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모, 멈추어 생각하는 용기

사순묵상 - 사순 제2주일, 산 위의 빛, 멈춤의 시간

by 박 스테파노

사순 2주일의 복음은 그 유명한 “예수의 변모”를 들려준다. 오늘 마태오복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시는 사건을 전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 마태오 복음 17장 2절


눈부신 장면 속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다. 율법과 예언을 상징하는 두 인물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시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과거와 현재, 약속과 성취가 한 자리에 겹쳐진다. 이를 본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이곳에 머물고 싶다고 말한다. 영광의 순간을 붙들어 두고 싶은 마음, 빛나는 체험을 삶의 종착지로 삼고 싶은 인간적인 열망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자리는 머무는 곳이 아니다. 곧 다가올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야만 하는 여정의 한가운데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르신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 마태오 복음 17장 9절


변모(變貌)는 눈부신 상승의 체험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려가야 할 길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확신의 절정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 채 품어야 하는 신비의 순간이다. 인간은 분명히 무언가를 보았으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고,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다. 이 머뭇거림이 바로 사순의 리듬이다. 빛을 본 뒤 다시 일상으로 내려가는 움직임, 수직의 황홀을 수평의 삶 속으로 가져오는 전환이다.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나는 『꽃들에게 희망을』을 떠올린다. 트리나 폴러스가 쓴 이 짧은 우화는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존재의 방향을 근본에서 묻는다.


줄무늬 애벌레는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애벌레 기둥’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서로를 딛고 오르며 정상에 닿으려 애쓰는 그 움직임은 경쟁과 성취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나 꼭대기에 이르러 발견하는 것은 비어 있음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올라갔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와 남을 밝고 올라서는 오욕과 오만만 가득한 무모하고 아찔한 시기와 질투의 탑들 뿐.

『꽃들에게 희망을』. Paullist press 제공


작품의 핵심은 내려놓음을 통한 '변화'에 있다. 이 깨달음은 실패가 아니라 전환의 문이다. 노랑 애벌레가 선택하는 길은 더 높은 곳이 아니라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변화를 견디는 시간. 그것은 사라짐처럼 보이지만, 실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다.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는 순간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존재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쟁취가 아니라 변형, 소유가 아니라 관계로의 이동이다.


결국 꽃들에게 희망이 되는 존재는 가장 높이 오른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바꾸어 다른 생명과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다. 변모는 위로 치솟는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임을 이 우화는 조용히 일깨운다.


이 지점에서 그리스 철학의 에포케(epoché)를 떠올리게 된다. 에포케는 판단을 멈춘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단정하지 않고,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태도다. 논쟁 속에서 이 말도 맞는 듯하고 저 말도 타당하게 들릴 때, 성급한 결론 대신 멈춤을 선택하는 일. 그것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사유의 용기다.


에드문트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에포케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노에마(나에 의해 파악된 본질)는 노에시스(나의 주관)가 어떻게 향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조차 이미 해석을 거친 결과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순간에는 단정 대신 보류가 필요하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먼저 바라보는 일. 설명하기보다 머무는 일.


타보르 산의 제자들이 경험한 것도 어쩌면 이런 멈춤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빛을 보았지만 그 의미를 곧바로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삶 속에서, 관계 속에서,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그 빛을 천천히 이해하게 되기 위해서였다.


사순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올라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판단을 서두르지 말고, 지금의 자리에서 조용히 바라보라고 초대한다. 변모의 빛은 눈부신 체험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멈춤 속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우리 안에 스며든다.



