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라는 느린 불빛의 가치

AI는 번역가를 대체할 수 있을까?

by 박 스테파노

현대 기술 문명이 밀어 올린 인공지능 번역은, 바벨탑 이후 인류가 꿈꾸어 온 ‘보편 언어’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듯 보인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의 흐름을 따라가며 언어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고, 문화가 부딪히는 마찰을 최소화한 채 매끄러운 소통의 길을 연다. 그러나 이 매끈함은 역설을 품는다. 번역의 본질이라 할 차이와 어긋남, 그 미세한 긴장을 함께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효율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에서 언어는 쉽게 교환되는 기호가 되지만, 인간 번역가가 서 있는 곳은 여전히 단어 하나를 건져 올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비추어야 하는 고요한 연옥이다.


기계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전달’이지만, 인간이 향하는 곳은 ‘도달’에 가깝다. 인공지능에게 번역은 정보를 보존한 채 형태만 바꾸는 변환 과정이다. 반면 인간 번역가에게 그것은 원문의 떨림이 내면을 통과하며 일으키는 작은 화학 작용이다. 『모비 딕』의 'Whiteness'를 ‘흼’이라 옮기고, 「꽃」의 ‘몸짓’을 'flicker of existence'라 건네는 일은 단순한 치환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았던 심연을 다른 시선으로 다시 건너가며 새 숨결을 불어넣는 창조적 월경이다.


기술이 장벽을 허물어 길을 넓히는 동안, 인간은 그 틈에 머문다. 그리고 기계가 미처 붙잡지 못한 의미의 잔광을, 느린 언어로 기록해 둔다.




의미를 건너는 두 개의 길


전문 번역가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을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번역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사유를 기록한 책에 가깝다. ‘관하여’가 대상을 둘러싸는 말이라면, ‘대하여’는 그 대상과 마주 서는 태도를 부른다. 이 책은 번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앞에서 흔들리는 번역가의 생각과 감각을 차분히 모아 둔다. 그 성취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말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parkchulwoo/1506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뒤로 갈수록 논의의 밀도가 다소 느슨해지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계번역’, 곧 AI 번역을 다루는 대목에서 기술적 이해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용자 경험과 인문학적 직관에 기대어 서술한 설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 작동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때로는 AI의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기술 자체에 대한 이해 역시 비슷한 오해 위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혼선은 이 책만의 문제라기보다, 저널리스트나 법률가, 작가들이 AI를 서둘러 논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와도 닮아 있다. 기계학습과 AI 추론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거나, 알파고 같은 연산 중심 알고리즘과 Chat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을 같은 범주로 이해하는 태도는 아직 대중적 인식의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과거 번역 도구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것을 규칙 기반 자연어 처리의 연장선으로 간주한 데서 비롯된 오해일 가능성도 크다.


"사람이 하는 번역에서는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 <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 중에서


이 문장은 번역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읽힌다. 다만 여기에서 AI의 작동 방식까지 일대일 대응으로 단정하는 순간, 기술적 사실과는 거리가 생긴다. 현대의 거대언어모델은 단어를 사전처럼 치환하지 않는다. 과거의 규칙 기반 번역(RBMT)이 비교적 일대일 대응에 가까웠다면, 오늘날의 신경망 기반 AI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AI는 단어를 고정된 뜻으로 다루지 않는다. 임베딩(Embedding)이라 불리는 과정을 통해 단어를 하나의 점이 아니라 관계들의 그물 속 위치로 바꾼다. 의미는 사전에 들어 있는 정의가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거리와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값으로 표현된다. 이때 번역은 ‘단어의 교체’가 아니라, 하나의 의미 공간에서 다른 의미 공간으로의 이동에 가깝다.


