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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 사람을 가졌는가 - 드라마 <상연과 은중>

내 안의 두 얼굴, 그 두 얼굴의 사유

by 박 스테파노

친구를 두고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오래 남는다. 이 문장을 거꾸로 비틀어 보면, 한 사람의 내면에 이미 두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되묻게 된다. 플라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사랑의 기원’이 균열된 존재가 다시 하나를 찾는 여정이었다면, 나는 그 신화를 변주하듯 인간의 마음 속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기우는 두 자아가 공존한다는 상상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기쁨의 의미를 더듬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의 여지부터 찾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불온한 기색을 먼저 감지하며 슬픔과 불평의 문장을 서둘러 꺼내 놓는 자아다.


살아간다는 일은 어쩌면 이 두 얼굴 사이에서 순간순간 방향을 정하는 일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성장기라 부르는 세월 동안 반복된 선택들이 굳어져 성정의 지층을 이루면서, 평생의 나침반처럼 남아 우리를 이끈다. 다만 문제는, 그 두 얼굴을 스스로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그때, 내면의 낯선 표정을 비춰 주는 존재가 등장한다. 우리는 그 존재를 친구라 부른다. 친구의 몇 마디와 몇 장면 속에서 내가 오래전 외면했거나 미처 선택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자아가 문득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표면적으로는 친구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우정은 단순한 친밀의 정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사는 영화 제작자로서 누구나 부러워할 성취를 얻은 상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서 시작되고, 이어 ‘절교’라는 다소 고풍스러운 단어로 둘 사이의 단절을 다시 불러오는 은중의 회상이 중심이 된다. 시점이 일관되게 은중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러 비평적 논의가 뒤따랐으나, 내게는 오히려 그 단일한 시선이 작품의 침잠하는 감정선을 흔들림 없이 이끌어 주는 방식으로 보였다. 하나의 관점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두 인물의 삶은 한 줄기 내면의 강처럼 잔향을 남긴다.


이 작품을 두고 여성 우정 서사라거나 조력사의 서글픈 정황, 심지어 우정을 넘어선 감정의 결을 읽어내는 다양한 해석들이 이어졌다. 죽음과 이별이라는 인간 경험의 가장 큰 균열 앞에서, 이 드라마는 그 사실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여러 층위를 차근히 쌓아 올린다. 마치 관객 각자에게 감정의 조각을 조용히 건네는 듯한 서사다. 나는 그 겹겹의 두께 속에서 문득 내 안의 두 얼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은중과 상연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 혹은 하나이면서 끝내 둘로 갈라지는 자아의 형상처럼 다가왔다.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꿈틀대던 두 얼굴이 스크린의 두 인물에 투사되며, 언젠가 선택의 순간에서 미루었거나 외면했던 내면의 표정들이 천천히 드러나는 듯했다.


결국 〈은중과 상연〉은 두 사람이 공유한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면서도,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또 다른 얼굴과 마주하게 만드는 내면의 서사로 확장된다. 친구라는 존재가 나를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되고, 그 거울 속에서 비로소 오래 묻혀 있던 자아의 숨결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순간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며, 우리가 잃었다 믿었던 얼굴이 사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음을 조용히 알려 주는 듯하다.



가난의 냄새로 이어진 두 방향의 마음


은중과 상연이 나누는 감각에는 하나의 공명이 있다. 가난의 냄새다. 그러나 그 냄새가 스며든 시점은 서로 다르게 놓여 있다. 공감의 시간이 어긋나면 마음의 균열은 작은 틈에서 시작되어 어느새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꾼다. 어린 시절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억척스러운 어머니와 살아야 했던 은중과,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에서 성장한 상연의 간극은 처음부터 미세한 수평선처럼 존재했다. 상연의 집 붙박이장에 은중이 “너는 참 좋겠다”라는 스티커를 붙였던 장면은, 두 소녀의 세계 사이에 이미 그어진 경계선을 조용히 드러낸다.


행복은 대체로 고만고만하고 불행은 저마다의 얼굴을 가진다고 했던 똘스또이의 문장은 너무도 식상한 진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가장 더딘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표면의 화려함이 속살의 부패를 은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늘 폭우의 뒤편에서야 겨우 이해된다. 상연의 오빠이자 은중의 첫사랑이었던 상학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두 사람의 삶을 블랙홀처럼 뒤틀어 버린다. 상연의 가정은 산산조각 나고, 경제적 기반은 무너지고, 결국 야반도주하듯 사라진다. 은중은 이 모든 사실을 세세히 알지 못한 채, 다만 그 붕괴를 어렴풋한 직감으로 감지하며 성년기에 접어든다.


