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단상 - 유행의 책임, 글쓰기의 윤리, 인간의 겸손
1.
한국 혈액원에서 헌혈 공여자가 해마다 줄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던 중, 최근 유행처럼 번진 ‘두바이 쫀득 쿠키’, 이른바 ‘두쫀쿠’를 헌혈자 감사 사은품으로 제공하자 헌혈자가 급증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순수하게 반가웠다. 사회공헌적 기획이란 이런 감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스쳤다. 세상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일 말이다.
하지만 그 반가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2주 남짓 흐른 뒤, ‘두쫀쿠’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사은품 제공이 중단되었고, 헌혈자 수는 다시 바닥을 쳤다는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누구 하나를 탓할 일은 아니었으나, 헌혈이라는 사회적 기부 행위가 유행에 기대어야만 유지되는 현실 앞에서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두쫀쿠 열풍’이 헌혈 수급량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 이 장면은, 현대 사회의 소비 문화와 이타주의가 기묘하게 맞물린 단면을 또렷이 보여준다. 보상의 물신화, 그리고 이타주의의 가벼움이 공기처럼 퍼져 있는 풍경이다. 전통적으로 헌혈은 공동체를 위한 숭고한 나눔이었고, 조건을 묻지 않는 이타성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두쫀쿠’라는 희귀하고 트렌디한 보상물이 등장하는 순간, 헌혈은 생명을 나눈다는 본질적 가치보다, 얻기 어려운 굿즈를 획득하는 교환의 행위로 빠르게 변모한다.
이때 헌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생명을 살렸다는 자긍심 대신, 구하기 힘든 유행템을 손에 넣었다는 소비자의 만족감이 그 자리를 채운다. 두쫀쿠 제공이 중단되자마자 헌혈자가 급감한 사실은, 참여의 동기가 내면의 윤리적 책임감이 아니라 외부의 전시 가능한 가치에 있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두쫀쿠’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SNS에서 자신을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연출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소품이다. 보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전시할 ‘콘텐츠’가 사라진다는 뜻이고, 이는 참여 동기의 소멸로 곧장 이어진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6/nwdesk/article/6799329_37004.html
이 현상은 공공 의료 서비스마저 시장의 ‘팝업스토어 마케팅’ 논리에 포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정판 굿즈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단기적인 수치 상승, 즉 헌혈자 급증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시민 의식을 길러내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보상이 끊기는 순간 멈춰버리는 ‘조건 반사적 참여’는 공적 가치의 토대를 오히려 더 취약하게 만든다.
결국 ‘두쫀쿠 헌혈 사태’는 현대인의 선의가 얼마나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보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지표로 남는다. 헌혈이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미각적 유희’나 ‘트렌드 소비’와 결합되는 순간, 그 시스템은 유행의 주기만큼이나 짧고 불안정해진다. 보상은 행동을 촉발할 수 있지만, 보상의 부재가 곧바로 배신감으로 전환되는 순간, 공동체를 움직이던 도덕적 엔진은 조용히 멈춘다.
그렇다면 이곳, 스스로를 사회공헌의 장이라 호명하는 이 글쓰기 플랫폼의 기획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가. 사회공헌이라고 리포팅되는 이 공간 역시, 유행과 전시의 논리 위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이제 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게 되었다.
2.
최근 제법 이름이 알려진 한 출간 작가가 표절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놀랍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곳 브런치에서도 환대를 받으며, 오래전부터 부지런히 훔쳐 쓰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부터 남의 글을 가져다 쓸 작정이었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 문제는 악의보다 결핍에서 시작된다. 읽고 쓰기의 훈련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거의 예외 없이 하나의 벽 앞에 선다. 글쓰기에 빠져든 지 1년에서 2년 사이, 그 벽은 비교적 선명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보통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글쓰기를 멈추는 선택이다. 이 경우는 오히려 건강한 휴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제약도, 보상도 없는 공간으로 돌아가 다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벽을 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쉬되 실제로는 쉬지 않는 것이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답은 그 안에 있다. 공개를 멈출 뿐, 독서와 사적인 쓰기는 멈추지 않는 것. 조용히 읽고, 드러내지 않고 쓰며, 그것이 다시 쌓여 하나의 궤도로 돌아올 때 비로소 재개하는 것. 우회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가장 정직한 길이다.
다른 하나는 꼼수다. 글쓰기라는 일은 묘해서, 어느 순간 밀린 숙제처럼 느껴진다. 글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날, 매일 이어오던 생존 보고 같은 일상을 잠시라도 놓치면, 그나마 읽어주던 사람들마저 떠날 것 같은 불안이 고개를 든다. 이때 여러 꼼수가 작동한다. 이미 쓴 글을 조금 고치거나, 윤문과 퇴고를 거쳐 다시 올린다. 나 역시 자주 쓰는 방식이다.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마음 한편이 늘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럼에도 ‘중단하지 않는다’는 흐름이 주는 효능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양해를 구할 뿐이다.