이 테스트의 한계는? 조선일보 제공


트랜스포머 구조의 핵심인 어텐션(Attention) 메커니즘 역시 같은 원리 위에 놓인다. 문장 안의 모든 요소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계산하며, 특정 단어 하나를 옮길 때도 전체 맥락이 함께 작용한다. 하나의 표현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으로 풀려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거대언어모델의 추론을 단순한 일대일 대응으로 보는 시각은 기술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 번역가와 AI의 차이는 어디에 남는가. 홍한별이 말한 ‘비대응’은 기술적 구조라기보다, 인간의 해석과 선택이 개입하는 자리일 것이다. AI는 통계적 확률을 통해 가장 그럴듯한 다대다(Many-to-Many) 관계를 찾아내지만, 인간은 그 관계의 빈틈에서 망설이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벗어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생략과 오역조차 하나의 해석이 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인간 번역은 다시 창작이 된다.


결국 AI는 이미 일대일 대응의 단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인간 번역가가 수행하는 ‘맥락의 재발명’, 다시 말해 언어가 아직 닿지 않은 자리에 의미를 새로 놓는 일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두 번역은 같은 다리를 건너는 듯 보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품은 채 걷고 있다.



맥락의 그물과 번역의 틈


인문학의 눈으로 보면 어텐션(Attention)은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주목’과 닮아 있다. 우리가 『모비 딕』 (허먼 멜빌, 1851)을 읽다가 어떤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위해 앞 문장을 다시 더듬는 순간, 이미 우리는 작은 어텐션의 작용을 경험한다. 기계에게 문장은 숫자의 배열이지만, 어텐션 메커니즘은 그 숫자들 사이의 관계를 계산해 지금 이 맥락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가려낸다. 이는 단어를 기계적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문장 안에 숨어 있는 의미의 그물망을 입체적으로 엮는 과정에 가깝다.


이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질의(Query)’, ‘색인(Key)’, ‘가치(Value)’라는 개념을 도서관의 사서에 비유할 수 있다. 질의는 “지금 읽는 이 단어는 무엇과 연결되는가?”라는 물음이다. 색인은 문장 속 다른 단어들이 달고 있는 이름표, 곧 “나는 장소를 말한다”, “나는 주체를 설명한다”와 같은 신호다. 가치는 그 단어가 실제로 품은 의미의 내용이다. AI는 질의와 색인을 비교해 관련성의 정도를 계산하고, 그만큼의 가치를 끌어와 현재 의미를 보강한다. “river bank”에서 ‘bank’가 ‘river’와 강하게 연결되며 ‘금융기관’이 아닌 ‘강둑’으로 이해되는 과정이 그 한 예다. 문장은 이렇게 서로를 비추며 의미를 완성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다시 조직된다. 이는 인문학이 오래전부터 강조해 온 맥락 중심의 읽기와 맞닿아 있다.


이제 AI는 단어를 하나씩 옮기지 않는다. 문장 전체를 하나의 의미의 장으로 펼쳐 놓고, 각 요소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동시에 계산한다. 홍한별이 말한 번역의 비대응성 역시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해석의 유동성을 가리킨다. 어텐션은 그 유동성을 붙잡기 위해 마련된 정교한 수학적 장치다. 기능적 차원에서 보자면, 다대다 대응과 맥락 형성은 이미 기계 안에서 구현되고 있다. 인간과의 차이는 그 관계망에서 생기는 미세한 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번역은 일상이 된 듯하다. KBS 제공


현대 인공지능, 특히 거대언어모델(LLM)은 ‘번역은 단어의 치환’이라는 오래된 도식을 무너뜨렸다. 트랜스포머 구조는 문장 속 모든 단어를 동시에 참조하며, 수많은 잠재적 의미 가운데 맥락에 가장 어울리는 가중치를 찾아낸다. 인문학적으로 말하면, 기계가 텍스트의 분위기와 문맥적 필연성을 통계적으로 모사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더 이상 사전을 뒤지는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벡터 공간 속에서 의미의 길을 계산하는 하나의 맥락 형성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 번역의 고유성은 여전히 다른 자리에 남아 있다. 기계가 찾아낸 것은 ‘가장 높은 확률’이지만, 인간은 그 확률이 메우지 못한 ‘대응의 틈(Gap)’을 다룬다.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시사하듯 번역은 두 언어의 불일치를 견디는 일이다. 기계는 이 틈을 ‘손실(Loss)’로 계산해 줄이려 하지만, 인간 번역가는 그 사이로 들어가 자신의 감각과 취향, 시대의 공기를 불어넣는다.


