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거처, 멈춤이 주는 안부

요즘 근황 — 망각과 고백 사이에서

by 박 스테파노

영화와 문학, 각각 서른 편의 비평적 에세이로 브런치북을 완결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나씩, 연말연시엔 잠시 숨을 고르며, 작년 여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글들입니다. 매일 발행하며 한 달을 달린 적도 있었지만, 한 주에 하나씩 올린 글들은 그 시간의 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더 뿌듯합니다. 그 뿌듯함 뒤로, 작은 허탈과 '다음'이라는 부담이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명함 관리 솔루션으로 시작해 커리어 플랫폼으로 자란 곳에서 텍스트 기반 SNS를 열었습니다. 그곳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글을 써달라는 제안이 왔고, 생각 끝에 수락했습니다. 비즈니스와 산업의 경험에 인문학적 고찰을 녹여, 전문적이되 가볍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문예지와 공모전의 계절도 돌아왔습니다. 지난달 말엔 문학평론을 우편으로 부쳤고, 단편과 시들을 다듬어 이달 말의 마감에 맞추어 봅니다. 이번 공모들의 공통된 이름은 '신인'입니다. 쉰이 넘어 크게 넘어진 사람이, 그 이름 하나를 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꿈꾸어 봅니다.


글쓰기에 욕심이 깊어지던 어느 날, 책 광고 문구 하나가 눈에 걸렸습니다.


좋은 글이란,
1. 독자를 중심에 두고
2. 공학적으로 설계해
3.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4. 명료하게 쓴다.


씁쓸했습니다. '좋은 글'을 '좋은 프레젠테이션'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짓는 일이 PT가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고전을 제외한 글쓰기 책들은 저마다 방법론을 열거하기 바쁘고, 그 방법론의 종착지는 결국 자기 브랜드의 가치 생산입니다. 글쓰기 본연의 기능인 자성과 사유, 판단과 분별, 그리고 공감과 연민은 오래전에 그 자리를 잃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날마다 부끄러움에 파묻히며 외로움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공학적으로 설계하고 독자를 타겟팅해 비위를 맞추는 일은 장사치의 프레젠테이션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입니다. 그런 PT의 홍수 속에서 진짜 글밭을 거니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의 글이 그리운 요즘, 다행히도 감사한 문장들을 간간이 만나곤 합니다.


정유정, 『종의 기원』. 내 사진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 정유정,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단숨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습니다. 기억을 짚어보니, 단숨이라기보다는 강연을 오가는 기차에서, 약속을 오가는 전철에서 읽었군요. 이것도 망각입니다. 한동안 책을 멀리하다 다시 읽기를 시작할 때면, 윤활유가 되어줄 소설을 집어 들곤 합니다.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자괴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번쩍이는 채찍이 되어주기에, 그렇게 손이 갔던 기억입니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완전한 행복』 에서 이야기의 외부에 머물던 '악인(惡人)'이, 『종의 기원』에서는 마침내 '나'로서 화자의 자리에 섭니다. 주인공 '유진'을 바라보며 내내 섬뜩했습니다. 깊은 비밀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작가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도덕적으로 흠 없이 살아온 분들은 의아해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솔직히는 의아한 척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그 속마음을 이렇게 읽습니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깊은 무의식 속에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그 음침한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사순 시기는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기 좋은 날들입니다. 내 안에 웅크린 사악한 나를 발견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악한 인간이 보통 인간이 되는 자리에는 언제나 고백이 먼저 옵니다. 그리고 진정한 반성에서 우러난 사과가 뒤따릅니다.


요즘 세상의 시끄러운 일들에 귀를 닫고 싶어집니다. 사람만도 못한 사악함에 온몸이 떨립니다. 그 사악함은 언제고 망각을 해결책으로 삼아 시간을 기다릴지 모릅니다. 한 세기 가까운 학살과 도륙의 세월을 가진 독재자가, 망각을 무기 삼아 세상을 비웃듯이.


침묵하고 애써 외면하는 나 역시 어쩌면 공범일지 모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변명으로, 사회생활의 지속이라는 핑계로, 나는 그저 자판 앞에서 속상한 표정만 짓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일로 여기는 저들이 차라리 속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못과 부끄러움을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부끄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욕심을 가득 채운 내가 오늘 문득 부끄러워집니다.


