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동이를 버린 자리에서

사순 묵상, 사순 제3주일 - 마르지 않는 샘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사마리아의 태양이 정수리를 내리쬐는 고요한 정오, 야곱의 우물가에 두 갈증이 마주 앉는다. 먼 길에 지친 유다인 예수는 물 한 모금을 청하고, 세상의 시선을 피해 홀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은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예수는 여인에게 '생수'를 제안하며 그녀의 은폐된 삶을 조용히 꿰뚫어 본다.


다섯 남편과 현재의 불안한 동거. 그 진실 앞에서 여인은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예배의 본질을 묻는다. 예수는 장소에 구속된 예배가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를 선포하며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낸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가 새로운 생명을 증언한다. 배척받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앞에 모여들어 세상의 구원자를 고백한다. 이 복음의 서사는 단순한 개종의 기록이 아니다. 결핍된 존재들이 진리의 근원에서 어떻게 해방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여정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 요한복음 4장 14절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예수. Living Theology 제공


우리 시대의 우물가는 스마트폰 화면이다. 정오의 햇살 대신 블루라이트가 얼굴을 밝히는 그 자리에서, 현대인은 저마다의 물동이를 들고 하루에도 수십 번 목마름을 채우러 접속한다. 팔로워의 숫자, 좋아요의 총합,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거울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갱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갱신은 언제나 미완으로 끝난다. 채워질수록 더 깊어지는 공동(空洞).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사마리아다.


사마리아 여인의 다섯 남편을 우리는 손쉽게 타인의 이야기로 밀어낸다. 그러나 우리가 차례로 기대었다가 돌아선 것들의 목록을 솔직히 펼쳐 보라. 성취, 관계, 이념, 쾌락,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를 불완전하게 붙들고 있는 무언가. 형태만 다를 뿐, 그 목마름의 구조는 우물가의 여인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다만 정오의 수치를 군중 속에 더 교묘하게 숨겼을 뿐이다.


예수가 여인에게 건넨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직면이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은 폭로가 아니라 초대였다. 은폐된 삶의 지층을 스스로 들여다보라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실상 앞에 서라는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손짓. 회심은 결함의 교정이 아니다. 결핍의 인정이고, 그 인정 안에서 비로소 열리는 다른 차원의 갈증이다. 목마르지 않다고 믿어온 사람은 생수를 청하지 않는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순간을 주목하라.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전환이었다. 매일 반복하던 채움의 의식을 멈추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 우리의 회심도 그 물동이를 내려놓는 결단에서 시작된다. 더 효율적인 물동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물 자체를 떠나는 용기. 무엇으로 자신을 채워왔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왜 이토록 채워도 비어있는지를 묻는 근원적 방향 전환이다.


우물가의 대화는 개인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여인의 증언은 마을 전체를 움직였고, 배척받던 이들이 생명의 자리로 모여들었다. 진정한 회심은 내면의 사건이되 결코 내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타인에게로 흘러넘치는 물이 된다. 나의 목마름이 치유될 때, 비로소 타인의 목마름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이것이 생수의 논리다. 받은 자가 증인이 되고, 증인이 모인 곳에 구원이 선포된다.



지팡이와 말씀, 바위와 심연 사이에서


요한복음에 앞선 탈출기 17장은 광야의 갈증을 다룬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물 한 방울 없는 르피딤에서 모세를 원망하며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한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호렙산의 바위를 치라고 명하신다. 모세의 지팡이는 권능과 심판의 기표다. 바위에서 터져 나온 물은 육체적 생존을 위한 일시적 해갈이자, 하느님 현존의 증명이었다. 반면 요한복음의 예수는 스스로가 '터져 나오는 바위'이자 '마르지 않는 샘'이 된다.


모세의 지팡이가 외부의 충격으로 기적을 끌어냈다면, 예수의 말씀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건드려 영적 생명력을 길어 올린다. 탈출기의 물이 '시험(마싸)'과 '다툼(므리바)'의 산물이었다면, 요한복음의 생수는 '용서'와 '통합'의 선물이다. 두 본문은 인간의 근원적 갈증이 오직 신적 개입으로만 해소될 수 있음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르다. 율법적 표징에서 인격적 만남으로, 두 텍스트 사이에는 깊은 이행의 강이 흐른다.


광야는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죽음의 공간이자 계시의 공간. 르피딤의 갈증은 단순한 수분 결핍이 아니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무너지는 신뢰의 위기였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원초적 항의였다.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원망의 형태를 빌려 터져 나온 것이다. 인간은 목이 마를 때 비로소 자신의 연약함과 마주한다. 그 직면의 자리에 하느님은 어김없이 등장하신다.