가난의 냄새는 그때 서로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두 사람에게 옮겨 붙는다. 외투를 바꾸어 입듯, 한때 은중의 어깨에서 풍기던 냄새가 이제는 상연의 삶 깊숙한 곳에 배어 있다. 그 냄새는 자신이 아무리 애써도 ‘정상’이라 불리는 삶의 궤도로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는 괴리감을 만든다. 이 괴리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 말하는 순간 비루해질까 두려운 감정들을 품게 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여는 일마저 구차해지는 순간, 친구 사이의 균열은 더욱 조용한 방식으로 깊어진다. 누구나 한 조각쯤은 감추고 사는 어둠의 구석이 있는 까닭에, 그 틈은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고, 상연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올라서는 꿈을 품는다. 유년기의 안정과 여유가 ‘운과 복’이라는 덧없는 선물이었다는 깨달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대신 어느새 자신이 잃었다고 믿는 것을 되찾으려는 본전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다. 이유도 증거도 없는 그 피해의식은 자신만 상실의 중심에 서 있다고 주장하며, 가족의 연도, 오랜 친구의 마음도 기꺼이 교환 가능한 카드처럼 취급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욕망은 의도와 합리화의 언어를 깨끗한 포장지처럼 두르고 나타난다. 결과가 과정의 정당성을 보증해 준다고 믿게 될 때, 우리는 눈 가린 경주마처럼 목적지 밖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 상연이 은중의 영화 프로젝트를 반복적으로 가로채는 행동은 단순한 야심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첫사랑 김상학을 잃었다는 감정의 뒤틀림, 그리고 은중만은 잃지 않았다고 믿었던 삶의 ‘본전’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그 이상의 이유를 더 보태려 하면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진다.


이렇듯 친구라는 관계는 이해의 셈본이 들어서는 순간 유리탑처럼 무너지기 쉽다. 서로의 삶이 더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조차, 우리는 상대의 궤적을 온전히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해함이 관계를 지탱하는 어떤 미세한 온도를 만들어 내고, 때로는 그 온도가 무너진 자리에도 남아 오래 흔들림을 일으킨다. 〈은중과 상연〉은 그 미세한 흔들림을 포착하며, 친구라는 이름 아래 드리워진 감정의 층위들을 서늘한 빛으로 비춘다.



지금 사랑하는 사이의 이름―친구


‘친구란 두 개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오래된 문장은, 우정이라는 관계의 본질을 가장 단순하고 또 가장 간절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그 영혼을 통해 지지와 위로, 격려를 건네받는다. 결국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은 “위로가 필요하다”는 문장과 겹친다. 가족이 주는 위로가 가장 깊은 힘일 때가 많지만, 삶의 많은 사정들이 정작 가족에게는 비밀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손을 잡아 주는 존재,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는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한다.


내 모습이 어떻든 그대로 내보여도 괜찮은 사람, 말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마음으로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친구라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누구나 그 이름을 떠올릴 때 자연스레 스며오르는 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미 친구라는 뜻이다.


어느 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골목을 지나던 시절 몰래 찔러 두었던 노트를 펼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문장을 옮겨 적은 것인지, 고통 속에서 스스로 끄적거린 말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때 적어둔 우정의 정의를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친구(親舊)라는 말은 원래 친고(親故)에서 비롯해 ‘친척과 벗’을 함께 의미했다. 친(親)은 피붙이를 뜻했고, 구(舊)는 오래된 벗을 가리켰다. 풀 초와 새 추, 절구 구가 결합된 이 글자는 둥지를 함께 이루는 가까운 관계를 품고 있다. 영어 friend, 프랑스어 ami, 스페인어 amigo, 독일어 freund가 모두 사랑의 정서를 뿌리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리스어 φιλία(필리아)에서 파생된 φιλός, φιλή 역시 정신적 사랑을 내포한다. 친구란 관계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에서, 플라톤 『향연』의 ‘사랑의 기원’이 보여준 이야기와도 은근히 이어진다. 친구는 ‘지금’ 사랑하는 관계를 부르는 이름이다.


그렇다면 애써 등 돌린 인연을 붙잡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일이 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으로 이미 충분한 까닭이다.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니?”


