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 유다를 위한 변호

사순 성주간 묵상, 신의 침묵 앞에 선 인간

by 박 스테파노

기름 짜는 밤, 침묵으로 건너가는 의지


기독교 전례력에서 부활절을 앞둔 일주일을 성주간(Holy Week, 聖週間)이라 부른다. 개신교나 일부 교단에서는 ‘수난 주간’, ‘고난 주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수가 빠스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성지 주일부터,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고 모든 전례가 멈추는 성토요일까지. 교회는 이 짧은 시간 안에 수난과 죽음을 깊이 응시한다. 크리스마스보다도 복음의 핵심에 가까운, 가장 밀도 높은 한 주.


이 시기에는 말씀이 급하게 흐른다. 사건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환호와 배반이 거의 같은 숨으로 이어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하던 군중은 곧 다른 얼굴로 돌아선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은 군중만이 아니다. 끝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한 제자들조차 그를 외면한다. 그 균열의 중심에 가리옷 사람 유다가 서 있다.


성주간의 시작, 성지주일(Palm Sunday). 가톨릭 굿뉴스 제공


성지주일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에서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수난기를 따라간다. 그 사이 빠스카 만찬에서 예수는 자신을 팔 사람이 제자들 가운데 있음을 밝힌다. 이미 은화 서른 닢에 거래를 마친 유다는, 스스로를 부정하듯 묻는다.


"스승님 저는 저는 아니겠지요?"
- 마태오 복음 26. 25


겟세마니(Gethsemane)는 히브리어로 ‘기름 짜는 틀’(Oil Press)을 뜻한다. 올리브를 눌러 기름을 내듯, 이 밤은 한 존재의 내면을 끝까지 압박한다. 예수의 피와 땀이 스며든 자리에서, 복음은 가장 낮은 곳에서 길어 올려진다.


올리브 산 아래 드리운 어둠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다. 공기가 눌린 듯 무겁다. 예수는 제자들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느낀다.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에는 고독이 배어 있다. 인류 구원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도 그는 한 사람의 몸으로 서 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이 말은 신성의 언어라기보다, 소멸 앞에 선 생명의 떨림에 가깝다. 예수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땅에 엎드린 기도는 하늘을 향한 호소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한 응시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껴가게 해주십시오."


땀이 핏방울처럼 맺혀 떨어진다. 신의 뜻과 인간의 본능이 맞부딪히며 생긴 흔적이다. 전능함의 외피가 벗겨진 자리에서, 그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잠시 뒤 돌아온 곳에서 제자들은 잠들어 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육체의 피로 앞에서 무너진다.


예수는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 같은 기도를 되풀이한다. 세 번의 간구와 세 번의 침묵 끝에, 그의 의지는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제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비껴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결로 정리된다. 거부하던 마음이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운다. 그 변화는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다.


멀리서 횃불의 빛이 흔들린다. 유다가 이끄는 무리가 다가온다. 예수는 제자들을 깨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미 시작된 일이다. 그가 품은 침묵은 쇠사슬보다 단단하다. 흔들리던 몸은 이제 멈추어 선다. 스스로 내어주는 자의 결연함이, 새벽 공기를 가른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 겟세마니의 기도. 20세기 폭스 제공



은화와 입맞춤 사이, 유다의 밤


성주간이 다가오면 록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 (Andrew Lloyd Webber, 1971)가 떠오른다. 성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록 오페라로 풀어낸 작품이다. 전통적 종교극의 틀을 벗어나, 예수와 유다, 마리아를 신격이 아닌 인간으로 그린다. 고뇌와 갈등을 지닌 존재들. 그 위에 당대의 히피 문화와 저항의 기류가 스며 있다.


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서 시작해 십자가형에 이르기까지를 따라간다. 군중의 열기는 점차 과열되고, 숭배는 광기에 가까워진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 흐름이 로마를 자극해 공동체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예수는 멈추지 않는다. 예정된 길을 향해 걸어간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친 그를 위로하려 한다. 유다는 끝내 예수를 넘긴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선택. 그러나 그 선택이 신의 계획에 편입된 순간, 그는 무너진다. 스스로 생을 끊는다. 예수는 빌라도와 헤롯 왕의 재판을 지나 십자가에 이른다. 극은 부활 없이 그 죽음에서 멈춘다.


이 작품에서 유다는 주변 인물이 아니다.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시선이다. 사건을 끌고 가는 화자이자 관찰자. 이 설정은 초점을 바꾼다.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으로.


