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 묵상: 해질녘, 부름, 그리고 남겨진 침묵
베다니아의 해는 유난히 더디게 저물었다. 병든 라자로의 거친 숨이 문틈을 스칠 때마다, 집 안의 시간은 모래시계 속에 갇힌 듯 멈춰 섰다.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소식은 전해졌으나, 길 위에는 먼지만 맴돌았다. 발걸음은 오지 않았다. 예수는 이틀을 더 머무셨고, 그 사이 라자로의 숨은 조용히 끊어졌다. 죽음은 예고도 없이 방 한가운데 앉아 자리를 차지했다.
마르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쓸고 닦으며 슬픔을 눌렀다. 마리아는 오빠의 식어가는 손을 잡고, 소리 없이 무너졌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빈자리와, 응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이 겹쳤다. 그 틈에서 자매의 영혼은 수의처럼 희게 질려갔다.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가 마을 어귀에 이르셨다. 마르타는 먼지를 털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분 앞을 가로막듯 멈춰 섰다.
"주님,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따져 묻는 문장이었고, 동시에 절망의 질서였다. 뒤늦게 달려온 마리아도 그분의 발 앞에 무너졌다. 같은 문장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님, 여기 계셨더라면..."
그러나 그 문장은 울음에 젖어 있었다. 단어마다 눈물이 맺혔다. 예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마리아와는 함께 울었다.말과 눈물, 이성과 슬픔이 맞닿는 자리에서, 그분은 무덤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무덤 앞에는 이미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공기를 짓눌렀다. 마르타가 조심스럽게 만류했다.
"주님, 벌써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는 멈추지 않았다. 돌을 옮기게 하셨다. 어둠이 드러났다. 그 깊은 곳을 향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닿는 음성이 울렸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명령이라기보다 부름에 가까운 소리였다. 닫혀 있던 세계를 흔드는 진동이었다. 잠시 뒤, 어둠 속에서 흰 천에 묶인 형체가 흔들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라자로였다. 다시 건너온 사람. 죽음 너머를 지나온 사람.
사람들은 놀라 물러섰다. 자매는 말없이 서 있었다. 예수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라자로는 수의를 벗었으나 말을 하지 않았다. 깊은 곳을 보고 온 눈에는, 이 마을의 풍경과 다른 침묵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기적을 말하느라 분주했지만, 그는 마리아 곁에 앉아 조용히 빵을 떼었다. 마르타는 다시 음식을 준비하며, 살아 있는 오빠의 손을 가끔 훔쳐보았다.
되돌아온 삶은 환희로 넘치지 않았다. 그 안에는 지워지지 않는 어둠이 함께 남아 있었다. 부활은 빛나는 축제가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 새겨진 낯선 깊이였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 계셨다.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라자로의 침묵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가장 낮고도 오래 남는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부름 이후에 남는 것들
루카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활동과 관상이라는 두 리듬을 드러낸다. 사순 5주일의 요한복음은 여기에 라자로를 더해, 죽음과 부활이라는 깊은 층위를 겹쳐 놓는다. 세 남매는 한 집에 머물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을 비춘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마을인 베다니아의 라자로였다."
- 요한복음 11.1 -
마르타가 세상을 향한 손이라면, 마리아는 주님을 향한 귀다. 그리고 라자로는 은총이 머무는 몸이다. 그의 병과 죽음은 두 자매의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보여준다. 분주한 봉사와 젖은 기도는 결국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 닿는다. 활동과 관상은 그 유한성을 감싸 안기 위한 몸짓으로 수렴된다.
세 남매의 집 베다니아는 ‘가난한 자의 집’, 혹은 ‘고통받는 자의 집’을 뜻한다. 이 이름은 선명하다. 나뉘어 있던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서로의 짐을 나누는 연대만이 남는다. 환대는 그때 비로소 형체를 얻는다.
라자로(Lazarus)는 히브리어 ‘엘아자르(Eleazar)’에서 왔다.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역설처럼 보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도 드러내지 않는다. 병들고, 죽고, 다시 불려 나올 뿐이다. 완전히 수동적인 자리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의미가 열린다. 인간의 의지와 주체가 멈추는 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도 도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르타의 손과 마리아의 귀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이름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선다.
이 사건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다. 하나의 징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따로 놓여 있지 않다. 이미 삶 속에 스며 있는 흔적이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 수의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음의 결을 몸에 지니고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스며든 채 공존한다.