〈은중과 상연〉으로 돌아가면, 상연은 이 질문 앞에서 결국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라 말해지는 것들은 언제나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시간과 사고의 총합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고통의 근원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나만 겪는’ 일이라고 항변하고 싶어진다. 말로 옮겨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사정들, 하소연해도 상대의 관점과 조건으로 번역되어 결국 이해의 자리에 닿지 못하는 일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느 순간 상연이 숨쉬기도 버거운 어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넘기 어려운 벽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포기하고 싶어도 저만치서 미약하게 빛나는 출구가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조건들이 고통의 시간을 길게 늘린다.


엄마를 잃고 절망 속에서 상연은 은중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인지, 참을성의 부족 때문인지, 혹은 단순한 고립감 때문인지, 그 순간 상연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정의 부재가 발생한 것이다. 내게도 스며드는 그 부재의 기억. 연락처에 남아 있지만 더는 마음으로 닿지 않는 인연들, SNS 속에서 이미 흩어진 관계들 사이를 기웃거리며 염치없음을 감수하고 도움을 청해 보지만, 메신저 앱의 읽지 않음 체크표시는 끝내 바뀌지 않는다.


그럴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보잘것없고, 부질없고, 신뢰 없이 살아온 것 같다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생각이 점점 깊어지다 못해 끝내 멈추어 버리는 어느 날, 우리는 묻는다.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 있는 것인지, 숨만 살아서 쉬고 있는 것인지.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음이 더 나은 쪽으로 기울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정은 종종 낮고 조용한 자리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온도로 존재한다. 〈은중과 상연〉이 건드린 것도 바로 그 자리의 떨림이다. 친구라는 관계가 얼마나 가까우면서도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깊이 인간을 지탱하는지 보여주는 서늘한 예감 같은 이야기. 그 예감 속에서 우리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닿는다. 지금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 지금 손을 내밀 수 있는 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오래 함께할 영혼의 짝이라는 사실을.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사랑이 우정의 이름을 바꾸어 부를 때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여러 산을 넘고 늪을 헤치던 굴곡의 시간들 속에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은 상황에 맞추어 떠났고, 소문과 무리의 동조 속에서 자연스레 멀어진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뼈아픈 사실은, 나의 성정과 고집, 미숙함이 스스로 소중한 인연을 놓쳐 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 실수를 알아차리고 뒤늦게 사과를 전했지만, 그때 이미 나는 아픈 존재였고 가난한 존재였다. 다시 손을 잡아 주는 이는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결론은 선명하다. 모두 내 책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 관한 글을 읽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만났다. 몇 번이나 다시 읽게 되는 힘 있는 문장이 나를 오래 붙잡았다. 산문 속에서 유려한 사유를 펼치던 선생의 시적 언어는 처음이었으나, 그럼에도 특유의 목소리,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는 그대로였다. 시의 ‘그대’라는 호칭에 나를, ‘그 사람’에 친구를 자연스레 겹쳐 읽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 해석이 길을 비켜 서는 순간이 왔다. 오히려 ‘그 사람’이라는 부름이 친구보다 더 깊은 층위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먼 길을 떠나는 이가 자신의 가족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존재를 가진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라는 말로도 충분히 닿지 않는다. 온 세상이 나를 버린다 해도 “저 마음이라면” 하고 믿어지는 누군가를 가진다는 것, 마음이 지쳐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지금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안다. 배가 가라앉는 순간 구명대를 서로에게 밀어주는 사람, 사형장의 절망 속에서 “저만은 남겨 두어라”라고 말해줄 사람은 이제 상상 속 인물에 가깝다. 마지막 날, 내 곁에서 빙긋 웃으며 “수고했다”고 속삭여 줄 그 사람은 어디쯤에 있을까.


