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묵상: 어둠을 지키는 밤, 건너가는 빛의 이름
가톨릭 전례에는 한 해에 두 번, 깊은 밤을 가로지르는 미사가 있다. 한밤의 중심, 자정에 봉헌되는 이 미사는 ‘성탄 전야(前夜) 미사’와 ‘부활 파스카 성야(聖夜)’로 이어진다. 탄생과 부활, 신앙의 가장 은밀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은 늘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교회는 이 밤을 지키는 일을 하나의 의식으로 간직해왔다. 잠들지 않음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기다림을 향한 의지의 형식이다.
부활 성야 미사는 해가 진 뒤에 시작해 동이 트기 전 마무리된다. ‘어둠(죽음)을 이긴 빛(부활)’이라는 상징이 이 시간 안에서 또렷해진다. 밤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건너야 할 경계로 서 있다. 이 전례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그 너머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어둠을 통과하는 동안, 빛은 이미 도착해 있다.
이 미사를 흔히 Easter Vigil이라 부르지만, 교회의 오래된 언어는 이를 파스카(Pascha), 또는 비질리아 파스칼리스(Vigilia Paschalis)라 부른다. 여기에는 두 개의 단어가 겹쳐 있다. Vigil과 Pascha. 밤을 지키는 행위와, 그 밤을 건너는 사건.
비질(vigil)은 ‘깨어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vigilia(그리스어: pannychis, παννυχις 또는 agrypnia ἀγρυπνια)에서 왔다. 의도된 불면의 시간, 마음을 열어두는 경건한 주시. 이탈리아어 vigilia가 ‘이브’(eve, 전야)를 의미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을 앞둔 마지막 밤, 파수꾼이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디데이를 기다리듯, 이 시간은 도래를 준비하는 긴장으로 채워진다. 자정 미사는 그래서 ‘깨어나 불을 밝혀 지킨다’라는 내면의 봉헌에 가깝다.
한편 가톨릭 교회가 이 밤을 ‘파스카(Pascha)’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한 전통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이름이다. 히브리어 ‘페사흐(Pesach)’에서 비롯된 이 말은 ‘건너가다(Passover)’를 뜻한다. 유월(逾越), 과월(過越). 어떤 경계를 지나 새로운 상태로 이행하는 움직임.
구약에서 이 사건은 이집트 탈출로 드러난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는 밤,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갔던’ 순간이 그 기원이다. 문지방에 바른 피의 표식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가 되었고, 그 밤은 ‘지나감’으로써 ‘건너감’을 얻은 기억으로 남는다. 누룩없는 빵과 신포도주가 그 시간을 붙들어둔다.
신약에서 이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의 종살이에서 하느님 자녀의 자유로 ‘건너간’ 존재로 기억된다. 구약에서 이어진 전례의 시간 위에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겹쳐지고, 그 밤은 새로운 파스카로 열리게 된다. 이제 이 사건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미사를 통해 우리는 그 건넘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이동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밤을 두고 “모든 성야 미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어둠을 지키는 일이 곧 빛을 맞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앎은 여전히, 한밤의 침묵 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빛을 나르는 손, 밤을 지키던 시간
국민학교 4학년, 첫영성체를 마치자마자 복사단에 들어갔다. 형이 걸어가던 길을 그대로 밟은 선택이었지만, 그 궤적을 조금은 벗어나 보려는 마음도 함께 있었다. 한 달 동안 매일미사, 그중에서도 새벽미사에 빠짐없이 참여했고 주요 기도문을 외웠다. 입단 심사를 통과한 뒤, 사제 곁에서 전례를 보필하는 일을 고2까지 이어갔다. 엄격했던 노신부님과 열정적인 보좌신부, 그리고 늘 곁을 지키던 수녀님이 그 시간을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그 시절, ‘부활 파스카 성야 미사’는 한 해의 중심에 놓인 의식이었다. 사순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부터 ‘십자가의 전례’를 준비했고, 성주간으로 들어서면 긴장이 더 깊어졌다. 성지주일을 지나 성목요일 세족례와 최후의 성찬, 성금요일의 십자가와 무덤 성체 조배까지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몸과 마음은 자연스레 그 밤을 향해 모였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후배들을 챙기고 지도하며 준비를 도왔다.