멈춤에서 피어나는 변모


다시 변모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변모란 탈바꿈이며 생장의 신비다. 땅을 기어가던 애벌레는 더 어둡고 낯선 번데기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꽃들에게 희망을 건네는 나비로 날아오른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사진기자가 안경을 벗고 망토를 두른 채 슈퍼맨으로 바뀌는 장면도, 초록빛의 볼품없던 존재가 한순간 아름다운 공주로 거듭나는 이야기 역시 같은 구조를 지닌다. 오래전 대중문화를 뒤흔들었던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작은 점 하나로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설정 또한 그렇다.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그 변화가 남기는 울림은 공통적으로 크다. 예상보다 깊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하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극적인 전환은 결국 탄생과 죽음일 것이다. 참된 변화는 움직임이 아니라 멈춤에서 시작된다. 그 멈춤 가운데 가장 치열한 선택이 죽음이라는 문턱이다. 빛나는 영광에서 물러나, 모두가 등을 돌린 자리에서 가장 낮은 이들과 슬픔을 나누는 길.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튼다.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from Biblia Sacra). DaneFineart 제공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수제자들과 산에 올라 기도하시다가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신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이런 물음이 마음을 스친다. 십자가 위에서 그 변모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다면 더 많은 이들이 돌이키고 믿음을 갖지 않았을까. 왜 그 영광을 숨기셨을까.


평온한 일상 속에서는 이 물음이 막연한 궁금증에 머물렀다. 그러나 삶이 흔들리고 마음이 어두워지는 시간을 지나며, 그 장면의 의미가 조금씩 또렷해진다. 예수의 변모는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지만, 세상 앞에 과시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세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다. 거룩한 드러남은 군중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마태오복음이 사용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는 단순한 변신이 아니다. 초월적(메타) 차원이 인간의 실존을 변화하게(모르포오) 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겉모습의 수정이 아니라 존재의 재구성이다. 애벌레가 고치라는 어둡고 좁은 공간을 선택하는 일은 과거의 자아를 해체하는 결단과 닮아 있다. 묵상으로 바라보면 이는 죽어야 다시 산다는 역설의 언어다. 나비의 날갯짓은 물리적 비상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은 존재가 얻는 자유의 표지다. 변태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자라난 생명이 완성하는 침묵의 기적이다.


하얗게 빛나는 예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빛 안에서 인간도 새로워진다. 우리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변모는 어제의 나를 벗어 두고 오늘의 나를 다시 입는 시간이다. 욕망과 의심을 눌러 다듬는 고된 무두질의 과정과 같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스스로가 달라졌음을 아는 일, 그 조용한 인식이 더 중요하다. 그 시간은 겸손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단단해진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머무는 길을 택하셨다. 가장 사람다운 모습, 대지처럼 낮은 자리에서의 동행. 거창한 설명이나 권위 있는 해석이 아니라, 함께 보고 함께 살아가는 경험 속에서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라신 듯하다.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사람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잠시 멈추어 대상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는 지적 겸손이야말로 변화의 출발점이다.


예수의 변모. 라파엘 산치오. 바티칸 피나포테카 제공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한다."

-폴 발레리-


무지는 연민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머물러 있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앎은 무지를 자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자각하며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멈출 때 멈출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욕구가 이끄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생각마저 그 흐름에 맞추어 변해 버린다. 무심히 자신을 놓아버렸던 시간을 돌아보면 아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듬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행복이 곧 나의 기쁨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다시, 오롯한 나로 살아가려 한다.

이 평범한 결심이 요즘을 고맙게 만든다.


오늘의 세계는 너무 쉽게 판단을 내린다. 얕은 지식을 명함처럼 내세우고, 간판처럼 걸어 두고,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목소리가 넘친다. 온라인과 미디어의 공간은 특히 그러하다. 타인의 복잡한 사정을 들여다보려는 인내 없이, 자신의 노에시스(나의 주관)만으로 성급한 노에마(나에 의해 파악된 진실)를 만들어 낸다. 그렇게 단순화된 판단이 관계를 메마르게 한다.


타인들은 틀렸어, 왜냐면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만큼 위험한 정념도 드물다. 이럴수록 잠시 멈추어 판단을 보류할 용기가 필요하다. 정지(stop)가 아니라 멈춤(pause)의 태도. 그것은 기계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능력이다.


깨달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된다.

어제의 나를 벗고 내일의 나를 맞이하는

매일의 작은 변모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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