문제는 최악의 선택이다. ‘남들은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대놓고 베껴 쓰는 일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가장 흔한 방식은 여기저기서 문장을 짜깁기하는 것이다. 평론, 비평, 독후감, 감상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실상은 이 블로그에서 조금, 저 카페에서 조금, 위키 사전에서 조금씩 가져다 붙인 결과물이다. 이곳에서도 안타깝게 그런 글들이 눈에 띈다. 표절 검색 도구를 돌려보면, 출처의 흔적이 또렷한 글들이 제법 나온다.
여기에 신기술의 유혹이 더해진다. 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 AI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버전이 거듭 업그레이드되며,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문장들도 늘어났다. 문제는, AI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그럴듯한 거짓말’이 그대로 사용자의 글이 되어 등장한다는 점이다. 검증되지 않은 문장, 책임지지 않는 서술, 출처 없는 확신이 ‘나의 문장’이라는 얼굴을 쓰고 유통된다. 이것은 표절보다 더 깊은 곳에서 글쓰기의 윤리를 훼손한다. 최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은 결국 남는 흔적이다. 그 흔적이 타인의 문장으로 덧칠된 것인지, 스스로의 시간과 고통을 통과한 것인지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 벽 앞에서 멈추느냐, 돌아가느냐, 아니면 훔치느냐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 역시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온다. 글쓰기는 속일 수 있어도, 시간은 끝내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3.
더 나쁜 경우도 있다. 글을 표절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타인의 사연과 기억까지 훔쳐 오는 일이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시작은 대개 프로필과 이력의 속임이다. 출간되지도 않은 책을 출간작으로 표기하고, 돈을 주고 통과한 사설 등단 업체의 이력을 ‘등단 작가’라는 말로 포장한다. 그보다 더 황당한 경우도 있다. 직업과 출신을 꾸며내는 일이다. 특히 과거에 특수한 직업군에 속해 있었음을 내세우는 거짓말은 유독 자주 목격된다.
이런 설정의 약발이 떨어진다 싶으면, 정말 인간 말종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꼼수가 동원된다. 바로 거짓 ‘병팔이’다. 아파본 사람, 지금도 투병 중인 사람은 그 사연을 읽는 순간 진위를 비교적 쉽게 가려낸다. 한때 연예인들이 주목을 받기 위해 ‘암밍아웃’이나 ‘병밍아웃’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 말하던 한 인기 연예인은 음주 문제로 지적을 받자, 슬그머니 공황장애가 아니라 불안증이었다고 말을 바꾼다. 살면서 마주치는 패닉의 경험이 일시적 증상인지, 깊은 병증인지는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의료의 판단 영역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이름 하나를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일조차 버겁다.
암 발병률이 높아지면서, 병은 어느새 관심을 끄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암 생존의 시간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늘 망설임이 겹겹이 쌓여 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주변에 알려야 하지만, 아직 ‘암환자’라는 존재를 향한 사회적 이해는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고백에는 늘 불이익이 따른다. 일상에서도, 가계에서도, 취업의 문 앞에서도 더욱 그렇다.
나 역시 혈액암 환자임을 밝히게 된 것은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혈액암협회에서 보험회사의 사회공헌으로 마련된 뮤지컬 관람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객석에 앉자, 주변의 일반 관람객들이 자리 변경을 요구했고, 노골적인 기피의 시선이 날아왔다. 투병과 그 이력은 이렇게 쉽게 꺼낼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그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이마저 훔쳐 자기 서사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곳에서 종종 마주한다. 솔직히 말해,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모든 예술은 ‘모방’을 근원으로 삼는다. 미학은 오래도록 이를 ‘미메시스’라는 말로 사유해 왔다. 모차르트를 시기하던 살리에르, 미켈란젤로를 질투하던 브라만테 역시 훔쳐서라도 갖고 싶은 재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자, 어쩌면 예술혼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모를 것이라 믿으며,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내놓는 일은 분명히 부끄럽다. 모두가 모르거나 모른 척하더라도, 단 한 사람만큼은 반드시 알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차라리 ‘대놓고 훔쳐라’고 말하곤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용이다. 출처와 원문을 분명히 밝히고, 왜 그 문장을 가져왔는지를 덧붙이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글이 된다. 그 문장에 마음이 멈춘 이유와, 거기서 이어지는 사유를 솔직하게 풀어놓는다면 충분히 좋은 감상문이 된다. 그다음은 필사다. 따라 쓰기는 생각보다 큰 힘을 지닌 훈련이다. 반복해서 옮겨 적는 과정 속에서 문장은 서서히 자신의 말투로 변용되고, 다시 정립된다.