인간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감지한다. 때로는 원문을 배반하고, 일부러 굴절시키며, 새로운 의미를 발명한다. 기계의 맥락이 데이터 축적의 결과라면, 인간의 선택은 설명되지 않는 도약에 가깝다. 번역이 예술이 되는 순간은 바로 그 틈에서 시작된다.



번역가의 틈, 기계의 공백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보여주듯, 언어 사이의 ‘틈’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인간 번역가의 고유한 능력을 드러낸다. 그 가장 현대적이고 논쟁적인 사례가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한 『The Vegetarian』 (한강, 2016)다. 스미스는 한국어 원문의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를 영미권 독자에게 익숙한, 더 유려하고 수식적인 문장으로 과감히 굴절시켰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는 원문의 정보를 변형한 ‘오류’에 가까울 수 있다. 확률적 최적화를 따르는 AI라면 선택하지 않을 경로다. 그러나 이 의도적 어긋남은 작품의 정서를 영어권 문화 안에서 다시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창조적 배반’으로 작용했다.


스미스는 두 언어의 간극을 단순히 메우지 않았다. 그 틈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 도약은 기능적 대응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한 인간의 감각과 판단이 만들어낸 예술적 사건에 가깝다.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왼쪽이 영국 포르토벨로 출판사에서 나온 영역본, 오른쪽이 창비에서 나온 국내판. 한국일보 제공


언어유희나 음성적 효과가 중심이 되는 텍스트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1865)의 말장난들은 출발어의 소리와 도착어의 의미가 좀처럼 포개지지 않는 난감한 틈을 드러낸다. AI는 ‘Tail’과 ‘Tale’의 유사성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한국어로 옮길 때 '이야기'와 '이(齒)' 혹은 '이(虱)'와 같은 전혀 다른 체계의 말장난으로 새롭게 구성해, 독자가 느꼈던 당혹과 유머를 다시 살려내는 결단은 내리지 못한다.


인간 번역가는 단어를 버리는 대신, 그 단어가 남긴 정동(Affect)을 되살리려 한다. 기계가 의미의 보존을 우선한다면, 인간은 때로 의미를 희생하면서까지 텍스트의 생명력을 지키려 한다. 이 굴절과 변용이 기계적 번역과 인간적 번역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언어는 기호의 집합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사유와 문화가 스며든 그릇이다. 그러므로 번역은 언제나 해체와 재구성을 동반한다. 번역가는 어느 순간 자구적 의미를 넘어서 ‘재창작’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 흥미롭게도, 인공지능의 ‘환각(Hallucination)’ 역시 원문에 없는 내용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현상 사이에는 의도와 책임, 맥락 이해라는 깊은 간극이 놓여 있다.


<어라이벌> (드니 빌뇌브, 2016)에서 언어학자 루이스가 외계 언어를 해석하며 그들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단순한 변환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개입된 재창작의 행위다. 번역 역시 그러하다.


번역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이를 ‘충실한 배신’이라 불러왔다. 움베르토 에코는 『번역한다는 것』에서 번역을 ‘협상’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번역가는 원작자의 의도와 도착어 독자의 문화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다. 관용구를 직역하지 않고 현지의 정서에 맞게 옮기는 선택은 표면적 사실을 버리는 대신, 더 깊은 의미를 살리려는 결단이다. 이러한 재창작은 맥락을 온전히 이해한 주체의 책임 있는 행위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로서 내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나는 번역본이 내가 쓴 것에 충실해야 할 필요성과, 내 텍스트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순간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아니 때로는 변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흥미로운 발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 <번역한다는 것, 움베르토 에코> 중에서 -


반면 AI의 ‘환각’은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통계적 확률이 빚어낸 부산물이다. 거대언어모델은 다음에 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어를 예측하며 문장을 이어간다. 에밀리 벤더 등이 말한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라는 표현처럼, 의미를 이해한다기보다 패턴을 따라 말할 뿐이다.