향을 들고 행렬의 맨 앞에 서는 일은 오래도록 내 몫이었다. 고3이 된 뒤에도 그 역할은 오직 부활 성야 미사에서만 맡았다. 그만큼 그 밤은 각별했다. 일상의 미사가 ‘성찬의 전례’를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 미사는 말씀과 그 앞뒤의 예식이 더 깊게 남았다. 어둠에서 시작해 빛으로 나아가는 흐름, 그 또렷한 대비가 마음을 흔들었다. 전례는 네 부분으로 이어졌고, 각 장면은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맞물렸다.
제1부는 빛의 예식 (Lucernarium). 모든 것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다. 사순 동안 절제되던 음악은 멎고, 종소리도 사라진다. 성당은 어둠 속에 잠긴다.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간. 그 고요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건너가기 위한 준비였다.
미사가 시작되면 성당 밖에서 새 불을 축복한다. 부활초에 ‘A(알파)’와 ‘Ω(오메가)’, 그리고 그해의 연도를 새긴다.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시작이요 끝이요...”라는 선포가 울린다. 그 불에서 향로가 피어나고, 행렬이 움직인다. 성당 문 앞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 외쳐지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응답한다. 부활초에서 옮겨 붙은 작은 불빛들이 신자들의 손으로 건너간다. 성당 중간과 제대 앞에서 다시 이어지는 빛의 전파. 어둠은 물러나고, 빛은 조용히 번져간다.
이어서 부활 찬송(Exsultet)이 울린다. 보통 가장 최근에 서품된 부제나 사제가 맡는다. “용약하여라”로 시작되는 노래가 성당을 채운다. 부활초 앞에서 선포되는 기쁨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그 밤의 의미를 드러내는 언어가 된다.
용약하여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여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영원한 임금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라
세상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 <부활 찬송> 중에서 -
‘용약하여라(Exsultet)’는 부활 성야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찬송의 첫 구절이자 이름이다. 라틴어 ‘Exsultet(기뻐 날뛰다, 환호하다)’에서 온 이 말은, 부활의 기쁨을 하늘과 땅이 함께 외치라는 초대다. 특히 “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죄를 없애셨네.”라는 대목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가장 또렷하게 전한다.
예행 연습에서 이 찬송을 수없이 들었다. 언젠가 그 자리에 서서 직접 부를 날을 그려보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서툴지만 맑았던 신앙의 한 계절이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용약하라’라는 낯선 단어가 다시 살아난다. 잊힌 언어 하나가, 오래된 마음을 다시 밝힌다.
https://youtu.be/f2hAa-vqD08?si=_AOnwd8lwzPzh2Ck
말씀의 밤, 건너가는 기억의 지도
제2부는 말씀 전례 (Liturgy of the Word)다. 이 밤의 전례는 다른 시기와 달리 여덟 개의 독서와 한 편의 복음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이 인류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 그 긴 시간을 되짚는 자리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탈출기의 바다를 지나, 신약의 서간과 복음에 이르기까지. 일곱 개의 구약 독서가 끝나면 대영광송(Gloria)이 울리고, 멈추어 있던 오르간과 종이 일제히 깨어난다. 어둠을 지키던 공간에 빛이 들어오고, 사순 동안 침묵하던 ‘알렐루야(찬양하라)’가 다시 입술 위에 오른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빛을 부르고, 세계를 열었다. 이 밤의 전례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창조와 동행의 역사를 지금의 자리로 불러온다. 부활은 하나의 신비로 닫히지 않는다. 그것은 길게 이어진 시간의 회상이며, 다시 살아내야 할 현재다. 그래서 이 말씀들은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시 헤아리게 만든다.
• 제1독서 — 보시니 좋았다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느님은 말씀하셨고, 말씀은 형상이 되었다. 그 모든 것 앞에서 하느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았다. 그것은 평가가 아니라 존재를 세우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좋음에서 멀어졌다. 시간은 흔적을 남기고, 죄는 켜켜이 쌓인다. 두꺼워진 과거 아래에도 처음의 결은 남아 있다. 죄 없이 울던 아기의 숨결, 하느님이 좋다 하셨던 바로 그 결. 부활은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깊이 눌려 있던 선함이 다시 올라오는 순간. 지층을 밀어 올리듯, 잊힌 빛이 다시 드러난다. 다시 일어남, 그것이 부활의 첫 언어다.
