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거룩한 바보 선언

‘쁘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에서 탈진실까지

by 박 스테파노
※ 이 글은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65

- 모든 날이 만우절인 시대의 생존법
- 열림과 전복의 계절, 4월의 이중주
- 속음의 기표와 등 뒤의 미학
- 전복과 해방의 문화사


4월은 라틴어 ‘Aperier(열리다)’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닫혀 있던 것들이 조용히 틈을 내고, 대지는 겨울의 거친 침묵을 밀어내며 연둣빛 숨을 내쉰다. 막 움트는 초목의 기척 속에서, 세계는 다시 시작을 연습한다. 이 계절은 단지 따뜻함이 아니라, 굳어 있던 시간의 결이 풀리는 순간에 가깝다.


한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이름의 뿌리를 찾는 견해도 있다. 탄생과 매혹을 상징하는 그 이름처럼, 4월은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때다. 햇빛은 부드럽게 쏟아지고, 봄비는 백곡을 적시며, 바람은 생명의 리듬을 가볍게 흔든다. 이 모든 기운이 겹쳐지며, 세계는 조용히 사랑의 문턱을 넘어선다.


이처럼 충만한 계절의 첫날, 4월 1일은 또 다른 얼굴로 기억된다. 만우절(萬愚節). 지나치지 않은 거짓이 잠시 허용되는 날, 무거운 일상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날은 단순한 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익숙한 질서와 굳어진 엄숙을 잠시 멈추게 하는, 작은 전복의 축제에 가깝다.


만우절(April Fools' Day)은 인간의 기만과 유희가 교차하는 독특한 풍경이다.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공통된 결은 있다. 질서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내는 해방의 순간이라는 점이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16세기 프랑스의 달력 개정에서 비롯된다. 샤를 9세가 새해의 시작을 4월 1일에서 1월 1일로 옮겼으나, 이를 알지 못하거나 따르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4월의 문턱에서 축제를 이어갔다. 사람들은 그들을 놀리며 선물과 농담을 건넸고, 이 습관이 유희로 굳어졌다는 해석이다.


당시 그들을 ‘쁘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 4월의 물고기)’이라 불렀다. 쉽게 낚이는 봄철의 어린 물고기를 닮았다는 뜻. 그 가벼운 비유 속에는, 속임과 웃음이 교차하는 인간적 풍경이 배어 있다.


결국 4월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닌다. 하나는 세계가 열리는 계절의 얼굴, 다른 하나는 질서가 잠시 흔들리는 축제의 얼굴.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묻는다. 열림과 전복, 생성과 농담이 뒤섞인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워지는가.

프랑스 아이들의 '만우절 의식'인 Poisson d'avril. Ⓒ Quest-France 제공



시간의 틈에서 웃다, ‘4월의 물고기’의 은밀한 기원


프랑스에서 만우절을 부르는 ‘쁘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 곧 ‘4월의 물고기’는 단순한 이름을 넘어선다. 그것은 속임과 놀이가 만나는 하나의 문화적 기표이며, 타자를 ‘낚는’ 행위 속에서 미묘한 소통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웃음은 여기서 가벼운 장난을 넘어, 관계의 간극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풍습은 오늘에도 이어진다. 유치원이나 초등 저학년 아이들은 물고기를 그려 친구의 등에 붙인다. 한참 뒤에야 그것을 알아차린 아이가 당황하면, 주변의 아이들은 “쁘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을 외치며 웃음을 터뜨린다. 일상의 작은 연극이다. 이 장난은 교실을 넘어 확장된다. TV 프로그램은 거짓을 능청스럽게 늘어놓고, 신문과 잡지, 라디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 날을 기념한다. 거리에는 물고기 모양의 과자와 케잌, 초콜렛, 기념 전화카드가 놓인다. 세계는 잠시 가벼워지고, 현실은 느슨하게 풀린다.


그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시간의 질서가 바뀌던 순간에 닿는다. ‘쁘아송 다브릴’의 가장 유력한 유래는 1564년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루시용 칙령(Édit de Roussillon)에 있다. 당시 프랑스는 율리우스력을 따랐고, 새해는 3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이어지는 축제와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칙령은 이 시작점을 1월 1일로 옮긴다.