그러나 르피딤의 기적에는 그늘이 있다. 백성은 물을 얻었지만 질문을 거두지 않았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아닙니까?" 바위에서 물이 터진 뒤에도 의심은 지명(地名)으로 화석화되어 남았다. 마싸와 므리바, 시험과 다툼. 기적을 눈으로 목도한 이후에도 인간의 불신은 좀처럼 녹지 않는다. 표징은 보여줄 수 있지만, 마음의 광야까지 적실 수는 없었다. 이것이 율법적 표징의 근본적 한계다. 그 물은 육신의 생존을 연장했을 뿐, 영혼의 갈증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마사 므리바. Living Passages 제공


요한복음의 우물가에서 예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지팡이를 들지 않는다. 바위를 치지 않는다. 대신 한 여인의 삶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라는 청으로 대화를 연다. 권능의 시위가 아닌 필요의 고백으로, 요청하는 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내려놓는 것. 이것이 인격적 만남의 첫 번째 문법이다. 상대를 압도하지 않고, 상대의 언어로 먼저 말을 건네는 것.


모세의 지팡이가 딱딱한 외부의 바위를 쳤다면, 예수의 말씀은 인간 내면의 굳어버린 층위를 두드린다. 여인의 방어기제, 오랜 수치의 퇴적층, 민족적 적대감의 장벽. 이 모든 견고한 내벽을 예수는 폭력이 아닌 진실로 관통한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은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해방의 언어였다. 숨겨둔 것을 드러낼 때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용서가 진실보다 먼저 도달한다는 역설적 선포였다.


두 본문이 공명하는 지점은 갈증의 보편성이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우물가의 여인도, 오늘을 사는 우리도 근원적으로 목마른 존재다. 그러나 두 본문이 갈라지는 지점 역시 분명하다. 탈출기의 물이 집단적 생존을 위한 응급의 선물이었다면, 요한복음의 생수는 한 인격을 향한 내밀하고 전인적인 치유다. 율법의 시대가 표징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해야 했다면, 은총의 시대는 만남 그 자체가 이미 현존이다.


바위에서 물이 터지는 장면과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달려가는 장면을 나란히 놓아보라. 전자에서 인간은 수동적 수혜자다. 기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그러나 후자에서 여인은 능동적 증인이 된다. 생수를 받은 자가 즉시 생수를 전하는 자로 바뀌는 것이다. 모세는 바위를 쳤지만 예수는 사람을 세웠다. 광야의 물은 목숨을 이었지만, 우물가의 생수는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신적 개입의 목적지가 생존에서 변화로, 표징에서 인격으로, 집단에서 각자의 심연으로 깊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깊어짐의 끝에서, 여전히 목마른 우리가 서 있다.



고인 물과 솟구치는 샘, 야곱의 우물 앞에서


'야곱의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니다. 유대교와 사마리아교가 함께 기억하는 역사의 지층이자, 조상의 유산이 깃든 기억의 저장소다. 팔레스티나의 메마른 대지, 그리짐 산의 서늘한 그늘 아래 자리한 이 우물은 족장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물려준 유산이며, 대대로 갈증을 해소해 온 생존의 거점이다. 깊은 암석을 뚫고 길어 올리는 차갑고 투명한 물은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한 지혜와 율법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우물은 동시에 결핍의 기표이기도 하다. 매일 정오, 뜨거운 태양 아래 두레박을 내려야만 하는 반복적 노동. 그것은 채워도 다시 비워지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유한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 '제도화된 종교'와 '고착된 관습'의 한계가 바로 거기 있다. 예수는 이 우물가에 앉아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이라는 '고인 물' 너머의 '솟구치는 생수'를 이야기한다. 야곱의 우물은 율법과 혈통이라는 닫힌 세계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린 세계와 만나는 접점이다. 낡은 물동이를 버리고 진리의 심연으로 나아가는 영적 변곡점이기도 하다.