이 경계는 낯설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그 사이에 선 존재는 흔들린다. 이전의 이야기에서 말한 ‘불편한 골짜기’나 ‘자동기계’의 개념처럼, 라자로는 익숙한 질서를 벗어난다. 그는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품은 채, 하나의 유령 같은 자취로 남는다.
그래서 그는 설명되지 않는다. 죽음을 지나온 사람은 그 너머를 말할 수 없다. ‘라자로 징후(Lazarus Sign)’나 ‘라자로 신드롬’이 가리키는 것도 그 침묵이다. 돌아왔으되, 완전히 돌아오지 못한 상태. 증언할 수 없는 경험이 그의 내부에 머문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와 여러 문학은 이 침묵을 길게 응시해 왔다. 라자로는 종종 삶의 온기를 잃은 채 서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 모습은 단순한 고독이 아니다. 체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잉여의 흔적이다. 그는 더 이상 역할로 환원되지 않는다. 봉사나 위안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다.
그는 오직 부름으로 존재한다.
막다른 자리에서 열리는 문
라자로의 이야기는 분명하다. 마르타의 분주함과 마리아의 고요함이 향하는 끝은 하나다.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만이 굳게 닫힌 돌문을 연다. 이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는 ‘경계의 아포리아(Aporia)와 그 너머의 환대’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갈등이 방식의 문제였다면, 라자로의 죽음은 존재가 멈춰 선 자리다. 예수는 그 막다른 곳에서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가장 낯선 타자를 삶 안으로 받아들인다.
라자로는 효율과 경청이 마주하는 마지막 경계다. 우리의 봉사와 기도가 죽음 앞에서 힘을 잃을 때, 한 문장이 울린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
이 부름은 닫힌 세계를 흔든다. 질 들뢰즈의 말처럼, 그의 생명은 수목적(arborescent) 질서를 거슬러 솟아오르는 리좀적 분출이다. 정해진 순서를 벗어나, 생명의 정의를 다시 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논리를 넘어 작용한다.
우리는 늘 선을 그어 이해하려 한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나와 너를 구분하며 안정을 얻는다. 일과 휴식, 삶과 죽음, 행동과 멈춤. 이런 구분은 세상을 정리해 주는 지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순간, 그 지도는 쓸모를 잃는다. 길이 끊긴다. 그 자리가 바로 아포리아(Aporia)다.
아포리아는 ‘길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단순한 난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논리가 충돌해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을 때 찾아오는 정지다. 철학은 이 상태를 거룩한 당혹으로 읽는다.
이 경계에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때가 그렇다. 사랑이라는 말과 분노라는 감정 사이에서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이래야 해”라는 생각과 “하지만 견딜 수 없다”는 현실이 맞부딪힌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멈춘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장면도 다르지 않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에서 두 길은 나뉘지 않는다. 밥을 짓는 손 안에도 듣고 싶은 마음이 있고, 발치에 앉은 귀에도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스민다. 어느 하나를 택해도 다른 하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겹침 속에서 불편이 생긴다. 마르타의 짜증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살 수 없는 데서 오는 균열이다. 그 감정은 묻는다. 왜 나는 이 둘을 함께 살아낼 수 없는가. 그 질문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다.
경계 위의 눈물, 침묵의 증언
요한복음에서 아포리아가 가장 깊어지는 순간은 라자로의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오래도록 나뉘어 있었다. 산 자는 이편에, 죽은 자는 저편에 머문다.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경계처럼 여겨졌다. 두 자매의 말이 그 한계를 드러낸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문장은 죽음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자리다. 예수는 이 막다른 길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우신다. 그 눈물로 경계 안에 머무신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말에는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마음이 과거로 물러난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현재를 잠시 밀어낸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차가운 현실을 붙들기보다, 가능했던 시간을 더듬는다. 마음은 과거에 머물고, 현실은 죽음으로 닫혀 있다. 길은 보이지 않는다.
후회는 과거를 향한 불안이다. “그때 내가 달랐더라면”이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묶는다. 자매의 말에는 원망과 함께 무력감이 깃들어 있다. 예수는 그 시선을 돌린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과거에 묶인 시선을 지금으로 불러낸다. 슬픔은 현재에서 다시 숨을 얻는다.