변화는 언제나 균열을 남긴다. 소식을 알지 못했거나 익숙한 관습을 고수한 이들은 여전히 4월의 문턱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짜 선물을 보내고, 존재하지 않는 잔치에 초대하며 웃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붙은 이름이 ‘4월의 물고기’. 쉽게 낚이는 존재에 대한 은유였다. 그러나 이 풍습의 이면에는, 급변하던 시대의 무게가 잠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정 정치가 일상 깊숙이 스며들던 시기, 중세의 그늘은 여전히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날짜의 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시간(Civil Time)을 신의 시간(Sacred Time)에 맞추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어긋난다. 축제의 리듬과 금욕의 질서가 충돌한다. 율리우스력의 흥겨운 연말연시와, 그레고리력의 사순 성주간(고난주간)의 엄숙함이 맞부딪히며 기묘한 긴장을 낳는다. 만우절은 그 틈에서 태어난다.


율리우스력은 태양주기보다 매년 약 11분 길었다. 이 작은 오차는 세기를 건너며 쌓였고, 16세기에는 춘분(Spring Equinox)을 실제보다 열흘 앞당겼다. 부활절은 ‘춘분 후 첫 보름달이 지난 일요일’로 정해진다. 춘분이 틀어지면, 축일의 의미 역시 흔들린다. 그레고리 교황에게 역법 개정은 신성한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인간이 신의 시간을 잘못 읽는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였다.


EDICT DE ROUSSILLON, 1564년 프랑스 국왕 샤를 9세(Charles IX)가 선포한 루시용 칙령(Édit de Roussillon) Ⓒ Isère Tourisme
• EDICT DE ROUSSILLON
"우리는 앞으로 모든 행정 문서, 등록부, 증서, 계약서, 법령, 칙령, 공문 및 사적 서신, 그리고 모든 사적인 기록에 있어, 한 해가 이제부터 이월(1월)의 첫째 날부터 시작되고 계산되기를 원하며 이를 명한다."


시간을 다루는 권력은 곧 세계를 다루는 권력이다. 새로운 역법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톨릭 권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1582년 10월 4일 다음 날이 곧바로 10월 15일로 건너뛰었을 때, 사람들은 ‘내 인생의 10일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임대료와 세금, 축일의 날짜가 뒤엉키며 일상은 불안 속에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Y2K 밀레니엄 버그’가 현실이 된 듯한 혼란이었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춘분 무렵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3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이어지는 축제는 삶의 갱신을 기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새해가 1월 1일로 옮겨지면서, 이 전통은 교회력의 사순절과 겹친다. 기쁨과 절제가 한 자리에 놓인다. 인간은 봄을 맞아 들뜨지만, 종교는 침묵과 금식을 요구한다. 억눌린 감정은 다른 길을 찾는다. 그 출구가 바로 장난과 웃음이었다.


새로운 질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여전히 4월 1일에 새해를 기념하는 이들을 향해 조롱을 던졌다. “지금은 고난주간인데 웬 축제냐?” 혹은 “가짜 새해를 축하한다.” 이 조롱은 곧 ‘쁘아송 다브릴(4월의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굳어진다. 사순절에는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 금기의 시기에 ‘가짜 물고기’를 건네는 행위는, 상대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종교적 은유였다.


그러나 이 장난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 속에 역전의 순간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속이는 자와 속는 자의 경계가 뒤집히는 찰나. 그 짧은 틈에서, 인간은 비로소 질서 밖의 자유를 경험한다.



웃음의 전복, ‘4월의 물고기’와 숨은 연대의 형식


문화인류학의 시선에서 만우절은 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Carnival)’ 이론과 깊이 맞닿는다. 일상의 위계가 잠시 무너지고, 바보가 왕이 되며, 허구가 진실의 자리를 넘보는 시간. 이 날은 억눌린 감정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통로가 된다. 유럽의 카니발은 부활절 이전 40일 금식 기간, 곧 사순절에서 비롯된다. 육식을 끊기 전 마지막으로 마음껏 먹고 마시던 관습에서, “고기(carne)여, 안녕(vale)”이라는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가 생겨났다. 한자어로 사육제(謝肉祭). 금기를 앞둔 환희와 절제가 한데 겹친 역설의 시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쁘아송 다브릴’은 단순한 조롱의 날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민중이 교회의 엄격한 질서 속에서도 태양의 리듬에 맞춘 새해를 은밀히 기념하던 흔적에 가깝다. 육식이 금지되자 사람들은 생선을 나누었고, 금기가 더 강화되었을 때는 물고기 모양의 선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 작은 전환은 권위에 대한 부드러운 저항이었고, 해학의 방식으로 드러난 풍자였다.


