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 묵상- 빛을 향해 파견된 자들에게
1. 기름 부음,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눈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를 보지 않는다. 주님은 사람과 달리 보니,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 사무엘 1서 16,7 -
사무엘이 이사이의 아들들 앞에 섰을 때, 그의 시선은 이미 어떤 형상을 찾고 있었다. 왕다운 풍채, 빛나는 눈빛, 어깨에 깃든 기품. 그러나 하느님은 그 시선을 조용히 멈추게 하신다. 맏아들 엘리압도 아니었고, 둘째도 셋째도 아니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막내,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소년 다윗이 마침내 불려온다. 그리고 그 머리 위로 기름이 부어진다.
기름 부음. 히브리어로 마쉬아흐, 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 우리가 ‘그리스도’라 부르는 이름의 뿌리가 바로 이 장면에 잠겨 있다. 기름 부음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조용한 선언이다. 세상의 눈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치를 향해 “이 사람이다” 하고 가리키는 손짓과도 같다. 다윗은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아들이었으나, 하느님의 눈 안에서는 가장 먼저 불린 이름이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지위와 재능, 외모와 성취 같은 것들. 사무엘 또한 그 한계 안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신다. 마음을 보신다. 이 한 구절은 신앙의 깊은 역설을 드러낸다. 참으로 보려면, 먼저 우리가 익숙하게 의지하던 눈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
사순 시기는 바로 그 내려놓음의 시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붙들고 살던 것들을 잠시 멈추는 계절. 익숙한 기준과 판단을 내려놓고, 그 비워진 자리에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 다윗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이 그를 왕으로 세우기 전에 먼저 하느님 앞에 세웠듯, 사순의 여정도 우리를 세상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조용히 세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렇게 오래전부터 미리 울리고 있었다. 들판의 바람 속에서 양을 치던 소년에게 흘러내리던 그 기름은 긴 세월을 건너 요르단 강가에 이르고, 마침내 골고타 언덕에서 그 뜻을 완성한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을 지나며 그 긴 이야기의 한 장면에 다시 선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이야기 속으로, 조용히 한 걸음 더 들어간다.
2. 실로암, 보내심의 물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라.”
그래서 그는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요한복음 9,7-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있었다. 제자들은 묻는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세운다. 죄의 원인을 가리는 일에 머물지 않으신다. 대신 조용히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일이라고.
예수는 땅에 침을 뱉어 흙과 섞는다. 손바닥 안에서 진흙이 만들어진다. 그 진흙을 장님의 눈 위에 바르신다. 그리고 한곳으로 보낸다.
실로암. 히브리어로 그 이름은 ‘파견받은 자’를 뜻한다. 요한복음은 그 의미를 굳이 풀어 설명해 둔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숨은 열쇠다. 그가 가서 씻은 곳, 눈이 열리던 곳, 그 샘의 이름이 바로 ‘파견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스스로를 여러 번 이렇게 부른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 이 말은 단순한 신원 확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명의 언어다. 나는 보냄받은 자다. 그리고 이제 너를 보낸다.
그래서 이 장면은 더욱 깊어진다. 장님의 눈이 열린 곳은 실로암이다. ‘파견받은 이’가 보낸 사람, 그가 ‘파견의 샘’에서 씻고 눈을 뜬다. 이 단순한 장면 안에 복음의 구조가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전례도 그러하다. 미사는 파견으로 끝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라틴어 전례문은 이렇게 말한다. Ite, missa est. ‘미사(Missa)’라는 말이 바로 이 파견, 곧 missio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모여 머무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공동체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방치가 아니다. 그것은 파견이다.
마치 실로암의 물로 눈을 씻은 사람이 다시 길을 나서듯, 미사를 마친 신자는 그리스도의 빛을 품고 세상 속으로 보내진다. 복음은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이 ‘돌아왔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는 단지 눈이 열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돌아온 사람이다. 눈을 뜬 사람은 돌아온다. 자신을 보내신 분에게로. 그리고 자신이 보냄받은 이유가 숨 쉬는 자리로.
신앙의 길은 늘 이와 비슷한 호흡을 지닌다. 나가고, 씻기고, 눈을 뜨고,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나선다. 우리가 매주 미사에 참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조용한 순환 속에 다시 들어가기 위함이다. 매번 조금 더 선명해지는 눈으로,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된 시선으로, 우리는 다시 파견된다.
실로암. 그 이름은 여전히 흐르는 물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보냄과 돌아옴이 서로를 부르는 신비의 샘으로.
3. 안식일의 균열, 낡은 세계가 무너지는 자리
“이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 요한복음 9,16 -
눈을 뜬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았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조사를 시작한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 누가 그 일을 했는가. 그는 정말 날 때부터 장님이었는가.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심문은 점점 깊어진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한 자는 죄인이라는 판단이다.
복음서 안에서도 손꼽히는 쓸쓸한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눈이 열린 사람 앞에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율법이었지만, 실제로 붙들고 있던 것은 자신들의 질서였다. 안식일 규정은 그 질서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예수의 행위는 바로 그 상징을 건드렸다.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한다는 일. 이것은 단순한 계율 위반이 아니다. 한 세계의 균열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지금의 질서가 곧 하느님의 질서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악의를 가진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선의로 가득하다. 진심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굳어 하나의 기득권이 되는 순간, 그 질서를 흔드는 모든 것은 위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예수는 그 균열을 피해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길이 결국 십자가로 이어진다. 바리사이들의 고발, 빌라도의 재판, 군중의 외침. 안식일에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던 그 순간부터, 예수는 이미 심판대 위에 서 있었다.
