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단상, 사는 것은 그때 그때 다르다
1.
3월의 끝자락인데도 아침과 저녁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어제는 서울에도 벚꽃이 피었다고 하지만, 웃풍이 두려운 환자에게 창밖의 기척을 확인하는 일은 아직 망설여진다. 계절은 분명 앞으로 나아가는데, 몸은 그 속도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도 이 계절이 남기는 선물이 있다. 바람이 먼지를 밀어내고 드러낸 파란 하늘. 그러나 그 바람이 또 다른 곳에서는 불길을 키운다. 넓고 깊어지는 화재의 소식 위로, 슬픈 빛의 하늘이 잠깐 얼굴을 내민다. 기후 현상 가운데서도 바람은 끝내 붙잡히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예측도, 통제도 쉽지 않다. 그 앞에서 여전히 무력해 보이는 정부와 공무 조직의 대응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서늘하게 내려앉는다.
며칠 사이 단편 두 편을 탈고해 계간지 공모에 보냈다. ‘신인문학상’이라는 이름 앞에서 발걸음이 잠시 멈춘다. 이미 오래 걸어온 길 같기도 하고, 이제 막 시작하는 자리 같기도 하다. 그 낯선 경계 위에서, 주저함과 설렘이 나란히 선다.
내일부터는 4월이다. 그동안 기고하던 비평매체에 정식 내부 필자로 합류하게 된다. 글을 쓰는 날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4대 보험도 해결된다. 거기까지지만, 그 정도의 단단함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2.
작년의 기록을 들춰보니, 이맘때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긴 호흡의 리뷰를 틈틈이 남기고 있었다. <우리들의 블루스>만큼 삶의 결을 촘촘히 붙들지도 못했고, <나의 해방일지>처럼 깊은 사유로 침잠하지도 않았으며, <눈이 부시게>가 건네던 문학적 환기의 충격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소품을 길게 늘인 듯한 결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이제는 받아들인다. OTT에서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은, 어쩌면 처음부터 과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화면은 끊임없이 다음 장면을 재촉하고, 이야기는 오래 머무르기보다 흘러가기를 택한다.
특히 <폭싹 속았수다>가 내세운 세속적 행복론은 끝내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애순의 인생에 찾아온 ‘다시 봄’이 결국 자본의 회복이 가져온 안정으로 귀결되는 지점에서, 그 감정은 더 또렷해졌다. 그 결말은 마치 멀지 않은 과거를 불러내는 듯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고, 자수성가가 아직 가능하다고 믿어졌던 시절.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으로 오래 울린다.
3.
“기억은 수채화 같이 변한다”는 대사가 오래 남는다. 번지듯 스며드는 색처럼, 미움은 옅어지고 사람은 조금 더 젖어든다. 시간은 그렇게 감정을 눅여, 각진 마음을 둥글게 만든다.
그러나 그 변화는 언제나 지금의 자리 위에서 이루어진다. 현재의 온도와 빛이 기억을 덧칠한다. 어떤 이에게는 지브리풍의 따뜻한 동화로 남고, 또 다른 이에게는 뭉크의 절규처럼 일그러진 형상으로 남는다. 기억은 결국, 삶이 스스로에게 바르는 얇은 화장과도 같다.
한때 담벼락을 가득 채운 지브리의 장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너머를 떠올린다. 그 다정한 색채 뒤에 얼마나 많은 막막한 하루들이 겹쳐 있는지. 갑갑하고 아득한 생들이 서로를 비껴가며 쌓여 있다. 그 풍경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건넨다. 그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늦지 않은 응원과 조심스러운 격려를. 폭싹 속았수다.
4.
지난 2주 전, 사순 4주일의 복음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였다. 사순 시기임에도 사제는 장미빛 제의를 입는다. 절제와 침묵의 계절 한가운데서 잠시 허락된 기쁨의 빛이다.
이 이야기는 신자가 아니어도 한 번쯤 들어봤을 오래된 우화다. 그러나 시선은 대개 돌아온 아들에게 머문다.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존재의 극적인 서사에 마음이 쏠린다. 정작 복음이 오래 머무는 자리는, 그를 맞이하는 큰 아들의 내면인데도 말이다.