무덤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경계를 흔든다. 라자로는 수의를 두른 채 걸어 나온다. 그는 살아 있으나, 죽음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다. 삶과 죽음은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통과한다. 그는 그 사이를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막다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철학은 이 멈춤을 실패로 보지 않는다.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는 자리로 읽는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 다른 길이 열린다.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하며 살아간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기대어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그 틀이 흔들릴 때, 낯선 틈이 열린다. 타자가 들어오는 자리다. 마르타의 손과 마리아의 귀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피하지 않고 그 긴장을 견디는 일, 거기서 영성이 자란다. 정답이 아니라 응답이 길을 만든다.
삶은 경계를 지우지 않는다.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 흔들리며 이어지는 걸음, 그 자체가 길이 된다. 멈춤은 끝이 아니다. 더 깊이 바라보라는 요청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경계에 선다. 분주함과 공허함 사이를 오간다. 때로는 라자로처럼 아무 힘도 남지 않는다. 그때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나오너라”
그 부름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다. 지금 서 있는 자리의 의미를 바꾼다. 막다른 골목이 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제 남는 질문이 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멈춤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포리아는 길 없음이 아니다. 스스로 길이 되는 시간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 가장 낯선 점은 라자로의 침묵이다. 그는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설명도 남기지 않는다. 그가 경험한 것은 언어로 옮겨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를 지난 뒤, 삶의 말은 너무 좁아진다. 그의 침묵은 결핍이 아니다. 말이 닿지 못하는 자리 앞에서의 경외다. 라자로는 수의(壽衣)에 묶인 채 나온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묶임이 풀리지만, 기억은 남는다. 그는 살아 있으나 ‘죽었던 자’로 남는다. 이중의 시간 속에 놓인다. 삶과 죽음을 함께 지닌 채 걸어간다.
이 침묵은 오래 남았다. 문학은 그 침묵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왔다. 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Andreyev)의 「라자로」 (1906)에서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그의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삶의 바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이 침묵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다. 질서에 균열을 내는 현존이다.
침묵의 문턱에서, 벗겨지는 수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가정법이 우리를 과거의 수의에 묶어둔다면, 라자로의 침묵은 그 수의를 벗는 과정에서 겪는 통증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만약 그랬더라면”이라고 중얼거린다. 또 어떤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잠긴다. 예수의 부름은 그 자리를 흔든다.
“나오너라”
그리고 이어지는 명령.
“풀어주어 가게 하라”
이 두 문장은 후회의 매듭과 침묵의 감옥을 풀라는 요청처럼 들린다. 막다른 자리에서 길은 다르게 열린다. 과거의 ‘만약’에 머무르지 않고, 수의를 두른 채라도 밖으로 나오는 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을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 그 두 가지가 아포리아를 건너는 방식이다.
지금의 사회는 또 다른 수의를 입힌다.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압박, 접속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불안. 이 강박은 보이지 않는 끈처럼 우리를 묶는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말한 ‘투명성 사회(Transparency Society)’는 모든 것을 드러내라고 요구한다. 숨김은 의심받고, 침묵은 무능으로 읽힌다.
SNS의 ‘좋아요’와 실시간 반응은 우리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린다. 끊임없이 보여주고 설명해야 한다. 마르타가 동생을 향해 던졌던 질문처럼, 오늘의 세계는 묻는다. 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느냐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그 안에서 말은 가벼워진다. 빠르고 자극적인 정보만 오간다. 관계는 얕아지고, 의미는 마른다. 우리는 가장 많이 연결되지만, 가장 깊이 고립된다. 이것이 소통 강박이 만든 또 하나의 아포리아다.
자매가 과거의 가정법에 묶여 있었다면, 우리는 디지털 신호에 얽매여 있다. 즉각 응답하지 않으면 관계가 끊길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라자로의 침묵은 다른 결을 드러낸다. 그것은 단순한 무응답이 아니다. 강박을 거부하는 태도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고 싶어 했을 것이다.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세계를 지나왔는지.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는다. 그 침묵은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다. 해석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권력은 이 사건을 붙잡고 싶어 했다(요한 12,10). 그러나 말하지 않는 존재는 붙들리지 않는다. 그의 침묵은 규정되지 않는 잉여로 남는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불편해진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자리를 찾아야 한다. 분주한 생산과 수동적 수용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영역을 남겨두는 일.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태도. 진정한 소통은 말의 양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침묵에서 시작된다. 소통 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나를 완전히 이해시키겠다는 욕망을 내려놓는 일이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는 소란을 가라앉히고, 침묵을 통과한 눈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깊이는 말로 드러나지 않는다.