함석헌 선생님. 한국경제 제공



요한복음의 그 문장을 떠올린 것도 그래서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복음 15, 13 —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던 시절 누군가 좋아하는 구절을 묻는다면 늘 이 말씀을 대답으로 삼곤 했다. 더 많은 구절을 외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복잡해지자 이 말씀을 깊이 되새길 여유는 점점 희미해졌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상실과 오해와 일탈이 지나간 자리에서 ‘영원한 친구’라는 말은 허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성경을 다시 보다가 이 구절의 번역을 새삼 발견했다.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여기에서 ‘one’s friends’가 다른 희랍어 번역에서는 “those whom one loves.”로 풀이된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 작은 차이가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내게 친구란 누구인가. 그 대답은 결국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으로 흘러간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사랑을 설명하는 요한복음이 흔히 ‘사랑의 복음’이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결국 잃어버린 친구가 아니라, 사랑의 호명에 응답하는 ‘그 사람’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곁의 ‘그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내 아내다. 매일의 피로와 무심함 속에서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해 미안함을 남기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내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은 그녀다. 바람이 있다면, 내가 그녀의 ‘그 사람’으로 남는 일. 인생의 남은 소명이 있다면, 그 자리를 기꺼이 지켜내는 일. 그 마음이 왜곡 없이 닿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사람’을 지니지 못한 현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그 사람이 되어 달라”고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지나치게 이기적인 욕망이다. 사랑은 요구가 아니라 응답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그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지켜 준다면, 그때서야 서로가 서로의 ‘그 사람’을 가진 ‘그대’가 되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결국 우정과 사랑은 멀리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거울인 셈이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지금, 당신에게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의 ‘그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사람을 잃고도 그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서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는 결국 한 이름으로 수렴한다. 상학. 상연의 오빠였고, 은중의 첫사랑이었으며, 그 둘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한 편의 영화와 나란히 놓이는 존재다. 그 이름 곁에 머물던 전설의 영화, 주성치의 〈서유기〉가 상연의 손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마치 두 사람의 오래된 상처와 미완의 감정이 다른 형태로 빛을 찾는 여정처럼 읽힌다. ‘웃긴데 슬픈’ 〈서유기〉가 품고 있는 그리움과 억울함, 미안함과 야속함의 미묘한 스펙트럼은 흔들리며 살아가는 모든 미생의 초상처럼 번져 온다. 영화의 장면들이 그 마음을 말랑하게 덥히는 순간, 우리는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의 가장 깊은 결을 새삼 확인한다.


주성치의 <서유기: 월광보합>. 극동스크린 제공


이 드라마는 은중이 기억하는 상연을 중심에 놓는다. 상연이 기억하는 은중은 시청자의 상상 속에서만 생을 얻는다. 요즘 작품들이 너도나도 균등한 시점 교차를 시도하는 흐름에서 다소 벗어난 이 방식은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서로의 관점이 번갈아 맞서며 상대를 정당화하거나 반박하는 구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선으로 두 사람의 처지를 동시에 가늠하게 하는 서사는 오래전 마음의 결을 다시 어루만지게 한다. 그래서일까. 이 이야기는 감히 돌아가 들여다보기 어려웠던 기억의 방을 열게 하고, 그 방 안에 놓여 있던 두 개의 마음과 두 갈래의 선택지를 담담히 바라보게 한다.


전학 온 상연은 반장이 되어 은중의 손바닥을 때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이 모든 면에서 은중에게 지고 있다고 느낀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상연에게 더 많은 것이 있었지만, 상연은 늘 열패감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조력사로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그 마음을 툭 내비치는 상연의 고백은 오래전에 굳은 살처럼 굳어 버린 감정의 기원을 드러냈다. 단칸방에서 엄마와 동생과 살며, 집 밖 푸세식 화장실을 오가던 은중이야말로 상연의 자리를 부러워했을 터인데, 둘의 마음은 서로를 향하면서도 어긋난 기울기로 흘렀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그 사람’으로 남을 기회를 끝내 완전히 잃지 않는다. 여행이 언제나 방랑을 의미하지 않듯, 이들의 여정 또한 예매된 왕복 티켓처럼 마음의 귀환을 예비한 길이었다. 마지막 태양을 향해 인사하며 제법 쿨하게 세상과 작별하는 상연의 모습에서, 은중은 잃었다 생각했던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묘한 회복을 느낀다.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라는 고백처럼, 누군가에게 유일한 ‘그 사람’으로 남는 존재가 결국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자리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싫어하는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워하는 건 생각이 나서 안 좋은 거지.”


이 대사를 떠올리며 문득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싫음’의 대상일까, 아니면 ‘미움’의 대상일까. 서툴렀던 진심으로 상처를 남겨 누군가가 나를 멀리한다면 그저 미안함만 남는다. 그러나 그 서툼이 안타까워 미움으로 남아 지금도 때때로 떠올라 누군가에게 불편한 그림자가 된다면, 언젠가 여행길 어디쯤에서 다시 마주할 기회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사람’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은밀한 욕망이 된다. 그러나 드라마가 말하듯, 삶은 어긋난 선들 위에서도 기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을 품고 있다. 상연과 은중이 서로의 상처와 그리움을 견디는 동안 ‘그 사람’의 자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마음의 길 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빛이 되어 주는 일, 어쩌면 우정의 가장 조용한 정의는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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