오프닝 곡 「Heaven on Their Minds」는 그 시선의 출발이다. 유다는 예수를 향한 열광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가득한 천국(Heaven on their minds)”이라 부른다. 실체 없는 기대. 그는 메시아라는 이름이 현실의 위협을 가리고 있다고 본다. 그 말에는 비판만이 아니라 애정이 스며 있다. 충심이 점차 불안으로 변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작품의 절정은 「Gethsemane」에 있다. 죽음을 앞둔 예수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신에게 던지는 질문. 형이상학적 고통. 반면 유다는 철저히 현실에 서 있다. 정치와 사회의 언어로 예수를 바라본다. 그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래서 실패를 원하지 않는다. 신화가 되어버린 예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을 붙잡으려 한다. 이 긴장은 관객의 시선을 이동시킨다. 경외보다 의심 쪽으로.


https://youtu.be/wKjk1c8z_zc?si=T7j7hOVJJq7jPmUB

스티브 발사모의 <겟세마네>. Youtube



후반부의 「Superstar」는 이 역설을 밀어 올린다. 죽음 이후 나타난 유다는 묻는다. 왜 그 시대였는지, 왜 그 자리였는지. 자신의 선택이 자유였는지. 아니면 부여된 역할이었는지. 이 질문은 거대한 섭리 아래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운명을 드러낸다. 배반은 단순한 악이 아니다. 한 인간이 감당해야 했던 구조적 고립의 표식처럼 읽힌다. 결국 이 작품은 예수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고독을 드러낸다. 종교 서사는 인간의 비극으로 다시 쓰인다.


은화 서른 닢은 가볍다. 그러나 그 안에 깃든 무게는 다르다. 손안에 쥔 순간, 그것은 존재를 짓누른다. 올리브 산의 어둠 속에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의 끝을 기다린다. 게세마니의 공기는 잠잠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곧 무너질 것처럼 팽팽하다.


그는 무너져 있다. 군중 앞에서 기적을 행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땅에 엎드린 채 울부짖는 한 사람. 공포에 잠식된 몸. 그 장면 앞에서 나는 흔들린다. 만약 그가 신의 아들이라면, 왜 저렇게 기도하는가. 이 무력함이야말로 내가 그를 밀어 넣어야 할 이유처럼 보인다. 그는 지금 한계에 닿아 있다. 그 경계에서 나는 기다린다. 숨겨진 힘이 드러나기를.


기도는 이어진다. 세 번. 그 사이 제자들은 잠든다. 피로 앞에서 무너진 몸들. 그들의 잠은 이 거대한 이야기의 틈처럼 느껴진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 떠난 자리에서 그는 홀로 남는다. 그 고독을 바라보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 하나다. 어둠 속에서 핏방울 같은 땀이 떨어진다.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이제 끝이다. 그는 몸을 일으킨다. 잠든 이들을 깨운다.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다. 두려움은 자리를 비운 듯하다. 대신 고요가 남아 있다. 나는 은전을 움켜쥔다. 그리고 걸어간다. 나의 입맞춤은 배반의 표식이면서, 동시에 어떤 완성을 향한 밀어붙임이다. 숲 너머로 횃불이 번진다.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시작된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유다의 입맞춤. <Jesus Crist Superstar> 유니버셜스튜디오


침묵의 벽 앞에서, 유다의 믿음


엔도 슈샤쿠는 『예수의 생애』 (1973)에서 가리옷 사람 유다의 배반을 단순한 탐욕이나 악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유다를 정치적 해방을 갈망하던 지식인이자, 예수에게 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열정적 추종자로 그린다. 그의 비극은 ‘강한 메시아’를 기대한 신념과, 예수가 보여준 ‘무력한 사랑’ 사이의 간극에서 시작된다.


유다는 기적과 권능으로 로마의 압제에 맞서는 인물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는 낮은 자리로 향했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고난과 죽음을 말한다. 이 어긋남 속에서 유다의 선택이 생겨난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끝까지 밀어붙이는 시도에 가깝다. 예수를 궁지로 몰아넣어 감춰진 능력을 드러내게 하려는 마지막 결단.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뒤틀린 확신.


그러나 체포의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항도, 기적도 없다. 그 침묵 앞에서 유다의 계산은 무너진다. 그는 자신이 세운 논리가 신의 깊이를 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절망은 그 깨달음의 다른 이름처럼 밀려온다. 엔도는 이 장면에서, 신의 침묵 앞에 선 현대인의 고독을 포착한다. 동시에, 그 고독을 외면하지 않는 예수의 시선을 드러낸다. 버리지 않는 눈빛. 함께 견디는 사랑.