환각은 데이터 분포 속에서 적절한 연결을 찾지 못하거나, 상충하는 정보 사이에서 노이즈가 생길 때 발생하는 기술적 오류다. AI는 문화적 간극을 숙고하지도, 독자의 이해를 위해 변주를 선택하지도 않는다. 확률의 지도 위를 걷다 길을 잃는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AI 고전 번역의 문제는 오역과 들쭉날쭉한 수준이다. 동아일보 제공


결국 번역가의 재창작과 AI 환각을 가르는 기준은 ‘맥락의 소유’에 있다. 번역가는 텍스트 너머의 세계를 참조하며 자신의 선택에 윤리적으로 응답한다. AI는 텍스트 내부의 상관관계에 머문다.


AI가 만들어낸 매끄러운 오역은 환각으로 남지만, 번역가가 감내한 오역은 해석이 된다. 기술이 더 정교해질수록 기계는 인간의 방식을 점점 닮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이 단어를 선택했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삶과 가치로 답할 수 있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 번역가다. 기술적 정확성이 인간적 이해를 대신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의 틈에서 피어나는 번역


번역은 한 언어의 영혼을 다른 언어의 육신에 옮겨 심는 일과 닮아 있다.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말하는 일대일 대응의 부재는 번역가에게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는 자리다. 인공지능이 데이터의 바다에서 가장 매끄러운 길을 계산해 낼 때, 인간 번역가는 그 길을 잠시 벗어나 원문이 다 말하지 못한 깊이를 바라본다. 그 순간 번역가는 제2의 저자가 된다. 번역은 더 이상 원전의 그림자가 아니라, 스스로 숨 쉬는 또 하나의 작품이 된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The Whiteness of the Whale>이라는 장은 번역가에게 거대한 난제를 건넨다. ‘Whiteness’는 단순한 색이 아니라 공포와 신성, 그리고 공허가 겹쳐진 상태다. 이를 ‘하얀색’이나 ‘백색’으로 옮기는 순간, 형이상학적 울림은 급격히 옅어진다. 홍한별은 이를 ‘흼’이라는 낯설고 단단한 명사로 붙잡아 낸다.


AI는 통계적으로 가장 흔한 표현을 택해 의미를 안정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번역가는 ‘흼’이라는 선택으로 독자가 느껴야 할 이질감과 경외를 되살린다. 이것은 단어 선택을 넘어선 감각의 결단, 언어의 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 도약이다.


김춘수의 「꽃」을 외국어로 옮길 때 만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도 그러하다. ‘몸짓’은 단순한 ‘Gesture’나 ‘Movement’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말에는 의미를 얻지 못한 존재의 미세한 흔들림이 스며 있다. 인간 번역가는 이를 직감하고 ‘flicker of existence’나 ‘meaningless motion’과 같은 새로운 표현을 길어 올린다. 원문에 없는 말을 덧붙이거나 구조를 바꾸면서까지, 시가 지닌 떨림을 다시 살려내려 한다. 이처럼 대응의 틈은 손실이 아니라 재창작의 공간이 된다.


움베르토 에코. azquotes.com 제공


결국 번역은 정보를 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언어와 언어가 부딪칠 때 튀어 오르는 불꽃을 붙잡아 새로운 불을 지피는 연금술에 가깝다. AI가 수많은 말뭉치를 통해 도달하는 ‘최적의 번역’은 대개 매끄러운 평균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예술적 번역은 그 평균을 넘어서는 낯섦 속에서 완성된다. ‘흼’이라는 감각을 발명하고 ‘몸짓’ 속의 존재론적 떨림을 되살리는 일은, 계산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통찰이 개입될 때 가능하다. 기계가 언어의 육신을 정교하게 모사할 수는 있어도, 행간의 영혼까지 옮기기에는 그 시선이 아직 얕다.


따라서 번역가의 위기는 곧 번역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는 자리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완벽한 등가성은 오히려 인간 번역가가 감당해야 할 ‘창조적 오역’과 ‘의도적 이탈’의 가치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의미를 박제하는 대신, 다른 언어의 토양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대응의 부재를 결핍이 아니라 풍요로 바꾸는 힘. 그 힘이 번역을 전달의 기술에서 하나의 예술로 끌어올린다.


속도와 정확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도 우리가 인간 번역가의 고독한 선택에 귀 기울이는 까닭은, 바로 그 틈에서만 피어나는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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