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봄은 오는데, 마음은 아직

by 박 스테파노

0.

BTS 광화문 공연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한쪽에서는 거대한 경제효과와 국익을 내세우고, 다른 쪽에서는 정치적 담론과 감정적 품평을 섞어 불편함을 호소한다. 전자는 흔한 과장 광고에 가깝고, 후자는 배 아픈 아재들의 인상평에 불과하다.


정작 우리가 놓치는 것은 따로 있다. 자본의 냄새에 예민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자가 세계 시장을 향해 정공법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에게는 어설프게 익숙하지만, 이방인에게는 묘하게 낯선 그 감각. 이 거대한 쇼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타고 전파되었다는 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터클의 사회처럼, 사적 이익 추구의 기획이 대중은 물론, 대중 눈치를 보는 기성 언론의 뉴스 꼭지까지 장악했다.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이 기존 언론을 잠식하는 그 한복판에서, 피식자는 포식자를 특집 기사로 추앙하느라 바빴다.


아이러니는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고 완벽하게 완성된다.


방탄소년단(BTS)이 2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컴백을 기념해 'BTS 컴백 라이브 : 아리랑'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

작년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이다. 유명한 아포리즘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의 변용으로 보인다. 레몬은 서구 유럽에서 불운과 고난의 상징이다. 쓴맛을 견디며 달콤함으로 전환하라는 그 교훈이 경전에 오른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귤은 죄가 없다. 관광을 제외하면 농업이 대세인 제주에서, 감귤은 섬의 풍토와 사람을 함께 지탱해온 버팀목이다. 귤은 척박한 화산토에서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차가운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저 홀로 단맛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불운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와 소박한 충만의 상징에 가깝다.


레몬 자리에 귤을 앉혀 놓은 그 제목 앞에서,

귤을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괜히 섭섭해진다.



2.

이리저리 뜻을 헤아리다 귤 꿈 해몽을 찾았다. 대부분은 돈, 재물, 행운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데 소수의견 하나가 눈에 걸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럴듯하게 반듯한 꿈. 1950년대를 버텨내고 격변의 20세기를 살다 21세기에 노인이 된 부모 세대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거창하지도, 허황되지도 않은, 그저 반듯하고 소박한 꿈.


에릭 에릭슨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저마다의 발달 과업을 안고 살아간다. 그 소박한 오르막에서 자꾸 발을 헛디디는 날들, 그것이 삶이 아니던가. 귤을 손에 쥐어도 먹지 못하면 남의 것이 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우주의 섭리다.


인생이 귤을 건네거든 바로 먹어라.

Just eat.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 넷플릭스 제공



3.

모두가 고개를 들고 걷던 시절,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던 시절,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말을 건네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 되었다. 그래도 봄은 온다. 가을이 오듯, 아이가 자라듯, 마음이 자라는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누군가에게 봄은 잔치지만, 누군가에게는 콘크리트 바닥을 머리로 뚫어내며 싹을 틔우는 고통의 계절이다.


베르그송은 삶의 약동(élan vital)을 말했다. 그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홀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저 작은 힘이다. 이 지구 위에 70억 개의 롤러코스터가 쉼 없이 오르내린다. 그 외로운 고통의 검은 바다에서 저 멀리 고깃배 등불 하나를 발견할 때, 나만이 아니구나 싶은 작은 위로가 온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스스로를 증명한다.



4.

미국의 내전을 가상한 영화 <시빌 워>는 엉성하다. A24 스튜디오 특유의 재기발랄함도 없고, 내전이라는 역사적·정치적 함의도 희미하다. 그저 미디어 산업의 역군이 되어버린 저널리스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영화다.


그럼에도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워싱턴 DC로 향하던 일행이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이질적인 평온과 마주치는 장면이다. 옷 가게 점원에게 내전의 혼란을 아느냐고 묻자, 그는 어느 편에도 끼지 않기로 했다고 조용히 답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경고했다. 거대한 악은 괴물이 아니라 무관심하고 사유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에게서 자란다고.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해 고집으로 끝난다. 동조가 냉소로 바뀌는 순간 재난은 증폭된다.


요즘 들어 이 영화의 예측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모든 전쟁들이 어서 매듭이 지어지길 바란다.


영화 <시빌워>의 한장면. A24 스튜디오 제공



5.

작년 이맘때, 유흥식 추기경의 담화가 떠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처럼, 모든 이의 고통 앞에서 중립이란 악의 동조에 준한다는 일침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오랜 통찰처럼 악은 선의 결여 상태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되듯, 있고 없음 사이에 중간이란 없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결국 둘 중 하나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의 중첩 상태는 인식론적 유보일 뿐, 존재론적 중립이 아니다. 선악의 논쟁에 회색지대란 본디 없다. 중립이라는 말은 선악을 따지는 자리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사유없는 침묵은 때로

가장 큰 편을 드는 행위가 된다.



6.

