 그 논리를 느슨하게 풀어 넓은 지평으로 이끈다. SF가 현실 세계의 규칙을 기반으로 가능 세계를 구축한다면, 사변은 세계의 규칙 자체를 가정의 형태로 다시 짜며 존재의 형식들을 변주한다. 그러나 두 장르는 어딘가에서 맞닿는다. 가능 세계를 탐문한다는 기원적 측면에서 보면, 사변은 SF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내밀하게 이어져온 서사의 오래된 뼈대다.



가까운 미래의 거울에 비친 지금


영화 <해피엔드>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일본 사회다. 시공간적 거리감은 미미하고, 고등학교와 그 구성원들의 일상은 지금의 일본과 거의 겹쳐 보인다. 고도화된 기술 문명이 번쩍이며 미래성을 과시하는 SF적 장면도 없다. 감시 체계라 하더라도 오늘의 기술로 구현 가능한 범주이고, 교실과 가정의 풍경은 지금 우리가 아는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해피엔드>를 ‘미래 SF’로만 묶어 두는 평가는 피상적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현실의 시공간에 체제의 변형을 은근히 주입한 ‘가정법의 사변’에 가깝다. 사변은 늘 근본적인 질문으로 향한다. 세계는 왜 지금 이 모습인가. 존재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달라지는가. 윤리와 감각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사유가 존재에 닿기 위해 잠시 세계의 전제를 비껴 서는 감응의 언어다. <해피엔드>의 중심에는 그 감응이 이루는 ‘가능성의 그림자’가 놓여 있다.


영화 속 사회는 현재와 거의 닮았으나, 조금 더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권위주의 정권이 전체를 조율하며 통제한다. 학교 역시 국가가 규정한 ‘국민’을 길러내는 기관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국민’은 일본 고유의 혈통적 의미만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으로 간주되는 시민을 통칭한다. 비국민에는 비일본계 혈통뿐 아니라 아직 국가적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한 미성년이 포함되며, 이 억압의 구조는 오히려 오늘의 일본에 더욱 가깝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비국민(非國民, ひこくみん)은 문자 그대로 ‘국민 자격이 없는 자’를 뜻했고, 일본 제국 말기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혐오와 통제의 언어로 기능했다. 정부의 방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외세의 첩자와 다름없다고 낙인찍혔고, 사회적 왕따와 감시의 표적이 되었다.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순간 “이 비국민 놈!”이라는 폭력이 작동했고, 이는 통합을 명목으로 한 배제의 장치였다. <해피엔드>의 세계는 이 과거의 폭력이 변형된 형태로 현재에 재등장하는 지점에서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 체제에 저항하던 음악 동아리 5인방은 제목이 암시하듯 각자의 방식으로 ‘끝’을 맞는다. 톰은 원하는 미국 비자를 얻어 떠나고, 중국계 가정에서 성장한 밍은 자신의 연인 아타를 가족 자리로 초대하며 미래를 기약한다. 퇴학당한 유타와 장학금을 받은 코우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몰렸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둘은 다시 조심스럽게 우정을 회복한다.


육교 위의 롱테이크에서 시간은 잠시 숨을 고른다. 집에서 쫓겨난 유타는 새 집을 찾아가고, 코우는 변함없이 어머니의 식당으로 향한다. 둘은 일상의 언어로 서로의 안부를 나누며, 유타의 짧은 주먹 인사가 우정의 잔열을 환기한다. 카메라는 그 순간에 고요히 머무르고, 멈춘 화면이 다시 재생되는 동안 영화는 ‘버텨 내는 일상’이라는 희미한 희망을 다시 화면 위로 올린다.


이 멈춤의 이미지는 몇 겹의 사유를 불러온다. 첫째는 감독 네오 소라가 밝힌 모티프인 ‘지진’이다. 일본인에게 지진은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공포에 속한다. 좀비, 외계 침략, 초월적 재난보다 더 현실적인 공포가 지진이라는 점에서, 일본적 사변의 가장 깊은 층위는 바로 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멈춤은 불연속의 시간, 균열의 감각, 재건을 향한 미세한 틈을 암시한다.


또 하나는 국민과 비국민이라는 이항대립의 관습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이다. 구분과 차별의 폭력은 여전히 작동하고, 각 인물은 그 사회를 혁신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자기 자리에서 흔들린다. 패놉티콘적 감시체계를 폐지할지의 문제에서도 당사자들은 서로 다른 논리를 내세운다. 혁명이나 개혁이란 결국 과거와의 결별을 조건으로 삼는데, 이 결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진처럼 세계를 단숨에 뒤집는 사건이나, 잠깐의 ‘멈춤’을 통해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필요하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결과적으로 <해피엔드>에서 근미래라는 배경은 중심서사가 아니다. 지금의 세계를 다시 보기 위해 잠시 프레임을 비틀어 둔 하나의 미학적 장치일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두고 흔한 SF의 문법—기술 발전, 인간 소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통제 체제—만을 읽어내는 일은 본질을 놓친 해석이 된다. <해피엔드>는 미래의 기술을 꿈꾸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실의 감각을 사변적으로 비틀어 보여주는 영화다.