첫 번째 배교와 고해. 영화 <사일런스> 파라마운트 제공


엔도 슈샤쿠의 문학에서 유다와 『침묵』 (1966)의 기치지로는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 배반자. 그러나 그 결은 다르다. 『예수의 생애』의 유다가 신념의 붕괴 속에서 무너지는 ‘강자의 실패’를 보여준다면, 『침묵』의 기치지로는 생존 본능 앞에서 흔들리는 ‘약자의 비겁함’을 드러낸다.


유다의 선택이 일종의 도박이었다면, 기치지로의 행동은 순간의 공포에서 비롯된다. 성화를 밟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육체의 떨림. 그러나 엔도는 이 둘을 단죄하지 않는다. 그들이 떨어진 자리, 자책과 수치의 밑바닥을 응시한다. 유다가 마주한 침묵의 고통과, 기치지로가 토해내는 비굴한 고백은 서로 닿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신의 침묵 앞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바로 그 틈에서 자비가 스며든다.


예수는 유다를 밀고자로만 대하지 않는다. 그의 고독을 함께 짊어진다. 기치지로의 반복되는 배신 속에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 배설물처럼 되풀이되는 실패 속에서도 동행을 멈추지 않는다. 이 관계는 심판이 아니라 동반에 가깝다.


결국 유다의 배반과 기치지로의 비겁함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 결핍을 감싸는 사랑을 드러낸다. 힘으로 증명되지 않는 사랑. 오히려 무력함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사랑.


엔도에게 유다는 악의 표상이 아니다. 신의 침묵 앞에서 좌절하는 현대적 지성인의 얼굴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그의 고뇌는 ‘강한 신’을 향한 인간의 요구와, ‘약한 신’으로 나타난 예수 사이의 어긋남에서 자란다. 유다는 초월을 현실의 성취로 바꾸려 한다. 그러나 예수는 끝내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배반은 파괴가 아니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시도로 남는다. 십자가라는 막다른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집요한 기대.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다. 그 순간, 인간의 이성은 한계를 드러낸다. 신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가 부딪히는 벽.


이 ‘지적 배반’은 『침묵』의 기치지로가 보여준 ‘육체적 배반’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결국 같은 자리로 수렴된다. 자비가 필요한 자리. 유다의 확신이 무너진 자리와, 기치지로의 눈물이 고인 자리는 다르지 않다.


다시 배교하는 기치지로 그리고 고해. 영화 <사일런스> 파라마운트 제공


엔도는 예수가 유다의 선택을 알고도 그를 공동체에 남겨두었다고 말한다. 그가 감당해야 할 고독을 함께 지기 위해서. 유다가 스스로 생을 끊는 그 심연 속에서도, 예수의 시선은 정죄가 아니다. 슬픔을 나누는 눈빛이다.


유다의 비극은 배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이후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끝내 믿지 못한 데 있다. 그는 스스로를 단죄하며 닫힌다. 그 폐쇄된 내면이 마지막 문턱이 된다.


엔도는 유다를 통해 말한다. 인간이 신을 배반하는 순간에도, 신은 인간을 배반하지 않는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함께 내려간다. 유다의 실패는 악의 결과가 아니라, 자비가 더 깊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그림자다.



거울과 균열, 유다라는 이름


수난 복음 안에서 ‘유다’는 단순한 배신자의 도식을 넘는다. 그는 인간의 모순과 신적 섭리의 균열을 드러내는 기표로 작동한다. 서구 문학과 문화 속에서 이 인물은 끊임없이 다시 쓰인다. 시대마다 다른 질문을 품은 채, 상징의 자리를 옮겨 다닌다.


가장 오래된 층위에서 유다는 ‘위장된 친밀함’과 ‘물질적 욕망’을 드러낸다. 사랑의 몸짓인 입맞춤이 살해의 신호로 바뀌는 순간, 언어와 행위의 신뢰는 붕괴된다. 이 장면은 가치가 교환의 논리로 환산되는 최초의 서사적 장면 중 하나로 남는다. 이후 자본의 욕망이나 영혼의 거래를 가리키는 은유로 굳어진다.