2013년 <피키 블라인더스>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집시 갱스터 토마스 셸비(킬리언 머피)와 면도칼을 휘두르는 동료들에게 금세 매료되었다. 6시즌에 걸쳐 그가 수많은 적들과, 혹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승리하기도, 패배하기도 했으며 거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뻔도 했다.


넷플릭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는 10년 넘게 이어온 토마스 셸비의 서사를 닫는 마침표다. 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 가족과 업보를 마주한 토미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 아들 듀크 셸비(배리 키오건)의 품에서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긴다. 그것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었다. 1차 대전의 터널에서 시작된 그의 빌려온 삶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말이었다.


서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시작된 무엇이 있었다.


영화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7.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토미는 아들 듀크에게 안식으로 인도해달라고 청하며,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문을 읊조린다. "In the bleak midwinter(황량한 한겨울에)."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멸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소대원들이 죽음을 각오하며 불렀던 찬송가 구절이다.


토미에게 그것은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 이어온 고통스러운 보너스 타임의 시작을 뜻하는 주문이었다.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원시(原詩)가 그러하듯, 황량함 속에서도 무언가가 태어나는 역설. 그 찬송가는 토미의 삶 전체를 하나의 긴 겨울로 요약하는 동시에, 그 겨울이 이제 끝났음을 고하는 진혼곡이기도 했다. 유언장은 이렇게 닫힌다.


Once, I nearly got everything.
But nearly doesn't count. ...
Burn my body. Let the ash blow.
I am free.

한때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졌으나,
'거의'는 의미가 없다. ...
내 몸을 태우고 재를 날려라.
나는 이제 자유다.



8.

"I am free." 이 선언은 세 가지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품고 있다. 첫째는 전쟁 트라우마다. 환청과 환영에 시달리며 멈추면 들려오는 소음을 피해 앞만 보고 달렸던 그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고요를 얻는다. 둘째는 책임과 죄책감이다. 아다와 폴리, 그레이스를 잃은 슬픔을 야망으로 덮으려 했던 그가 아들 듀크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넘기며, 자신은 그 연쇄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셋째는 역설적 불멸이다. 영화 제목 '불멸의 남자(The Immortal Man)'가 암시하듯, 토미는 육체적으로 사망하지만 그가 남긴 원고와 셸비 가문의 전설은 듀크를 통해 이어진다.


"총알은 이름이 없는 사람에게, 총은 쓸 일이 없는 사람에게 주라"는 유언에는 폭력의 시대를 끝내고 싶었던 마지막 염원이 담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총알로 자신을 쏘게 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유산을 아들의 손에 쥐여주는 비극적 대물림을 완성한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저자는 죽어야 비로소 텍스트가 살아난다. 토미의 죽음도 그러했다. 그의 자유는 개인 영혼의 안식인 동시에, 남겨진 자들에게 전설이라는 또 다른 무게를 지우는 불멸의 시작이다.



9.

요즘 콘텐츠는 영화보다 드라마 시리즈가 대세다. 누군가 장편과 단편의 서사라고 비유하던데, 동의하기 어렵다. 이는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과 문체의 문제다.


여러 회차로 나누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솔직한 핵심은 돈이다. 동일한 리소스로 최대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을 자본이 선택한 결과다. 그래서인지 영화도 쪼개어 다편으로 배급되고, 넷플릭스는 같은 시리즈를 시즌으로 나누는 데 재미를 들인 듯하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에 예술의 아우라가 소멸한다고 했다. 지금은 아우라가 소멸하는 것을 넘어, 서사 자체가 분절되어 유통된다. 이런 늘이기의 반대급부로, <피키 블라인더스: 불멸의 남자>가 영화라는 형식으로 서사를 닫은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호흡으로 끝낸다는 선택 자체가 이미 미학적 선언이었다.


<폭싹 속았수다>는 8~10화 정도가 적절하지 않았을까. <우리들의 블루스>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앞에서 쌓아 올린 감정들이 재활용되며 색이 바랜다. 덜어내는 일이 문학적 완성도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백이 없으면 긴장도 없다.


조금 지겹다는 말은,

결국 숨 쉴 공간이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BTS 이전의 방탄소년단의 그 시작이었던 <봄날>. 하이브 제공



10.

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귤을 손에 쥔 채 망설이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BTS의 공연이 넷플릭스를 타고 세계로 퍼지는 동안, 토마스 셸비는 황량한 한겨울을 읊조리며 아들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손에 쥐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제때 먹었는가.


거의 모든 것을 가졌으나, '거의'는 의미가 없다는 토미의 유언은 삶의 부침(浮沈)을 살아낸 모든 이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격변의 시대를 버텨낸 부모 세대의 반듯한 꿈도, 고깃배 등불을 바라보며 버텨낸 누군가의 외로운 밤도, 결국은 그 거의에 닿으려 했던 날들이었다. 인생은 완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그 미완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고 재를 날리는 일,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봄이 오면 마음도 자라길 바란다. 아직 단단한 땅 아래 있더라도, 이름 없이 움트는 것들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떻게든,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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