미래의 이름을 빌려온 현실, 그 과잉의 반향


올 한 해의 영화계는 들뜬 환호보다 낮은 한숨을 더 잦게 내뱉었다. 관객의 소비 방식은 팬데믹 이후 급격히 재편되었고, 기술적 변화는 산업 전체의 지층을 흔들었다. 극장의 매출은 반 토막이 났고, 새롭게 크랭크인을 준비하던 작품들조차 줄줄이 멈춰 섰다. 자본은 보다 손쉬운 회수와 예측 가능한 피드백을 기대하며 대형 OTT로 이동했고, 그 결과 올해 극장가에서 ‘대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품성의 측면에서 거론되는 영화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시네필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울림이었고, 그 울림은 넓은 대중의 호응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애초에 작품성이라는 말의 기준부터 모호한데, 스스로 시네필을 자처하는 집단의 평가조차 서로 다른 파편들로 흩어져 있다. 왜 유일하게 남은 듯한 《씨네21》 같은 전문지가 점점 더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가라는 물음 역시 이러한 균열 위에서만 가능하다. 어쩌면 시네필이라는 호칭 자체를 먼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장르적 취향과 관습적 미학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 모호한 경계에서 형성되는 ‘평가의 권위’는 오래된 관성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네오 소라 감독. 조선일보 제공


올해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 중 하나는 네오 소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해피엔드>였다. 근미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적 음울함과 여전히 방황하는 청춘들의 일상을 조용한 결로 엮어냈다. 감독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라는 유명세만으로 평가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회의 균열을 ‘다가올 미래’라는 틈새로 우회하여 비추는 시선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어떤 지점에서 갑자기 멈춘다. 작품의 성취가 도달한 곳은 그 근처지만, 그 너머로 깊어지는 사유의 장은 충분히 열리지 않는다.


<해피엔드>는 데뷔작 특유의 결을 강하게 품는다. 서사적 리듬은 일정하게 늦춰져 있고, 롱테이크는 때로는 감정의 숨을 잇게 하지만, 때로는 편집의 주저와 연기의 미숙함을 드러내며 장면의 농도를 희석한다. 필름 시대의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간혹 보이던, 촬영 분량이 아까워 과감한 컷을 망설일 때 생기는 특유의 공백이 이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그 투박함은 아마추어리즘의 흔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사의 주제의식을 은근히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파수꾼>과 <다음 소희>의 어떤 결을 떠올리게 한다.


장르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욱 흥미롭다. 서구의 SF는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의 거센 흐름 속에서 탄생해 성장했다. 과학적 발견이 개인의 일상 감각을 바꿀 만큼 급진적인 시대였고, 그 변화는 상상력의 기초가 되었다. 뉴턴 역학, 전기·자기, 원자력과 양자론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가능 세계’를 향한 사고의 바닥을 구성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근대화가 짧고 급격했으며, 기술과 과학이 삶 속에서 차근히 체화되기 전에 경제·교육 중심의 사회 구조가 먼저 완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세계관’이 상상력의 언어로 자리 잡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서구의 SF는 기술과 존재, 시간과 윤리에 대한 실험을 수행하는 장르로 나아갔고, 한국과 일본의 SF는 상대적으로 감정과 관계, 사회적 압력의 서사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미래라는 틀을 빌리지만, 과학적 탐구가 뼈대를 이루기보다 지금·여기의 현실 문제를 안전하게 비틀어 말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경우가 잦았다. 장르가 논리적 무게를 확보하기보다 정서적 공명에 의존하는 경향은 이 때문에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해피엔드>가 한국 관객에게 조금 더 수월하게 수용된 이유도 설명될 수 있다. 다만 그 수월함이 과잉의 호응을 불러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 <해피엔드>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아마도 올해 다양한 비평 공모전과 영화 잡지의 단평들 속에는 <해피엔드>를 다룬 글들이 여럿 자리했을 것이다. 특정 비평 집단의 호응이 하나의 작품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밀어 올리는 구조는 우리 비평계의 오래된 풍경이다. 얼마 전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을 둘러싼 부정확한 비평이 거센 비판을 받은 사건을 떠올리면, 작품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태도와 ‘시네필 유희’는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된다. 특정 공동체의 열광이 작품성을 대체하는 순간, 비평은 작품의 깊이를 확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집단적 환호의 메아리로 축소된다.


비평은 호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어둠을 더듬어 세계의 결을 확인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해피엔드>가 올해 유독 크게 들렸던 이유도 그 어둠의 방향을 정확히 가리켰기 때문이지만, 그 지시가 지나치게 확대되었을 때 생기는 굴절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장르의 관성, 비평의 습속, 관객의 기대가 뒤섞인 자리에서 과잉의 해석은 쉽게 탄생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둘러싼 열광을 다시 고요히 바라보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어떤 작품은 작은 목소리로 말할 때 더 멀리 닿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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