• 제2독서 — 예, 여기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1절)
아브라함은 칼을 들었다. 사랑하는 아들 위에 올려진 손이 흔들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의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심을 안고도 나아갔기 때문이다. 야훼 이레.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이 고백은 일이 끝난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믿음은 결과를 알고 시작되지 않는다. 모르는 채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는 데서 시작된다.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는 말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산으로 건너가야 비로소 알게 된다. 건너감 없는 준비는 없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 첫 발걸음이었다.
• 제3독서 —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탈출기 14장 15절)
뒤에는 군대, 앞에는 바다. 이 막힌 구조를 우리는 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비로소 무릎이 꺾인다. 그제야 이름을 부른다. 하느님은 나무라지 않으신다. 다만 물으신다.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이 물음은 꾸짖음이 아니라 비추는 거울이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이 너를 밀어붙이는가. 그리고 바다가 열린다. 기적은 완전한 자에게만 주어지지 않는다. 늦게 부른 이에게도, 두려움 속에서 외친 이에게도 허락된다. 탈출은 과거의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 안에도 파라오는 남아 있다. 건너감은 그 내면을 뒤에 두고 나아가는 일이다.
• 제4독서 —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4장 10절)
산이 물러가고 언덕이 흔들려도. 이사야는 노아의 시간을 불러낸다. 한 번의 파기, 그리고 다시 세운 약속. 무지개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약속은 소유가 아니다.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평화는 무기가 된다. 한 백성에게 주어진 말은 모든 이를 향한 길이어야 했다. 지금도 그 땅에서는 피가 흐른다. 이름을 앞세운 폭력 앞에서. 하느님의 평화는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쥔 인간의 손이 흔들릴 뿐이다.
• 제5독서 — 내 생각은 너희 생각 같지 않고 (이사야 55장 8절)
하늘과 땅의 간격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잊은 채 하늘의 이름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성전과 순교, 심판의 이름으로 죽음을 정당화하는 순간, 길은 이미 어긋난다. 이사야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의 길은 살리는 길이다. 목마른 이를 물가로 부르고, 값없이 오라 하신다. 폭력은 늘 자신을 정의라 믿는다. 그 확신이 클수록 하늘에서 멀어진다. 이 말씀은 우리를 낮추는 부름이다. 우리는 끝내 다 알지 못한다.
• 제6독서 — 별들은 때맞추어 빛을 내며 즐거워 한다 (바룩 3장 34절)
별들은 부르면 응답한다. 제때에 빛을 낸다. 바룩은 그 질서를 슬기의 표지로 읽는다. 슬기는 꾀와 다르다. 꾀는 이익을 따라 굽고, 슬기는 진실을 향해 선다. 율법은 금지의 목록이 아니라 오래 쌓인 분별의 기록이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사소하지 않다. 별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제때를 지켰다. 그 침묵이 이미 하나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얼마나 제때를 알고 있는가.
• 제7독서 —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에제키엘 36장 22절)
흩어짐은 단지 고통의 결과가 아니었다. 에제키엘은 그 원인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힌 결과였다. 선택이 특권으로 변할 때, 이름은 그 안에서 무너진다. “나의 거룩함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이 구분을 선명하게 남긴다. 회복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를 돌아본다. 그 이름을 내세운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도 유효하다.
• 서간 — 그분과 함께 살리라 (로마서 6장 8절)
바오로는 짧게 말한다. 함께 죽었으니, 함께 살리라. 부활은 죽음을 지나야만 열린다.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분명한 단절이다. 죄와 묵은 자아가 끝나는 자리에서 새로움이 시작된다. 세례는 그 죽음의 언어였다. 물에 잠기는 순간, 우리는 내려간다. 다시 올라오며 다른 생을 받는다. 이미 그 길을 지나왔다면 남은 물음은 하나다. 당신은 정말로 죽었는가.