물고기가 상징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도 여러 층위가 겹친다. 4월 초순, 갓 태어난 물고기들은 미끼에 쉽게 끌린다. 이 모습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닮아 있다. 중세 유럽에서 사순절 동안 육류는 금지되었고, 물고기는 주요한 식탁의 자리를 차지했다. 4월 1일이 이 기간과 겹칠 때, ‘가짜 물고기’를 건네는 장난이 생겨났다. 성(聖)과 속(俗)이 맞닿는 지점에서 탄생한,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운 일탈이었다.


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종이 물고기를 등에 붙이는 아이들의 놀이는 더 깊은 의미를 띤다. ‘쁘아송 다브릴’의 핵심은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 사이의 ‘시선의 비대칭성’에 있다. 등에 붙은 물고기는 하나의 캔버스가 되고, 당사자는 알지 못한 채 유희의 중심에 놓인다. 이 작은 표식은 사회적 위계를 잠시 무너뜨린다. 권위를 지닌 어른이나 스승조차, 그 순간만큼은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 장난은 단순한 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공유되는 공모, 그리고 그 안에서 번지는 웃음이 공동체의 결을 단단하게 만든다. 진실을 아는 이들과 모르는 이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 그것을 함께 즐기는 순간, 이 놀이는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로 확장된다. 약한 고리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짧고도 은밀한 연대의 장면이다.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 정보를 왜곡해 관심을 끄는 행위를 ‘낚시’라 부르는 것도 이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4월의 물고기’가 품고 있던 생태적 은유가 새로운 형태로 변주된 셈이다. 그러나 문화비평의 자리에서 볼 때, ‘쁘아송 다브릴’은 인간의 취약함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틈을 통해 함께 웃을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완벽을 지향하는 시대 속에서, 등 뒤의 종이 물고기는 우리가 여전히 속을 수 있는 존재임을 조용히 환기한다.


Google “Nose” 를 만우절에 홍보한 홈페이지. Ⓒ Google Inc


이 상징은 현대에 이르러 ‘디지털 미끼(Digital Bait)’와 ‘게릴라 퍼포먼스’로 확장된다. 이제 그것은 단순한 장난을 넘어, 브랜드가 자신을 표현하는 전략이 된다. 중요한 것은 ‘터무니없음’과 ‘디테일의 정교함’ 사이의 긴장이다.


버거킹은 매년 만우절마다 존재하지 않는 메뉴를 내놓는다. 초콜렛 와퍼나 왼손잡이용 와퍼 같은 것들. 이는 상품을 파는 일이 아니라, 브랜드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웃고, 그 유머를 기억한다. 종이 물고기의 장난은 그렇게 ‘바이럴 콘텐츠’로 다시 태어난다.


2013년 구글은 향기를 검색하는 기능 “구글 노즈(Google Nose)”를 발표했다. 정교한 인터페이스와 과학적 설명은 현실처럼 보였고, 많은 이들이 기꺼이 그 허구에 빠져들었다. 이는 ‘쁘아송 다브릴’의 핵심인 ‘진지한 가짜’를 극대화한 사례다. 기술의 한계를 농담으로 바꾸며, 웃음의 형식을 한 단계 확장한 퍼포먼스였다.



보이지 않는 등에 붙은 세계, 유희로 흔드는 질서의 경계


예술가들은 ‘쁘아송 다브릴’의 오래된 몸짓을 도시 위로 옮긴다. 등 뒤에 몰래 무언가를 붙이던 장난은, 이제 거리와 건축의 표면을 겨냥한다. 공공 기물이나 동상의 ‘등’에 거대한 종이 물고기를 얹고, 낯선 오브제를 예상치 못한 자리에 놓는다. 이 작고 기묘한 개입은 도시라는 시스템의 맹점을 건드린다. 시민들은 평소 보지 못했던 방향을 돌아보게 되고, 익숙한 풍경은 잠시 놀이터로 바뀐다.


