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에서 시작되는 시간

주간단상 - 작은 여우들을 놓아보내는 밤

by 박 스테파노

1.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복음 6,17.20-26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 선언이다.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복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좀처럼 마음에 닿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성취와 계획의 결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애써 붙잡는 것이 아니라, 문득 우리를 찾아오는 순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자연의 변덕, 질병의 위협, 전쟁과 불안, 인간의 욕심과 횡포처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조건 속에서, 잠시 허락된 평온과 안도가 곧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력의 대가라기보다 삶이 건네는 예외와 같은 선물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멀게 느껴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처럼 보이는 미련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주 먼 곳을 바라보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좇는다. 모래를 움켜쥐듯 허망한 것을 붙들고, 정작 발치에 와 있는 기쁨은 알아보지 못한다. 행복은 늘 가까이에서 말을 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을 멀리 돌아 지쳐서야 발견하는 작은 기쁨들이 있다. 낡은 기억의 조각보 속에서 겨우 찾아내는 따뜻함들. 이제는 시선을 조금 낮추어 보려 한다. 늘 지나치던 자리, 익숙한 얼굴, 말없이 곁에 있던 이들을 다시 바라보려 한다.

어제 행복했던 사람보다,

내일 행복할 사람보다,

오늘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고된 날들 사이에 예외처럼 스며드는 시간들. 풍성한 자연의 빛, 무사한 하루의 건강, 다투다 돌아와 마주 앉는 저녁, 강한 이의 너그러움, 서로를 향한 작은 화해. 어쩌면 그런 순간들이 이미 행복의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더 커다란 것을 바라보느라, 이미 손안에 들어온 기쁨을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의 도착을 놓치지 않는다. 행복이 거창하지 않기에, 오히려 소박한 삶 속에 더 잘 깃든다.


그래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

행복이 작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나태주 <행복>-



2.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어린아이들의 가벼운 웃음처럼
아주 쉽게 아주 쉽게 잊을 수 있어

-동물원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중-


얼마 전까지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이어졌다. 거창한 고민이어서가 아니라, 사소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결국은 ‘완벽’이라는 허상을 좇는 마음이 가장 컸다.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 남들에게 약해 보이면 안 된다는 마음, 아직 오지 않은 일까지 미리 두려워하는 습관.


그러나 삶을 뒤흔드는 큰 파도 하나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런 걱정들이 나를 지켜 주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애쓰고 진심을 다했다면, 될 일은 되고 되지 않을 일은 되지 않는다. 이제는 생각 때문에 잠을 잃지 않기로 한다. 꿈이 찾아오는 잠은 그 자체로 이미 소중하니까.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

- 아가 2:15


지난 세월을 오래도록 상처뿐인 시간이라 여겼다. 하지만 돌아보니, 오히려 그 시간은 회복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다. 스스로를 할퀴며 괴롭히던 날들은 이미 뒤로 멀어졌다. 새살이 돋아나듯, 조금씩 달라지는 하루가 회복의 증거로 다가온다.


어렵게 선물처럼 얻은 이 삶을 이제는 지키고 싶다. 주변의 시선과 쓸데없는 참견, 스스로 만들어 낸 고독과 열등감. 그 모든 것을 ‘작은 여우들’이라 부르며 놓아보내려 한다. 우리의 포도밭에 꽃이 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삶이 그 안에서 다시 숨 쉬도록.


twookidz.com 제공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곁에 서야 한다. 함께 걸어 주는 친구가 되고, 작게나마 빛을 건네는 촛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의 모습일 것이다. 오래전 죽음으로까지 사랑을 증명했던 그 길이 우리에게 남겨 준 방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생각한다.

나보다 조금 더 힘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하루를 살자고.



3.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커녕 날마다 새롭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은 좋은 문학을 두고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사람 또한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 했다. 얼핏 평범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 깊이란 결국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통은 낡아지지 않는다. 반복될수록 더 새롭게 다가온다.


난관은 어느새 이력이 되었고, 호소는 진부한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루하루 버거운 삶을 견디지만, 그래도 버티는 쪽을 택한다. 시간은 때로 우리를 소모시키지만, 동시에 우리를 통과하게 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일상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작고 비참한 인내의 이어짐에 가깝다. 지루한 하루가 또 다른 불확실을 던져 놓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는 끝없이 등을 밀어낸다. 돌을 밀어 올리는 일처럼 헛되어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고통은 매일 새 얼굴로 찾아온다. 그래서 결코 진부해지지 않는다.


이 새로운 날들 속에서 ‘친구’라는 말도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영원한 친구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오래 지나온 시간들이 이미 가르쳐 주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 15.13-


한때 성경공부에 열심이던 시절, 좋아하는 구절을 물으면 늘 이 말씀을 대답처럼 꺼내곤 했다. 완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모른다 말하기도 어려워 붙들고 있던 문장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절을 깊이 되새길 기회는 많지 않았다. 삶 속에서 ‘영원한 친구’라는 말이 얼마나 허약한지 자주 체감했기 때문이다.