글을 쓴다는 것. AI Sora



멈춤의 거처, 고요히 앉아 안부를 묻다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수년에 걸친 재무적 송사와, 완치라는 말이 허락되지 않는 병과의 씨름입니다. 송사는 때를 기다리지만, 그 때는 언제나 기대 밖으로 밀려납니다. 그래도 '반드시'와 '언젠간', 두 말을 양손에 쥐고 유일한 조상의 유산인 인내로 버텨봅니다.


문제는 병치레입니다. 신약의 효용으로 혈액 수치가 하강의 각도를 잘 유지하여, 10년 여명을 기대할 수준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벤트만 없다면 말이지요. 그 이벤트가 아이러니하게도 항암의 도구로 쓰는 약과 치료 때문에 벌어진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내성이 생겨 약효가 듣지 않는 것은 운명의 영역이지만, 부작용에 의한 삶의 질 저하는 그 자체로 일상을 무너뜨립니다. 이번에는 알레르기 쇼크가 점진적으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피부 발진에 호흡기 부종, 혈관의 확장과 수축으로 두통과 어지러움, 그로 인한 구토와 오심. 암 생존자들은 정작 암보다 항암 독성으로 괴로움이 배가되기도 하는 듯합니다. 오랜 자가 면역 질환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익숙하다 싶었지만, 익숙함은 늘 새로운 낯섦으로 깨져버리곤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가려움을 참아내는 시간 중에, 백상아리와 향유고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과학 유튜브에서 본 내용이었습니다. 영화 〈죠스〉의 주인공 백상아리는 스스로 바닷물을 흡입하는 기능이 퇴화되어, 죽을 때까지 상당한 속도로 유영을 멈출 수 없다고 합니다. 빠르게 헤엄치며 그 속도로 바닷물을 들이켜 아가미에 산소를 공급하는 까닭입니다. 백상아리는 전 세계의 대양을 쉬지 않고 가르는 회유성 어류로, 물 밖에 조금만 오래 있어도 탈진해 죽을 만큼 환경에 예민합니다. 헤엄을 멈추면 익사하기도 한다 합니다. 그래서 아쿠아리움에 백상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향유고래는 통나무처럼 해류에 몸을 싣거나 수직으로 서서 잠을 잡니다. 고래는 뇌의 절반씩 교대로 잠재워, 한쪽 뇌가 잠들어도 나머지 반으로 호흡하고, 한쪽 눈은 뜬 채 포식자와 무리의 이동을 살핍니다. 사람 같은 육상 포유류는 자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지만, 고래는 익사하지 않으려면 잠든 상태에서도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2008년 과학 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영국 동물학자 팀이 2000년 칠레 해안에서 향유고래 한 무리가 코만 물 밖으로 내민 채 수직으로 서서 잠든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배가 한 마리를 건드려 깨우기 전까지, 곁에 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하루 단 7퍼센트만 수면에 드는 향유고래. 그러나 그 잠은 깊습니다. 멈추어 있어도 가라앉지 않는 것은 '멈춤' 안에 이미 부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오래도록 평화롭게 살다 죽는 것도, 어쩌면 그 멈춤의 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향유고래의 잠. 다나와 DPG


'안부(安否)'는 편안할 안(安)과 아닐 부(否)가 합쳐진 말입니다. 편안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말. 그리고 안(安)은 본디 고요함을 뜻했다 합니다. 고요한 상태가 편안한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安은 '집 안에 앉아 있는 형상'을 담은 상형자라 합니다. 편안하고 고요하기 위해서는 앉아 쉴 집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앉아서 쉰다는 일이 이토록 귀한 순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백상아리의 쉼 없는 유영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면, 향유고래의 수직적 멈춤은 생을 지탱하는 거룩한 의례입니다. 재무적 송사와 항암 독성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대양을 가르는 포식자보다 더 위태로운 속도로 매일을 버텨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만 살아남는 고래가 깊은 잠의 평화를 선택하듯, 고통의 파도가 높을수록 필요한 것은 더 빠른 헤엄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내면의 부력을 믿는 일입니다.


아나필락시스의 공포와 여명의 수치 앞에 저당 잡힌 일상이지만, 사순의 시간 속에서 찾아낸 이 고요한 멈춤은 밀려난 후퇴가 아닙니다. 삶의 소란을 잠재우고 가장 정직한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능동적인 기도입니다. 집 안에 앉아 있는 형상, 그 안(安)의 자리가 결국 외부의 풍랑으로부터가 아니라, 격렬한 통증 속에서도 나를 온전히 누일 수 있는 마음의 거처임을 생각합니다.


비록 내일 다시 유영해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요에 머물며 스스로에게 깊은 안부를 건넵니다. 멈추어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내 안의 성소(聖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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