최근에는 증강현실(AR)이 이 전통을 확장한다. 특정 장소를 비추면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나고, 사람들의 등 뒤에는 보이지 않는 종이 물고기가 떠돈다. 실체 없는 ‘디지털 물고기’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를 은근히 비춘다.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틈이, 장난처럼 가볍게 드러난다.


이러한 변주들은 분명한 미학적 층위를 지닌다. 속임이 드러나는 순간의 쾌감은 정보 과잉의 피로를 환기시키고, 시선의 비대칭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에 은밀한 공모를 만든다. 진지한 기관과 기업이 스스로를 낮추는 장면은 권위를 흔들고, 완벽을 요구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인간적인 빈틈을 드러낸다. 이 유희는 가벼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질서를 재배치하는 힘이 깃든다.


물론 디지털 시대의 ‘낚시’는 때로 혐오와 거짓으로 변질된다. 그럼에도 ‘쁘아송 다브릴’의 정신을 잇는 시도들은, 악의 없는 기만이 어떻게 공동체의 웃음을 이끌 수 있는지 보여준다. 프랑스의 한 지자체가 만우절에 “마을 분수에서 와인이 나올 것”이라 공지하고, 실제로는 와인빛 물을 뿜어내며 축제를 연 일은 그 한 예다. 이 장난은 속임을 넘어, 상상력을 공유하는 사건으로 남는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자리한 우주피스(Užupis)는 매년 4월 1일 일시적 독립을 한다. 1997년 4월 1일에 처음으로 스스로를 독립 공화국이라 선언했다. ‘강 너머’라는 뜻의 이 작은 지역은 한때 가난과 범죄로 얼룩졌으나, 예술가들이 모여들며 전혀 다른 장소로 변모했다. 만우절이라는 기표를 택해 국가의 형식을 빌린 이 선택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제도의 엄숙함을 향한 조용한 질문이다.


이 공동체의 방식은 하킴 베이(Hakim Bey)가 말한 ‘일시적 자율 공간(Temporary Autonomous Zone, TAZ)’을 현실로 드러낸 사례에 가깝다. 국기와 국가, 대통령, 그리고 강 위의 배 한 척으로 이루어진 해군까지 갖추었지만, 이 모든 장치는 권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유희를 향한 장치들이다. 만우절에 선포된 독립은 냉소와 낙관이 겹쳐진 상징으로 남는다. 현실의 국가가 요구하는 의무를 비껴서, 예술적 상상력이 법이 되는 공간을 만든다. 이로써 기존 체계의 허구가 드러난다.


우주피스의 벽에는 23개 언어로 번역된 「우주피스 헌법」이 걸려 있다. “인간은 실수할 권리가 있다”, “개는 개일 권리가 있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 문장들은 생산성과 효율을 강요하는 질서에 균열을 낸다.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적 웃음’은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위계가 멈추고, 불완전함이 권리로 인정된다. 만우절은 더 이상 속임의 날이 아니라, 제도의 거대한 진지함으로부터 벗어나는 통로로 다시 정의된다.


리투아니아의 (Užupis). Ⓒ Getty Image


문화비평의 자리에서 볼 때, 우주피스는 장소를 새롭게 쓰는 방식으로 도시 재생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동시에 예술이 정치에 개입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들은 무거운 구호 대신 익살과 반어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오히려 더 깊은 연대를 만든다. 만우절이라는 장치는 권력이 비판자를 ‘바보’로 규정하기 전에, 스스로 그 가면을 쓰는 전략이 된다. 공격의 방향을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결국 우주피스 공화국은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예술을 통해 자신들만의 중심을 세우는 과정이다. 경계 밖에서 시작된 유희는, 어느 순간 하나의 질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질서는 다시 묻는다. 우리가 믿어온 진지함은 과연 얼마나 견고한가.