현대에 이르면 해석의 결이 달라진다. 유다는 구원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기능적 희생양’으로 읽힌다. 예수가 죽어야 했다면, 누군가는 그를 넘겨야 한다. 이 단순한 전제는 곧 난해한 질문으로 바뀐다. 필연적 악은 가능한가. 유다는 신의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저주받은 역할을 떠안은 인물로 떠오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유다에 관한 세 가지 해석」 (1944)에서 이 도식을 전복한다. 그는 유다가 인류 구원을 위해 명예와 영혼까지 내어준 ‘진정한 메시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가설은 의미의 방향을 뒤집는다. 유다는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드러내는, 고독의 측정치가 된다.


엔도 슈샤쿠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에서 유다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예수를 이해하려 했던 지식인, 혹은 혁명가로 그려진다.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한다.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에 머무는 존재.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스승을 바라보지만, 본질 앞에서 멈춘다. 이 간극은 현대인이 겪는 타자와의 불가능한 소통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시선에서는 유다가 체제의 결함으로 읽힌다. 평온한 공동체에 ‘배반’이라는 오류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는 비로소 도약한다. 십자가라는 극단은 그 균열에서 열린다. 완결된 질서를 깨뜨리고, 날것의 고통을 드러내는 장치. 유다는 서사를 밀어 올리는 내부의 파열이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유다를 노란색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탈리아 파도바의 한 예배당 벽에 조토가 그린 이 벽화(1304-1306년)가 그 예다. (출처:위키미디어)


이 인물은 또한 거울이다. 독자와 관객은 묻게 된다. 나는 유다가 아닌가. 연약함, 계산, 그리고 뒤늦은 후회가 그의 얼굴에 비친다. 그의 붕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감각의 형식으로 번진다. 불협화음의 소리, 파편화된 이미지. 엔도 슈샤쿠가 말한 ‘동반자적 예수’와 ‘고독한 유다’의 긴장은 다른 예술에서 더 날카로운 형태로 드러난다.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에서 유다의 목소리는 성가가 아니라 록으로 울린다. 「Heaven on Their Minds」와 「Judas's Death」의 거친 고음은 불안의 결을 드러낸다. 자신의 논리로 신을 규정하려다 실패한 지성의 떨림. 조화로운 선율을 깨는 불협화음. 예수의 넘버가 일정한 흐름을 지닌다면, 유다의 음악은 급격히 흔들린다. 당김과 전환이 이어진다. 확신에서 의심으로, 다시 자책으로 이동하는 내면의 리듬이 그 안에 있다.


미술과 영상에서도 그는 경계에 선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다에게 입혀진 노란색은 변절과 시기의 색이다. ‘부정(不淨)’의 표식. 그러나 다른 시선에서 이 색은 집단 속에서 튀어 오르는 불편함의 시각화다. 함께 있으나 섞이지 못하는 존재. 화면 안에서 그는 늘 어긋난다.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노먼 주이슨, 1973)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마틴 스코세이지, 1988)에서 그의 얼굴은 자주 반쯤 어둠에 잠긴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놓인 형상. 신의 계획을 알면서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또 하나의 장치는 거울이다. 유다는 예수의 반사면처럼 놓인다. 예수가 신의 뜻을 몸으로 드러낸 존재라면, 유다는 그 뜻을 이성으로 번역하려다 어긋난 존재다. 오역의 자리. 최후의 만찬을 그린 수많은 회화에서 그는 식탁의 반대편에 놓이거나, 빛을 등진 위치에 앉는다. 이 비대칭은 자율이 낳은 비극을 선명하게 만든다. 뮤지컬에서 죽은 뒤 「Superstar」를 부르며 조명 아래 서는 장면 또한 같다. 그것은 보상이 아니라, 끝내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의 확인이다.


엔도 슈샤쿠의 문학이 유다를 ‘버려진 자’가 아닌, 슬픈 눈의 예수와 함께 걷는 존재로 끌어올렸다면, 현대 예술은 그의 파멸을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 고통은 때로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 유다는 우리 안의 연약함과 오만을 비추는 화면이다. 그 위에 맺힌 흔적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이 다시 드러난다.



