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묵상 - 사순 제1주일, 결핍의 자각과 은총의 문턱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새겨진 잿빛 십자가의 서늘함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사순 제1주일의 문 앞에서 ‘광야’라는 거울과 마주 선다. 전례가 들려주는 말씀은 에덴동산의 비극에서 시작해, 로마서의 깊은 통찰을 지나, 유다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흐름은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인간의 상처에서 출발해 구원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제1독서인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 했던 욕망이 어떻게 낙원을 멀어지게 했는지 고백한다. 뱀의 유혹 앞에 무너진 첫 인간의 이야기는 먼 신화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되풀이되는 실존의 장면이다. 스스로 선악의 기준이 되려는 마음, 경계를 넘어서려는 충동, 그 오래된 불순종이 오늘 우리의 갈등과 결핍 속에서도 여전히 숨 쉰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 창세기 3장 6-7절
이 장면을 단순한 ‘범죄의 기록’으로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인간 의식의 탄생이라는 더 깊은 의미가 스며 있다. “눈이 열렸다”는 말은 전지함의 획득이 아니라 보호막의 상실을 뜻한다.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본다. 하느님 없이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을, 그 결핍을, 처음으로 자각한다.
열매를 먹은 뒤 인간이 발견한 것은 신성이 아니라 ‘알몸’이었다. 이 알몸은 육체의 노출이 아니라 존재의 가난함을 드러내는 표지다. 숨길 것 없는 나약함,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는 깨달음, 그것이 바로 ‘아담적 인간’의 예형(豫型, 본보기, ProtoType)이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살던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두렁이를 만든 행위는 인간의 첫 번째 문화적 몸짓이다. 결핍을 스스로 가려보려는 애처로운 시도다. 그러나 금세 말라버릴 잎으로는 존재의 불안을 덮을 수 없다. 이 실패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배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난한 마음’이 시작된다.
사순 제1주일의 광야에서 예수는 아담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아담이 풍요 속에서 더 가지려 했다면, 예수는 결핍 속에서 철저히 비우신다. 굶주림 속에서도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시는 그 침묵의 선택이야말로 참된 아들 됨의 증거다. 인간의 미약함을 인정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스며든다. 사순은 무화과 잎을 벗고, 꾸밈없이 주님 앞에 서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 로마서 5장 14절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인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 인간의 한계를 은총의 논리로 다시 읽어낸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지만, 한 분의 순종으로 생명이 열렸다. 죽음의 질서가 지배하던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 것이다. 사순의 40일은 죄책에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죽음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건너가는 여정이다.
바오로가 말하는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단절된 데서 오는 근원적 소외다. 아담이 벌거벗음을 깨닫고 숨었을 때 느꼈던 수치심은, 하느님 없이는 채워질 수 없는 ‘텅 빈 자리’를 마주한 충격이었다.
이 결핍의 자각이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징검다리가 된다. 아담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죽음을 가져온 부정적 예형이라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사랑으로 생명을 여신 완성된 원형이다. 아담의 알몸이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수치를 덮는 은총의 옷이 된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이 인간 조건을 물려받았다. 한계와 이기심, 그리고 쉽게 무너지는 마음. 그러나 전례는 이 어둠보다 더 강한 선물을 말한다. 은총이다. 아담의 자각이 비참함의 시작이었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자비의 발견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화과 잎을 엮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를 가리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생명의 옷을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사순의 광야는 인간의 눈물이 은총의 샘으로 바뀌는 자리다.
인간의 실패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는 전주곡이 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벌거벗은 순간, 우리는 아담의 후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로 건너간다. 죽음이 지배하던 자리에 생명이 왕 노릇 하기 시작한다.
사순은 자신을 꾸미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결핍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채워진다.
광야에서 배우는 사랑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 광야에서 단식하시는 예수의 모습으로 사순의 중심을 드러낸다. 빵과 권력, 그리고 하느님을 시험하라는 세 가지 유혹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건드린다. 그러나 예수는 신적인 힘으로 맞서지 않으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의 말씀에 의지해, 가장 가난하고 겸손한 인간의 자리에서 유혹을 이겨내신다. 굶주림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그 모습은, 풍요 속에서도 공허를 느끼는 우리에게 참된 배부름이 어디에서 오는지 묻게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 이 세상에서 무력했던 사람, 야위고 볼품없던 사람,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것을 못 본 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들과 고독한 노인 곁에 묵묵히 머물렀다. 기적 같은 것은 행하지 않았지만, 기적보다 훨씬 깊은 사랑이 그 휑한 눈에 흘러넘쳤다. 그는 자신을 저버린 이,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원망의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중에서
엔도 슈사쿠가 그려낸 예수는 전능한 승리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무력하고, 야위었으며, 기적보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머무는 동반자로 나타난다. 이 낯설고도 슬픈 초상을 이해하려면 「요한 복음서」의 한 구절과 마주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예수의 깊은 고독이 담겨 있다. 군중은 표징을 보고 환호했지만, 그 환호가 얼마나 쉽게 식어버리는지, 열광이 얼마나 빠르게 배신으로 변하는지 예수는 이미 알고 계셨다. 인간의 나약함과 변덕을 아셨기에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지할 수 없었다.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없었던 고독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분의 위대함은 ‘알고도 머무르셨다’는 데 있다. 배신을 예견하고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가엾이 여기며 끝까지 곁에 남으셨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불신(不信)’은 냉소가 아니라 연민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아셨기에, 기적을 요구하는 욕망 뒤에 숨은 외로움을 보셨다. 엔도 슈사쿠가 말한 “기적보다 훨씬 깊은 사랑”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를 선택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 고독은 광야에서 홀로 유혹을 견디시는 모습과 겹쳐진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어쩌면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라는 요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화려한 증명 대신 순종과 사랑을 택하신다. 실망과 배신,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할 때 우리는 바로 그 ‘고독한 예수’를 만난다. 그분은 영웅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슬퍼하는 이 곁에 머무르고, 상처 준 이를 원망하지 않는 사랑, 그 연약한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참된 기적임을 보여주신다.
사순은 그분의 고독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는 시간이다. 나 역시 그분을 외면했던 군중 가운데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알고 사랑하시는 시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 고독에 동참할 때 메마른 우리 마음에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이 살아난다.
사순 제1주일의 말씀이 가리키는 끝은 ‘관계의 회복’이다. 첫 아담이 관계를 끊고 고립을 택했다면,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는 광야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되심으로 끊어진 다리를 다시 놓으셨다. 우리가 실천하는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고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마음의 자리를 비워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깨닫는다. 사순은 자신을 괴롭히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을 알아보는 여정이다. 유혹은 피해야 할 적이 아니라 믿음으로 마주해야 할 자리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광야의 거친 바람 끝에도 봄의 기운이 스며들듯, 회개의 눈물 속에서 새 생명이 움튼다. 오늘의 기도가 광야에 울리는 작은 노래가 되어, 사순의 끝에서 우리 모두가 더 맑아진 얼굴로 부활의 빛을 맞이하기를 조용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