이어지는 제3부 세례 전례 (Baptismal Liturgy)는 ‘새로운 태어남’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부활초가 물에 잠기고 성수가 축복된다. 예비 신자가 있다면 이 밤에 세례를 받는다. 공동체는 함께 세례 서약을 새롭게 하고, 이미 세례를 받은 이들도 다시 일어나 믿음을 고백한다. 이어지는 성수 예식은 기억을 깨우는 물결처럼 퍼진다. 그리고 제4부 성찬 전례 (Liturgy of the Eucharist)로 나아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자리. 그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우리 안에 머무는 생명을 체험한다.
빈 무덤 앞에서, 질문은 다시 일어선다
파스카 미사의 복음은 우리를 다시 ‘빈 무덤’ 앞에 세운다. 인류의 시간 속에서 가장 기묘한 이 장소는, 물리적으로는 비어 있으나 영성적·미학적으로는 가장 충만한 자리다. ‘빈 무덤’은 여백의 극점이다. 서구 미술이 늘 ‘현존’하는 신체를 그려왔다면, 부활의 복음은 ‘없음’으로 ‘있음’을 드러낸다. 이 역설은 동양 미학의 여백, 그리고 케노시스(Kenosis, 자기 비움)의 사유와 맞닿는다.
무덤은 원래 죽음을 가두는 닫힌 공간이다. 그러나 돌이 굴려지고 그 안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의지하던 마지막 경계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더 이상 그곳은 끝이 아니다. 생명이 빠져나간 통로다. 여기서 신앙은 ‘보이는 증거’에 매달리는 태도를 넘어, ‘부재를 통해 드러나는 현존’을 받아들이는 자리로 나아간다.
이 장면은 하나의 열린 텍스트다. 제자들과 여인들, 그 모든 목격자에게 상상력을 요청한다. 남겨진 것은 ‘수의’와 ‘수건’뿐이다. 그것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는 묘사는 혼돈 속의 질서를 암시한다. 부활은 빼앗긴 사건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신적 구성이라는 신호다. 보이지 않음은 무질서가 아니라, 더 깊은 질서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신앙을 ‘정답의 수용’이 아니라 ‘이행(Passover)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싶다. 대답은 머물러 있지만, 질문은 건너간다. 이 관점에서 부활은 마침표가 아니다. 오히려 거대한 물음의 해방이다. 종교는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났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이 말이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려면, 반드시 질문이 따라야 한다.
"그 부활이 나의 절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빈 무덤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질문이 멈추면 신앙은 굳어진다. 그러나 물음이 절망의 자리를 통과해 희망의 기슭으로 건너갈 때, 파스카는 비로소 현재가 된다. 이 사건은 제자들이 붙잡고 있던 모든 질문을 흔들고, 다시 배열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 묻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부재 속에서 어떻게 현존할 것인가”를 묻게 된다. ‘빈 무덤’은 그 전환의 자리다. 답이 사라진 공간에 남은 것은 “그가 어디 계신가?”라는 근원적 갈망이다. 비어 있음은 닫힘이 아니라, 모든 물음이 드나들 수 있는 개방이다. 신뢰와 의심, 경탄과 두려움이 함께 머무는 자리.
이렇게 본다면, 신앙인은 답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더 높은 차원의 질문을 향해 건너가는 사람이다. 부활이라는 고정된 진실은 북극성처럼 방향을 비출 뿐, 실제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물음이다.
결국 부활은 묻는다.
“이제 다 알겠느냐”가 아니라,
“이제 무엇을 물으며 살아가겠느냐”라고.
‘부활’을 뜻하는 Resurrection이라는 말에는 이 운동이 담겨 있다. 단순한 되돌림이 아니다. 라틴어 ‘resurrectionem’에서 비롯된 이 단어는 Re- (다시)와 Surgere (일어나다/솟다)가 만난 형태다.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 Surge라는 말처럼, 안에서 밀려오르는 움직임.
부활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질문의 이름이다.