친구란. Getty Images 제공


요즘 다시 펼쳐 본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옮겨져 있었다.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그리고 다른 번역에서는 ‘one’s friends’가

“those whom one loves.”로 표현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 순간, 친구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새롭게 남았다.


결국 남는 답은 단순하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포도나무의 비유로 사랑을 말하는 요한복음은 흔히 사랑의 복음이라 불린다. 그 사랑의 자리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다. 예전의 얼굴이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새로운 얼굴들 속에서다. 그들의 진심을 알아보며, 비로소 사랑이라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고 싶어진다.


이제는 애써 멀어진 인연을 붙잡지 않으려 한다.

지금 여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4.

연휴의 끝, 설 다음 날은 교회력으로 ‘재(灰)의 수요일’이다. 이 날을 시작으로 사순절의 마흔 날이 열리고, 부활로 향하는 가장 깊은 시간이 시작된다. 교회 전례 안에서 이 시기는 단순한 절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는 가장 조용하고도 엄숙한 여정이다.


이 준비의 시간 앞에서 유럽에는 오래된 풍습 하나가 있었다. 사순절을 앞두고 고기를 미리 나누어 먹으며 즐기던 카니발이다. 그것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기쁨과 작별하는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의식이었다. 기쁨을 마음껏 누린 뒤, 스스로 절제의 길로 들어가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의 형식이었다.


카니발(Carnival)의 어원은 부활절 전 40일간의 금욕 기간을 앞두고 고기를 먹던 풍습에서 비롯된다. 라틴어 ‘Carne(고기/살)’와 ‘Vale(작별/안녕)’가 합쳐진 ‘Carne vale’, 곧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자어 사육제(謝肉祭) 역시 같은 의미를 품는다. 고기와 작별하며 절제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카니발은 흔히 먹고 마시는 흥청거림으로 오해된다. 금욕을 비웃는 방종의 시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학자이자 기호학자였던 미하일 바흐친은 이러한 이해를 두고 카니발에 대한 “천박한 보헤미아적인 이해”라 비판했다. 그의 시선에서 카니발은 무질서의 축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삶의 원리를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중세의 농노와 소작민들에게 고기와 술은 사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기는 육체보다 마음을 더 억눌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동체는 응축된 긴장을 풀어낼 하루를 마련했을 것이다. 억눌림이 폭발하기 전에 스스로 숨을 고르게 하는 장치였다. 그것은 어쩌면 퍼지 같은 극단적 상상이 아니라, 인간을 지키기 위한 오래된 지혜에 가까웠다.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의 핵심은 ‘교체와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다. 뒤집힌 세계는 파괴가 아니라 새로움을 예비한다. 웃음과 조롱은 부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긍정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내려감은 올라감을 준비하고, 끝남은 시작을 품는다. 그래서 카니발은 사순절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떠들썩한 시간이 가장 고요한 참회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피터르 브뤼헐의 1559년 작품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빈미술사 박물관


재의 수요일에 남는 것은 이름 그대로 ‘재(Ash)’다. 타오른 뒤 남은 잔여물, 더 이상 타지 않는 마지막 흔적이다. 가톨릭 전례에서 사제는 신자의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재를 얹으며 말한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짧은 선언은 인간의 유한함을 가만히 일깨운다.


이 재는 지난 수난주일에 나누었던 종려가지를 모아 태워 만든다. 환영의 상징이었던 가지가 한 해 뒤 재가 되어 돌아온다. 기쁨과 환대, 실패와 죄, 지나온 모든 시간이 그 재 속에 함께 섞인다. 우리는 그 재를 이마에 얹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다시 시작을 결심한다.


이 절기는 동서양의 많은 문학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은 인간 존재를 가장 간결하게 드러내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작가 그레이엄 그린은 이 날을 완전한 성인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실패한 죄인들’을 위한 날로 이해했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마의 재를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 깨닫는다. 이 절기는 도덕적 우월을 주장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같은 흙에서 왔음을 인정하는 시간이다. 누구도 더 높지 않고, 누구도 덜 상처 입지 않은 자리. 그가 말한 것은 일종의 ‘평등한 겸손’이었다.


재의 수요일은 끝을 말하는 날이 아니다.

타고 남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부름이다.

우리는 결국 재가 되겠지만, 그 재 속에서 또 다른 삶의 씨앗이 준비되고 있다.



5.

재의 수요일에 사제가 신자의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읊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라는 문장은 그레이엄 그린의 문학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닮아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먼저 고결한 영혼이 아니라, 쉽게 부패하고 무너지는 육체적 존재다. 더운 공기 속에서 땀 흘리며 흔들리는 존재, 은총보다 나약함에 먼저 노출된 존재로 그려진다.


『권력과 영광』의 ‘위스키 신부’는 이러한 인간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교회의 규율을 어기고 사생아를 두었고, 술 없이는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는 실패한 사제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달아나면서도 성물을 끝내 놓지 못한다. 그의 초라한 걸음은 재의 수요일이 단순히 죽음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구원을 드러내는 시간임을 말해 준다.