저주받은 사도, 유다를 위한 기도


성서의 서사가 인류 구원을 향한 설계도라면, 가리옷 사람 유다는 그 도면 위에서 가장 가혹한 자리를 맡은 인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를 ‘배신’이라는 낱말 속에 가두어 왔다. 그러나 수난 복음의 구조를 따라가 보면, 그는 단순한 가해자에 머물지 않는다. 부활이라는 결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작동해야 했던 ‘필연적 악’의 수행자에 가깝다. 그의 행위는 타락의 결과라기보다, 신의 섭리가 역사 안에 스며들기 위해 요청한 잔혹한 조력의 한 형태로 읽힌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때가 왔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이 ‘때’는 우연이 아니라 오래 준비된 시간이다. 그 흐름을 움직이는 결정적 순간에 유다가 놓인다. 그의 밀고가 없었다면, 이야기는 다른 결로 흘렀을지 모른다. 십자가라는 형식, 그 극단의 장면은 내부의 균열과 권력으로의 인계를 통해 완성된다. 유다는 이 장치를 멈추지 않게 하는 어두운 부품을 맡는다. 가장 더럽혀진 자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그는 각본 속에서 가장 무거운 역할을 감당하며, 예수를 죽음이라는 완성으로 밀어 넣는다.


헤겔적 변증법으로 보면, 그의 악은 선을 드러내기(正) 위한 반(反)의 자리다. 부활이라는 합(合)에 이르기 위해, 죽음이라는 붕괴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유다는 파괴의 도구가 된다. 엔도 슈샤쿠가 보여주었듯, 예수가 십자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를 세상의 법 앞에 세울 타자가 필요하다. 유다의 선택은 신성을 드러내는 불편한 촉매다. 은전 서른 닢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구원의 서사는 비로소 현실의 무게를 얻는다. 그 부재 속에서는 이야기가 신화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남는다.


그러나 그의 비극은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이 감당한 행위의 의미를 끝내 알지 못한 채 무너졌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를 몰아붙여 권능을 드러내려 했다. 그 시도는 지적 오만에 가까웠다. 그 대가로 그는 ‘신의 침묵’을 마주한다. 겟세마니의 밤, 그는 어둠 속에서 갈라진 마음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기도가 거절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체포의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때 그는 직감한다. 자신이 도구로 소모되었음을.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그의 죽음은 후회의 결과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침묵 앞에서 터져 나온 실존의 비명에 가깝다. 어쩌면 그는 인류의 부활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내어준 역설적 순교자에 더 가깝다.


우리가 그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낯선 존재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계산과 타협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 유다는 신을 사랑했으나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려 했다. 믿었으나 자신의 논리 안에서 믿으려 했다. 이 한계는 그를 예수와 더 가깝게 묶는다. 엔도 슈샤쿠의 시선에 기대면, 예수는 그의 배반을 통해 인간의 가장 깊은 고독에 닿는다. 십자가 위에서의 버림받음과, 나무에 매달린 유다의 고립은 서로를 향해 울린다. 그는 배반을 통해 가장 깊은 자리까지 개입한 동반자가 된다. 그의 행위는 자비가 도달해야 할 가장 낮은 지점을 드러낸다.


Judas Iscariot is created by Sascha Schneider in 1908. It lives at the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배신자 유다’라는 이름은 부활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다른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부활의 신비를 완성한 필연적 악의 조력자. 그는 자신의 이름이 오래 저주로 남을 것을 알지 못한 채, 입맞춤의 신호를 보낸다. 그 순간 이후, 이야기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의 선택이 없었다면 십자가도, 그 뒤의 빈 무덤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유다는 구원의 빛 뒤에 드리운 가장 짙은 그림자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깊어진다. 예수의 부활이 찬란할수록, 그의 절망은 더 어두워진다. 그를 변호하는 일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일과 닿아 있다. 동시에 그 불완전함마저 구원의 재료로 삼는 신비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는 저주받은 사도가 아니라, 가장 무거운 명령을 수행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슬픈 조력자에 가깝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스승을 바라보지만, 끝내 그 중심에 닿지 못한다. 그 미세한 어긋남이 유다를 고립시킨다. 이해하려는 시도는 깊어질수록 더 멀어진다. 이 닿지 못함의 간극 속에서, 그는 현대인이 겪는 타자와의 단절을 먼저 살아낸다. 말은 오가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 자리. 유다는 그 불가능한 소통의 형상을 몸으로 드러낸다.


다른 시선에서 보면, 그는 체제 안에 놓인 하나의 균열이다. 그러나 그 균열은 파괴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흐름을 바꾸는 힘이 된다. 평온하게 유지되던 공동체에 ‘배반’이라는 오류가 스며드는 순간,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 십자가는 그 틈에서 시작된다. 안전하게 닫혀 있던 서사는 깨지고, 현실의 고통이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결국 유다는 무너뜨린 자가 아니라, 열어젖힌 자에 가깝다. 그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는 경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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