스스로를 탕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조차 쉽게 그에게 감정을 싣는다. 하지만 복음은 다른 쪽을 바라보게 한다.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이의 마음. 성실과 책임으로 하루를 쌓아왔지만, 칭찬과 보상은 늘 다른 쪽으로 기운다고 느끼는 감정. 그 서늘한 결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이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다면 어떨까. 뒤늦은 회심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삶의 깊이는 조금 더 넓어지지 않을까. 타인의 귀환을 받아들이는 태도 안에서, 또 다른 의미의 회개와 회심이 조용히 자란다.
이 장면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와도 어딘가 닮아 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울리던 마음들이, 한 지점에서 은은하게 겹쳐진다.
5.
늘 성실하게 하루를 견디는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과 애순을 보며, 문득 나와 아내를 떠올린다. 나는 엉덩이가 가벼운 편이라 무엇이든 먼저 처리하고 지나가려 한다. 그만큼 아내의 외출과 일처리에는 늘 마음이 쓰인다. 낯선 절차와 점점 늘어나는 키오스크와 앱 앞에서 혹여 당황하지 않을지, 사소한 장면들까지 걱정이 앞선다.
하물며 가끔 시비를 걸어오던 경비 아저씨의 종량제 봉투 검열 같은 일도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모금을 가장한 사이비 신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그들을 제지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래도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요즘도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이 문을 두드릴 때면, 그 기억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래서 아내는 늘 말한다. “나보다 더 살아야 해.”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을 붙드는 마지막 끈처럼 들린다.
아직 봄은 완전히 오지 않았다 여긴다. 껌껌하게 일렁이는 새벽의 겨울 바다에 작은 고깃배 하나를 띄운다.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그렇게 하루를 건넌다. 살아낸 사람은, 결국 살아진다.
6.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한국 프로 야구를 44년 동안 좋아하며 살아왔다. 해마다 같은 시기에 시작되지만, 그때마다 다른 마음으로 마주한다. 익숙함과 설렘이 겹친다.
야구는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다. 주 6일을 쉼 없이 달린다. 투수가 버텨주면 타선이 잠잠해지고, 타격이 터지면 마운드가 흔들린다. 어느 한쪽이 빛나면 다른 한쪽이 주저앉는 일, 그 불균형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열 번 중 세 번이면 제 몫을 다한 타자. 다섯 번 중 절반을 이기면 가을을 기대할 수 있는 팀.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규칙이 그 안에 있다. 때로는 자신을 내어주며 팀을 살리고, 그 희생은 기록에서 지워진다. 숫자에 남지 않는 기여가 경기를 지탱한다.
모든 결과는 결국 긴 시간의 평균으로 모인다. 한때의 들뜸과 침잠이 지나가고 나면, 각자의 자리가 또렷해진다. 특출함은 반짝이며 지나가고, 꾸준함은 조용히 남는다. 그리고 야구는 끝까지 알 수 없다. 9회초가 지나도, 결과는 아직 쓰이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는 그 불안정함. 그 긴장 속에서 경기는 완성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하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불완전한 규칙 속에서 균형을 찾아간다. 때로는 어긋나고, 때로는 맞물린다. 그 느린 조정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또 하루를 건넌다.
7.
야구는 평등을 지향하는 경기다. 덕아웃에 들어서는 이들은 코치든 감독이든 모두 같은 유니폼을 입고, 등번호를 단다. 역할은 다르지만, 외형은 나란하다. 영어로 야구 감독을 coach가 아니라 manager라 부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앞에서 지휘하기보다, 흐름을 관리하는 존재에 가깝다.
심판 역시 경기를 이끄는 주체가 아니다. judge도, referee도 아닌 umpire다. 규칙의 경계를 지키며, 진행을 돕는 위치에 머문다. 그가 중심에 서지 않을 때, 경기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이 질서는 민주주의의 한 단면을 닮아 있다. 누구도 과도하게 앞에 서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나눈다. 그러나 현실의 장면은 종종 다르게 펼쳐진다. 법복을 입고 높은 단상 위에서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의 모습은, 때로 그 거리를 지나치게 벌려 놓는다. 판단의 권위가 삶의 자리와 멀어질수록, 신뢰는 서서히 흔들린다.