그린에게 죄란 단순한 타락이 아니라 은총이 스며들 틈과 같다. 이마에 찍힌 재의 십자가는 깨끗한 피부 위에 얹힌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 난 영혼이 자신의 근원을 인정하며 내쉬는 숨과 같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이 한 줌 먼지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신의 ‘끔찍한 자비’가 시작된다고 그는 보았다. 이 역설이야말로 재의 수요일이 지닌 묵직한 의미다.


『사건의 핵심』의 주인공 스코비 역시 비슷한 길을 걷는다. 그는 타인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긴 나머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모든 짐을 대신 지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완전히 떠안을 수 없는 존재임을 끝내 깨닫는다. 재의 수요일의 묵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먼지라는 사실은 우리가 신이 될 수 없으며, 누구도 완벽히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린은 이 치명적인 한계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는 “지옥은 우리 자신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밑바닥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를 찾으려 했다. 재의 수요일에 얹히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흔들었던 승리의 가지를 태운 것이다. 영광의 기억은 타서 가루가 되고, 그 가루가 인간의 비참함 위에 내려앉는다. 이 과정은 추락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하강이다.


그레이엄 그린과 『권력과 영광』. 위키백과, 열린책들 제공


그에게 신앙은 깨끗함의 증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럽혀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무엇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성소보다 버려진 창고와 음습한 감옥, 배신과 두려움이 뒤엉킨 국경에서 신의 흔적을 찾았다. 그곳에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게 되고, 바로 그 깨달음이 겸손이라는 문을 연다.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선언은 모든 지위와 자부심을 지운다. 사제와 죄인, 성자와 배교자가 같은 무게의 재로 돌아간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서로 닮은 존재가 된다. 이 평등한 허무 속에서 그린이 평생 붙잡았던 인간애가 드러난다. 그는 완전한 믿음보다 흔들리는 믿음을, 흠 없는 마음보다 뉘우치는 마음을 더 깊이 신뢰했다.


재의 수요일은 인간이 무너지는 날이 아니다.

스스로의 먼지됨을 인정하며, 다시 사랑을 배울 준비를 하는 날이다.



6.

재의 수요일의 묵상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시간에 가깝다. 그레이엄 그린의 인물들이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마에 묻은 재를 닦아내지 않는다. 얼룩진 그대로 신 앞에 선다. 사순의 긴 여정은 바로 그 먼지의 고백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기에, 오직 은총만이 이 허무를 채울 수 있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순은 도덕적 완성을 향한 행진이 아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조용한 하강이다. 이마에 새겨진 재는 우리 안의 위선을 태우고, 본래의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죄의 얼룩 속에서 오히려 거룩함을 드러냈듯, 사순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임을 인정하며 신의 자비가 머물 자리를 비워 두는 시간이다.


절제와 참회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안의 오만을 걷어 내고 ‘먼지’라는 진실 앞에 서는 용기다. 사순은 세속의 성공과 자기 확신을 태워 새로운 생명의 거름으로 바꾸는 시간이다.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마주한다. 사순은 자신이 한 줌의 재임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만 열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준비되는 부활의 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모두 짊어질 수 없는 존재다. 바로 그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연민하게 된다. 재의 수요일은 우리를 작아지게 하지만, 그 작아짐 속에서 서로를 품게 한다.


한 여성이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재를 받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2024년 재의 수요일은 발렌타인 데이와 겹친다. OSV 뉴스 사진/마르친 마주르, 영국 웨일스 가톨릭 교회 제공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이해인 수녀는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결국 삶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시 「재의 수요일에」는 우리가 한 줌의 먼지임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신의 숨결이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노래한다. “우리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선언은 두려움의 말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초대다.


또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재의 수요일을 두고 ‘스스로 바보가 되는 겸손’을 말하곤 했다. 이마의 재는 인간이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을 벗겨 내는 거룩한 표시라는 것이다.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 가엾이 여기고 더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사순의 참회는 개인의 결심에 머물지 않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걷는 연대로 이어진다.


재는 파괴의 흔적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지나가는 연단의 자국이다. 지난해의 종려가 타서 재가 되었듯, 우리가 붙들던 명예와 성취도 기꺼이 내려놓을 때 마음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이 재는 죽음의 가루가 아니라, 새 생명을 품은 흙과 같다. 사순의 침묵은 그 흙 속에서 싹트는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설이라는 기쁨의 절기를 지나 곧바로 사순으로 들어서는 올해의 흐름은 더욱 뜻깊다. 서로의 행복을 비는 마음과, 스스로의 허영을 태워 정화되기를 바라는 기도가 함께 놓인다. 재의 표시는 사라짐의 표시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라는 조용한 부름처럼 우리 이마 위에 남는다.



연휴와 사순을 맞아 당분간 글의 발행 빈도를 줄이려 합니다.


글쓰기는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하되, 그것을 서둘러 세상에 내어놓는 일만 잠시 삼가 보려 합니다.


부족한 글에 보내 주시는 과분한 공감이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반응이 가장 강한 즐거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순의 뜻을 생각하며, 그 달콤한 기쁨 또한 절제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는 더 깊은 글쓰기를 요구하는 여러 공모를 준비하며, 결과를 서두르기보다 과정을 충실히 쌓는 데 마음을 두려 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안으로 향하는 걸음으로 사순을 보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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