거짓의 계절에 비추는 진실의 거울, 만우절의 역설


역사 속에서 만우절은 ‘진실의 상대성’을 조용히 흔들어 온 날이었다. 권위 있는 매체와 정부의 발표마저 한 번 더 의심하게 만드는 틈. 이 작은 균열은 굳어 있던 사회의 긴장을 풀어내는 숨구멍이 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겨울을 건너온 생명이 다시 꿈틀대는 봄의 초입이다. 생동하는 기운 속에서, 인간의 유희적 본능(Homo Ludens)은 억눌린 금기를 넘어 스스로를 드러낸다.


‘탈진실(Post-truth)’이 일상이 된 2026년, 만우절은 다른 무게를 얻는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허구가 현실을 압도하는 시대. 이 날은 더 이상 단순한 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적 성찰의 기념일’에 가깝다. 과거의 만우절이 일상 속 작은 균열이었다면, 지금의 만우절은 거짓이 넘치는 세계 속에서 진실의 자리를 되묻는 거울이 된다.


이 시대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확증편향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만우절은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사실인가?” 단 하루, 대중이 집단적으로 의심을 수행하는 이 의식은 무비판적 수용에 익숙해진 사고에 작은 충격을 준다.


기술에 대한 태도 역시 이 날에 시험대에 오른다. AI의 답변을 신탁(神託, Oracle)처럼 받아들이는 습관 앞에서, 만우절은 다른 목소리를 건넨다. 기술 역시 틀릴 수 있고, 때로는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 인간의 거짓말과 AI의 오류는 닮아 보이지만 근본이 다르다. 그것을 가르는 것은 ‘의도(Intent)’와 ‘맥락(Context)’이다.


만우절의 장난에는 상대를 웃게 하려는 마음이 깃든다. 사회의 통념을 가볍게 비틀며 관계를 흔들고, 다시 잇는다. 그것은 놀이의 영역이다. 반면 AI의 오류는 의도 없는 데이터의 산물이다. 의미를 향하지 않는 계산의 결과다. 이 대비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기계의 오류에 휘둘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해학을 감각하는 주체인가.


모든 것이 가짜일 수 있는 시대, 진실은 오히려 가장 값비싼 자원이 된다. 만우절에 쏟아지는 수많은 허구는, 우리가 의지해 온 사실의 세계가 얼마나 섬세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4월 2일, 다시 맞이하는 평범한 하루는 그 균형의 단단함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오늘의 만우절은 ‘유쾌한 불신’을 제안한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주체를 지키는 태도다. 정보와 기술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서, 한 번 더 묻고 비틀어 보는 힘. 진정한 승자는 남을 잘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속임 속에서도 끝까지 진실의 결을 따라가는 사람일지 모른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리스도의 조롱'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7번 방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 Fra Agelico


성주간(고난주간)과 만우절이 만날 때, 세계는 묘한 긴장 속에 놓인다. 가장 깊은 비극과 가장 가벼운 웃음이 한 자리에 겹친다. 이 낯선 공존은 우리의 삶이 고통과 농담 사이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십자가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듯, 장난 또한 우리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 존재인지 비춘다.


예수의 수난기에는 군병들이 그에게 자줏빛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있다. 잔혹한 ‘모의 대관식’. 거대한 기만의 연출이다. 권위를 희화화하는 만우절의 형식과 이 장면은 묘하게 닮아 있다. 그 유사성은 인간의 잔혹한 유희 본능과,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Fool for Christ)’라는 역설적 개념이 있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코린토 1서 1:25)”고 말한다.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길이 오히려 진리일 수 있다는 고백이다. 예수의 고난은 이 ‘거룩한 바보’의 길을 증언한다. 이 시기의 만우절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어리석은 존재인가, 아니면 진실을 품은 어리석음인가.


결국 만우절은 하나의 거대한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믿어온 시간이 어쩌면 어긋나 있을지 모른다는 깨달음. 성주간의 비극과 새해의 희극이 충돌하며 생긴 이 ‘시간의 균열’은, 인간이 만든 법이 자연과 신의 질서 사이에서 얼마나 위태로운지 드러낸다.


만우절은, 뒤틀린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직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