다만 이 모든 것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노력이다. 잘 쓰고 싶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쓰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잘 읽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결핍부터 채워야 한다. 읽을 힘이 없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4.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창세기 2,1-
라틴어 HUMUS와 HOMO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HUMUS는 대지, 곧 흙을 뜻하고, HOMO는 사람을 가리킨다. 영어 human이라는 단어 속에는 이 오래된 혈연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사실은 humble 역시 HUMUS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이다. 인간과 겸손, 그리고 대지는 하나의 어원적 호흡 안에서 이어져 있다.
겸손하다는 것은 대지처럼 낮아지는 일일 것이다. 앞서 나서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며, 그저 자기 자리에 머무는 태도. 그러면서도 대지는 묵묵히 일용할 양식을 길러내고, 지친 생명들이 잠시 몸을 내려놓을 수 있는 단단한 바닥이 된다. 어쩌면 가장 큰 힘과 능력을 지닌 존재는 바로 이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다만 드러내지 않기에 위대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성경은 예수의 변모(變貌)를 중요한 사건으로 전한다. 예수는 수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기도하던 중,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내 안에는 늘 같은 질문이 남았다.
“십자가 위에서 그 변모를 대중 앞에 보이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지 않았을까?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왜 굳이 숨기고 계셨을까?”
평안으로 채워진 날들 속에서는 쉽게 닿지 않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어수선하고 하루가 버거운 요즘의 시간 속에서, 예수의 변모 복음은 조금씩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사람의 모습으로 함께 머무는 일, 가장 사람다운 방식으로 세상에 머무는 일이 곧 대지와 같은 겸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찬란한 빛이 아니라, 낮고 조용한 동행만으로도 사람들이 깨닫고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은 아닐까. 사람이 흙에서 왔듯, 인간은 본래 대지와 같은 겸손을 품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human의 근원적 성향은 결국 humble로 귀결된다.
겸손을 지켜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나의 지난 시간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욕심은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남의 티끌과 잘못을 들추는 마음이 말이 되고, 글이 된다. 되돌아오는 화살과 손가락은, 내가 먼저 던졌던 욕심의 메아리일 터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대지를 바라본다. 낮은 자세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 침묵의 넓이를. 누군가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 갈 틈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보시니 참 좋았다.”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지만,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삶을 산다. 그래서 기도하며 되뇌는 말들, 운명과 소명, 그리고 순명. 스스로의 꼴값을 다하는 시간을 구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완전함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삶이기를 바란다. 그 삶의 뒷모습에 슬픔이 새겨진다 해도, 감사. 또 감사.
5.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찾는다.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짧은 문장들이 다시 마음을 붙들고, 그 끌림에 이끌려 책을 뒤적인다. 서점에서도 쉽게 손에 닿지 않는 글들을 일부러 찾아 읽는 일에는 묘한 맛이 있다. 신형철이 끝내 놓지 않는 질문은 ‘슬픔’이다. 이 주제는 늘 불편하다. 그는 자신이 슬픔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 가장 슬프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슬픔인 사람에게 그 문장은 멀리서 울렸다가 사라지는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인생이란 타인의 뒷모습에서 얼굴을 찾는 일이라는 그의 말 앞에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제는 제법 괜찮아졌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는데, 잠자리에 누운 순간 이런저런 속상함이 방 안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들의 삶이 이토록 부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따뜻한 밥 한 끼, 그럴듯한 커피 한 잔, 사소한 성취의 기쁨, 멋쩍은 자랑,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인연들. 사랑, 우정, 가족이라는 이름의 풍경들.
소중한 것들은 늘 사라지기 마련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사라졌을 뿐이라 스스로를 설득해 보지만, 속상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사랑, 평화, 우정, 건강, 행복. 그 자리를 대신해 다른 것들이 들어온다. 참회와 성찰, 사유와 고백. 들고 나는 모든 것들은 끝내 뒷모습으로만 기억된다. 그래서 인간은, 어쩌면 태생적으로 슬픈 존재인지도 모른다.
신형철은 참는 자와 참을 수 없는 자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자들은 늘 참을 수 없다고 말하며, 결국 참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참는 자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참는다. 슬픔이 자신인 사람은 오랜 시간 울음을 참아 온 사람이지만, 정작 그 사실을 스스로는 잘 알지 못한다. 그의 문장에 잠시 마음을 얹고, 작은 위로로 삼는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만을, 바꾼다.”
지난 2년은 죽음을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누군가의 섭리처럼 다시 희망을 붙잡는다. 죽음을 극복하면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이라는 말을 마음에 품고 하루를 살아낸다. 여전히 버거움은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응원은 아직 유효하다. 삶은 그렇게, 감당해 낸 사람의 얼굴만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