야구는 이미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점검해 왔다. 투구 자동 판독과 비디오 판독은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다. 오류를 지우기보다, 드러내고 조정하려는 시도다. 사법의 영역 또한 이와 닮은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판결을 내리는 이들 역시, 민주적 절차 속에서 견제와 균형을 통과해야 한다는 요청 앞에 서 있다.
사람의 고유한 능력이란 어쩌면 완벽함이 아니라, 오차를 품을 수 있는 틈인지 모른다. 그 틈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고, 제도를 세우며,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한다. 완전하지 않기에, 함께 나아갈 수 있다.
8.
늘상 ‘정치’와 ‘도덕’은 어긋난다. 개인의 도덕률이 이전보다 앞세워지는 요즘, 이 긴장은 한때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선거와 공천의 장면만 보아도 그렇다. 다수의 선택에 모두가 기꺼이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정치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이유, 곧 순응의 동기를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고귀한 목적을 위해 비도덕적 방법이 필요할 때 정치인의 선택은 어떠할지’, ‘기만과 협잡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부류에게 도덕적 고결함으로 항변할 수 있는지’. 이 물음은 소크라테스 이래 정치철학의 오래된 중심이다. 답은 늘 미끄러지고, 질문만 또렷이 남는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이조차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절대자가 통치하던 원시 왕족 국가에서도, 통치의 기술만큼이나 도덕적 자질은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공식으로 묶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도덕률이 정치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공공선’과 ‘정치적 이유’라는 이름 아래, 다른 판단의 기준이 허용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멈춰 선다.
9.
도덕만을 완전한 기준으로 세운다면, 정치적으로 ‘필요’한 선택들까지 모두 이기적 욕망으로 환원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반대로 도덕적 완전함을 ‘비정치적’이라 치부하며 밀어내면, 권력의 고집만 더 단단해진다. 두 극단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닮아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정치를 앞세우면서도 그것이 ‘보편적 가치의 부재’나 ‘세렝게티의 법칙’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붙드는 방식은 무엇인가. 그 길을 더듬어 가는 과정, 그 느린 축적이 정치의 진보일지도 모른다. ‘정치’와 ‘도덕’의 화해 역시 그 지점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념의 경계와 이론의 습관을 넘어서는 상상력, 그 얇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장면을 두고 정치가 도덕의 덫에 걸렸다고 말한다. 혹은 두 영역의 근본적 충돌이라 단정한다. 그 말은 너무 쉽게 세계를 단순화한다. 나는 이유가 있고 상대는 변명뿐이라는 식의 구분은 설 자리가 없다. 모든 잘못을 타인에게 돌리는 해명은, 그 빈약함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세상은 하나의 선 위에 정렬된 진영으로만 나뉘지 않는다. 면과 면이 맞닿아 선을 이루듯, 그 경계는 언제나 흔들린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그 선 위에 서서, 위태로운 균형으로 하루를 버틴다. 그러니 어느 쪽에 서 있든, 잘못은 그대로 잘못이다. 얕은 이해로 덧씌운 궤변은 결국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10.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낸다.
물이야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하지만,
때로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냇가에 떠있는 나뭇잎처럼...
사는건 그때그때 다르다.”
-어디선가 본듯한 구절-
물결에 몸을 맡기는 삶과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삶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같은 자리에서 갈라진다. 냇가에 떠 있는 나뭇잎의 느린 수용이든, 폭포를 향해 뛰어오르는 연어의 고집이든, 삶은 언제나 그때의 결단을 요구한다.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에도 때가 있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휘젓는 순간도 따로 있다. 물러섬과 돌진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의 자리에서, 단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영원한 나의 편, 아내와 함께라면 어떤 방향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 동행이 삶의 기준이 된다.
한때 4월을 잔인하다 말한 앨리어트를 괜히 미워한 적이 있었다. 4월의 첫날,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태어난 사람에게 이 계절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인가 새로 시작된다는 기척이 은근히 감돈다.
그러나 이번 4월에는 다른 바람이 있다.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조용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풍경. 그 고요한 자리 위에, 나만의 수채화를 천천히 번지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