최근 큰 이슈가 되었던,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 작가의 ‘ABC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정리한다. A, B, C라는 구분은 분명하고 편리하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또 다른 위험을 품는다.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다. 이 분류는 소통의 능력과 가치의 명료함을 기준으로 삼는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만이 중심에 선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주변으로 밀린다. 그 구조 안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말하고 드러내야 한다.
이때 침묵은 쉽게 오해된다. 머무름은 무능으로, 기다림은 회피로 읽힌다. 마르타의 분주함만이 옳은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판단은 폭력일 수 있다. 말하지 않는 자리에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견딜 것인가.
원과 강 사이, 길 없는 자리의 정치
철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정치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술이 아니다. 나와 다른 존재 앞에서 길을 잃는 순간, 그 아포리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유 작가의 ABC는 ‘우리’라는 선을 또렷이 긋는다. 그러나 길이 끊긴 자리에서 길을 찾는 고통은 그 안에 없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가져온 침묵, 어떤 수사로도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깊이는 이 간결한 도식에 담기지 않는다.
정치는 분류의 일이 아니다. 분류되지 않는 존재의 고통을 듣는 일이다. 확신에 찬 외침보다, 길을 잃은 침묵 속에서 더 뜨거운 맥박이 뛸 때가 있다. 그 떨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숨결에 가깝다.
요즘은 정치 비평에서 멀어져 있다. 아니, 뉴스 자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말들은 스쳐 간다. 귀에 남고, 눈에 걸린다. 단편적이고 거칠다. 그래서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어느 정치 유튜브에서 시작된 갈등은 오래 남는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그 안에 있다.
최근 논란들은 단순한 말실수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자본이 기울고, 확증 편향이 하나의 산업이 되는 과정이 드러난다. 여기에 세대의 기득권이 얹힌다. 상징 자본을 지닌 지식인이 디지털 공간을 통해 팬덤을 조직하고, 영향력을 연장하려는 구조. 이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물리적 힘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판받지 않는 담론도 같은 길을 걷는다. ABC 벤 다이어그램은 그 한 단면이다. 선명한 구분은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그 선 위에 서 있는 우리는 얼마나 불안한가. 대부분의 삶은 경계 위에서 흔들린다.
정치 비평가, 아니 분류학자는 원을 그린다. A는 가치, B는 이익. 그 사이에 C라는 회색 지대가 놓인다. 단정한 도식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얇은 교집합에 더 가깝다. A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은 쉽게 우월로 기운다. 그 원은 깔끔하다. 그러나 그 선은 낡은 도구로 그어진 흔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묻고 싶다. 그 원은 누가 그렸는가. 자로 잰 것인가. 컴퍼스로 돌린 것인가. 아니면 오래된 확신이 여전히 세계를 나누고 있는가. 광장에서 타오르던 촛불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그 바람 속에서 버티던 불꽃이 특정한 이름으로만 불릴 수 있는가.
역사는 종종 늦게 답한다. 공동의 강에서 길어 올린 물을 자신의 우물이라 부르는 순간, 이미 균열은 시작된다. 함께 밀어 올린 문을 혼자 열었다고 믿는 기억. 그것이 선민(選民)의 문법이다.
“나는 가치를 위해 왔고, 너는 이익을 위해 왔다.” 이 문장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의 냄새를 남긴다. 한 평론가는 말한다. 더하는 일은 어렵지만 넉넉하고, 나누는 일은 쉽지만 끝내 황폐해진다고. 그 문장은 더 넓은 원을 그린다. 경계를 넘는 원이다.
오래된 투사여, 그 서사는 한때 빛났다. 그러나 서사가 타인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권력의 언어다.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말하던 사람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를 병자라 부를 때, 그 순간 신앙은 닫힌 언어로 변한다. 분류는 지식이 아니다. 때로는 배제의 다른 이름이다.
A와 B 사이에서 흔들리는 C의 자리, 그곳은 교집합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선 위에 선 존재다. 얇고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서로를 붙든다. 순수한 가치만으로 살아온 존재는 드물다. 그 드문 존재를 우리는 인간이라 부르기보다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원은 닫힌다. 그것이 원의 운명이다. 그러나 강은 흐른다.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을 가르지 않는다. 먼저 온 물을 묻지 않는다. 모두를 데리고 바다로 간다.
그래서 나는 원을 믿지 않는다. 나는 강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