십자가는 그 균열이 끝내 드러난 자리다. 낡은 세계가 무너지는 자리. 율법이 사랑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자리. 죽음이 생명에게 길을 내어주는 자리. 그리고 부활은 그 무너짐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새로운 빛이다. 장님의 눈이 열린 사건은, 그 거대한 신비를 미리 비추는 작은 빛과도 같았다.
이제 그 물음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인가, 아니면 내가 익숙하게 붙들고 있는 질서인가. 누군가의 눈이 열리는 기적 앞에서 나는 함께 기뻐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져 묻는가.
사순 시기는 이 질문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간이다. 내 안의 바리사이를 마주하는 시간. 내가 얼마나 오래된 질서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고백하는 시간. 그 고백이 회심이며, 그 회심이 곧 눈 뜸이다.
장님은 실로암에서 눈을 씻었다. 우리는 사순의 끝에서 부활의 빛을 마주한다. 그 빛은 낡은 세계의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아니다. 오래된 세계를 통째로 흔들며 솟아오르는 빛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 파견받은 이, 안식일을 흔든 이. 그 여러 이름이 마침내 하나의 얼굴로 모인다. 우리는 지금 그 얼굴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4. 눈을 감는 용기, 잃어버린 것과 찾아진 것
수년 전 넷플릭스를 처음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영화가 <버드 박스> (2018, 수잔 비에르)였다. 눈을 뜨는 순간 죽음이 닥치는 세상.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눈을 가려야 하는 묵시록적 재앙의 이야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없이 많은 영상을 내어놓는 플랫폼에서 내가 처음 고른 작품이 ‘눈을 감아야 사는 세계’의 서사였다.
샌드라 블록이 연기한 맬러리는 엄마가 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사랑은 곧 잃을 것을 만든다. 잃을 것이 생기면 두려움도 함께 따라온다. 그러나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끝내 남는 것은 아이였다. 그리고 그 희망을 붙드는 이는 결국 엄마였다. 종말의 풍경 속에서도 모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의 중심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 어딘가에 놓여 있었는지 모른다. 그 소중한 자리를 지키는 이들 곁에서, 말만 앞세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금 더 단단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문득 스친다.
이 영화의 재앙은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눈을 뜨면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삶은 끝난다. 시각은 우리가 가장 많이 의지하는 감각이다. 우리의 일상은 거의 전적으로 눈에 기대어 서 있다. 그러니 시각의 상실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맨 인 더 다크> (2016, 페데 알바레스), <눈먼 자들의 도시> (2008,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줄리아의 눈> (2010, 기예르모 델 토로 제작·기옘 모랄레스 감독). 눈먼 사람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들이 유난히 깊은 두려움을 건드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상태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등장하는 장님은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다.
“당신은 사람의 아들을 믿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분이 누구입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 요한복음 9,35-36 -
날 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그 사람에게 시각의 부재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삶의 조건이었다. 그는 떨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심문하며 불안에 흔들렸다. 바리사이들은 분명히 보면서도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반대로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가장 중요한 것을 보게 되었다.
진짜로 잃어버린 것은 시각이 아니었다.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않으려는 마음, 그 완고한 마음이야말로 더 깊은 실명이었다.
지금은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스크롤을 멈추면 불안해지고, 알림을 끄면 뒤처지는 듯한 기분이 따라온다. 그럴듯한 이야기와 억지로 부풀린 담론들이 쉼 없이 눈앞을 지나간다. 그 속에서 마음은 자꾸 조급해진다. 잠깐이라도 눈을 뜨면 세상의 소란이 밀려들고, 짧은 분노 하나로 하루의 고요한 계획이 산산이 흩어진다. 그래서 때로는 눈을 감는 일이 더 용기 있는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실로암으로 향하던 그 사람을 떠올린다. 진흙이 눈에 발린 채 길을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파견받은 자의 샘’을 향해 걸었다. 그 걸음 자체가 이미 신앙이었다. 보이지 않는 채로 걷는 일. 보이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 일. 눈을 뜨기 전의 그 걸음 속에 이미 빛이 숨 쉬고 있었다.
사순의 끝이 가까워진다. 우리는 이 계절 동안 더 깊이 보려 했는지 모른다. 더 선명하게, 더 많이 보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간이 우리에게 청하는 것은 다른 일일지 모른다. 잠시 눈을 감는 일. 조급하게 뜬 눈을 거두고, 마음의 소란을 가라앉히고, 그 고요 속에서 진짜 보아야 할 것을 기다리는 일.
기름 부음을 받은 이는 겉모습으로 선택되지 않았다. 파견받은 자의 샘은 더 많이 보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눈을 씻는 자리였다. 안식일의 균열 또한 낡은 시선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눈을 감아야 살아남는 세상이 있다면, 눈을 떠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도 있다. 우리가 지금 걷는 길은 분명 후자에 가깝다. 그러나 그 눈 뜸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흙을 이기고, 실로암으로 보내시고, 마침내 빛을 허락하시는 분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두 눈에도 잠시 평화의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고요한 자리에서, 우리는 마침내 다른 눈으로 세상을 다시 뜨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