물음의 신앙, 건너감의 윤리
신앙은 확신이 아니다. 어떤 것을 완전히 확신한다면, 더는 믿을 이유가 없다. 공기와 태양을 두고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분명하기에 묻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다르다. 그것은 물음표 위에 서 있는 태도다. 불가지론과 무신론까지 아우르는 넓은 자리에서, 신앙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 점에서 확신을 소유했다고 말하는 태도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에 이단으로 불렸다. 종교는 수많은 망치를 닳게 하는 모루와 같다는 비유가 있다. 인간 내면의 두려움과 소망이 삶이라는 막 위에 비친 결과라는 해석 또한 하나의 시선이다. 그 시선을 둘러싼 증명과 반박이 종교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 긴 흐름 속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 “저 너머에 누가 있는가?” 그리고 “죽은 다음에 무엇이 남는가?” 답은 서로 다르지만, 바로 그 다름이 종교를 이해하는 매혹이 된다.
한국 기독교는 이 복잡한 과정을 단순한 확신으로 축소했다.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신앙을 대신하려 했다. 이는 근대 동양에서 벌어진 문화 충돌이 남긴 오해의 연장이기도 하다. 완전히 한쪽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 왜곡을 굳히고 확장한 주체가 한국 기독교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오해는 신앙과 종교를 같은 것으로 묶어버렸다. 그 결과, 질문 없는 확신이 하나의 미덕처럼 자리 잡았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었다. 정치와 행정, 사법의 깊은 층위까지 영향을 미쳤다. 질문 대신 결론을 앞세우는 습관, 그 배후에는 근본주의가 있다. 종교 이단과 사이비가 보이는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정치와 결합한 독단은 근본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들은 논쟁하지 않는다. 증거를 심리(審理)하지도 않는다. 이미 내려진 판결을 전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판결은 언제나 ‘유죄’다. 성스러운 텍스트가 그렇게 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는 심리와 판결을 함께 아우르는 ‘심판’이 성립하기 어렵다. 사법부 일부가 법전과 판례를 절대화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경향과 닿아 있다.
한국 사법 제도의 결함은 심리의 빈약함과 판결의 과잉에 있다. 재판은 판단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결론을 내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사법의 출발은 심리다. 충분히 살피고 헤아리는 과정이 없다면, 판결은 공허해진다. 지금 이 기능은 ‘소년심판’이라는 제한된 영역에만 남아 있다. 이 지점에서 개혁의 필요가 시작된다.
다시 신앙으로 돌아온다. 신앙이 물음이라는 말은 믿음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믿음을 단단히 하기 위해 질문이 필요하다. 이 질문에는 크고 작음의 구분이 없다. 개인의 소소한 바람에서 시작해도 좋고, 사회와 인류를 향한 물음이어도 충분하다. 가장 경계해야 할 상태는 질문이 사라진 자리다.
"1톤의 생각보다는 1그램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
-최규상, 황희진 <긍정력 사전>-
생각은 넘치지만 행동은 머뭇거릴 때가 많다. 실행되지 않는 계획은 머릿속에만 남는다. 행복을 원한다면, 그 마음을 넘어 실제의 선택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옳은 생각이 언제나 옳은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균형이다.
행동의 중요성은 두 겹의 의미를 가진다. 아무리 큰 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공허해진다. 동시에, 생각이 얼마나 삶 속에서 구현되었는지를 묻는다. 이 균형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 밑에는 일관성이라는 단단한 기준이 자리해야 한다.
요즘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시간, 타인의 말과 글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삶과 문장의 균형 앞에서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함께 일어난다. 그 마음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 광장은 질문을 위해 존재한다. 내 안의 광장도 여전히 열려 있다.
건너감과 다시 일어남은 분리되지 않는다. 건너지 않으면 일어설 자리가 없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건너감은 방황이 된다. 아브라함은 길을 나섰고,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넜으며,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과했다. 그 끝에 빈 무덤이 놓여 있었다.
파스카 성야는 그 모든 밤을 한자리에 불러온다.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듣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건너감을 떠올리고, 다시 일어날 용기를 새긴다.
어둠 속에 불이 켜진다. 작은 불이 서로를 건너가며 번진다. 보시니 좋았다, 하던 태초의 빛이 다시 이 자리에 도착한다.
용약하여라. 건너 가고 건너온 모들 이들이여.
부활을 함께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