야곱의 우물. Seetheholyland.net 제공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다층적인 소외를 온몸으로 살아온 존재다. 이방인보다 더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자, 가부장적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이며, 도덕적 낙인이 찍힌 타자. 그러나 그녀가 예수와 대화하며 물동이를 버리는 순간,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뀐다. 결핍된 과거의 정체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선포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물이 고여 있는 과거의 전통이라면, 여인은 흘러가는 생명의 역동성이다. 예수는 이 소외된 존재를 통해 구원이 혈통이나 장소라는 닫힌 체계 안에 있지 않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기표는 언제나 자신이 가리키는 것보다 작다. 야곱의 우물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지층 아래의 물일 뿐이다. 물 자체의 근원은 아니다. 제도와 전통은 인간이 신성을 향해 뚫어 내린 수직의 통로다. 그러나 그 통로가 곧 샘은 아니다. 파는 행위와 솟구치는 행위는 방향부터 다르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 노력이 아래를 향한 굴착이라면, 예수가 약속한 생수는 위로 터져 오르는 역류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그 역류가 통과한 몸이다. 소외의 자리에 있던 그녀가 선포의 주체로 전환되는 순간, 질서 자체가 재편된다. 배제된 자가 증언자가 되고, 주변부가 중심이 되며, 결핍이 충만의 출발점이 된다. 복음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장 낮은 곳에 놓인 존재를 들어 올려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예수가 우물가에서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건이다.



전쟁의 시대, 연대의 우물가


예수는 선포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특정 지리에 신성을 부여하고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종교 민족주의에 대한 파격적인 부정이었다.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이란과 이스라엘, 그리고 그 배후의 미국이 얽힌 갈등은 현대판 '예배 처소의 전쟁'이다. 시오니즘과 이슬람 근본주의, 제국주의적 패권은 각자의 '성지'와 '이익'이라는 우물을 지키기 위해 타자의 갈증을 외면한다.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과 이란의 신권 정치, 미국의 군사적 개입. 이 모두는 자신들만의 우물을 절대화하며 무고한 생명들을 광야의 갈증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국경과 종교적 도그마를 초월한 보편적 인권과 평화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곳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도, 테헤란의 광장도 아니다. 고통받는 이들이 서로의 갈증을 알아보는 '연대의 우물가'다.


복음이 말하는 '때'는 먼 미래가 아니다. 적대적 타자를 형제로 인식하고 물동이를 나누는 바로 지금이다. 이란의 여성들이 히잡을 벗고 자유를 외칠 때, 이스라엘의 양심들이 점령에 반대할 때, 미국의 시민들이 군비 증강 대신 평화를 선택할 때, 비로소 '영과 진리의 예배'는 시작된다. 예수의 생수는 배타적 영토를 적시는 물이 아니다. 증오로 메마른 인간의 마음을 적시는 평화의 강물이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평화의 가능성을 붙잡아야 한다.


갈등의 삼각지대 위로 피의 제사가 흐르는 이 시대에,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우물가에서의 만남이야말로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원의 전형이다. 사순 시기의 묵상은 나 자신의 갈증을 넘어, 전쟁의 열기 속에 목말라하는 지구촌 이웃들에게 건넬 냉수 한 바가지를 준비하는 성찰이어야 한다.


그 냉수를 건네는 손은 언제나 먼저 자신의 목마름을 아는 손이다. 여인이 마을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갑자기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여인이었고, 같은 마을로 돌아갔으며, 같은 사람들 앞에 섰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자신의 갈증이 부끄러움이 아닌 증언의 재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핍이 언어를 얻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문이 된다.


Pray for peace. ABWE 제공


사순 시기는 광야의 시간이다. 교회는 매년 이 계절에 신자들을 르피딤의 메마름 속으로 데려간다. 금식과 절제는 자학이 아니라 설계된 갈증이다. 충분히 채워진 사람은 생수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는 의도적으로 물동이를 비워, 그 빈자리에 더 근원적인 목마름이 자리하도록 공간을 만든다.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 비어있음을 견디는 연습. 이것이 사순의 영성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바다.


그러나 묵상은 내면의 서재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물가의 대화는 마을 전체의 회심으로 번졌고, 광야에서 터진 바위의 물은 공동체 전체를 적셨다. 구원의 물은 언제나 흘러 퍼진다. 오늘도 가자의 폐허 속에서, 테헤란의 골목에서, 서울의 반지하에서, 저마다의 정오를 홀로 견디는 이들이 두레박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그들이 얼마나 오래 혼자 길어왔는지를 묻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물을 청했다. 주는 자가 먼저 받는 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이 역전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세상의 목마른 자들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그러해야 한다. 가르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앉으러 가는 것. 해결책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갈증을 인정하며 마주 앉는 것. 정오의 뜨거운 햇살 아래, 서로의 물동이를 내려놓고, 아직 마르지 않은 그 샘을 함께 찾는 것. 이것이 우물가의 복음이 이 시대에 건네는 마지막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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