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하고 무난한 것들의 전성시대
※ 이 글은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07
- '두쫀쿠'의 유행에 붙여
- 스니펫 문화의 등장 배경 및 특징
얼마 전까지 SNS와 뉴스의 표면을 가득 덮고 있던 단어 하나가 있었다. 두쫀쿠. 두바이 쫀득 쿠키라는 이름. 그러나 그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손에 쥐어지는 음식이라기보다, 공기처럼 스쳐 가는 유행에 가까웠다. 두바이라는 낯선 지명은 신비의 외피를 두르고, 쫀득하다는 식감은 익숙한 감각을 비틀었다. 여기에 카다이프라는 생경한 재료가 더해지며, 그것은 마치 요술램프에서 막 꺼내온 선물처럼 도착했다. 맛이 오기 전에, 이야기가 먼저 도착한 셈이다.
식음 문화의 흥망은 낯설지 않다. 2021년을 뜨겁게 통과한 로제 떡볶이 역시 그 흐름 위에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일상을 좁히던 시기, 배달은 삶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서 메뉴는 변주되었고, 취향은 빠르게 증폭되었다.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로제 떡볶이’의 언급이 정점에 닿기까지는 5개월, 그 열기가 절반으로 식는 데는 7개월이 걸렸다. 그때도 이미 ‘반짝 유행’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두쫀쿠의 시간은 더 짧았다. 3주 만에 정점에 닿고, 한 달 사이에 절반으로 식었다. 이것은 단순한 조급함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변해버린 소비의 방식, 그리고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는 공급의 초조함이 맞물린 결과다. 과거의 미식은 시간을 요구했다. 맛과 공간, 분위기를 천천히 받아들이는 완독의 경험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의 소비는 다르다. SNS 인증, 숏폼, 댓글 반응에 맞춰 잘려 나간 장면들. 발췌와 요약의 감각이 중심이 된다.
이제 사람들은 맛을 기억하기보다, 유행에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기록한다. 무엇을 먹었는가보다, 얼마나 빨리 반응했는가가 중요해졌다. 그렇게 음식은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속도의 표면 위를 스쳐 지나간다.
잘려진 세계, 남겨진 욕망
스니펫(Snippet)은 작은 조각을 뜻한다. 프로그래밍에서는 재사용 가능한 코드나 짧은 텍스트를 가리킨다. 복사해 붙여 넣는 코드, 검색 결과의 미리보기, 자동 완성 기능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에서 제목 아래 붙는 짧은 문장, 질문에 대한 핵심 답변을 상단에 바로 제시하는 기능 또한 스니펫이다. 광고에서는 제품의 특징을 간결하게 나열하는 방식으로 변주된다.
이 개념을 문화로 옮기면, 하나의 경향이 드러난다. 핵심만 빠르게 취하고 곧장 공유하는 습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효율을 좇는 감각이다. 본래 단편을 의미하던 이 말은 이제 콘텐츠 소비, 검색, 음악, 개발 전반을 가로지르며 압축된 형태를 가리킨다. 긴 맥락은 지워지고, 요약된 중심만 남는다.
이러한 방식은 이미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구글과 네이버의 추천 스니펫(Featured Snippet)은 사용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링크를 누르지 않아도 된다. 이 구조를 SNS가 끌어와 하나의 문화로 확장했다. 틱톡, 릴스, 유튜브 쇼츠는 긴 영상을 해체하고, 1분 내외의 장면이나 신곡의 핵심 부분만 앞세운다. 관심은 길이가 아니라 응축의 밀도에서 발생한다.
개발자가 필요할 때 불러 쓰던 코드 조각은, 모바일 퍼스트와 IT 기술의 흐름 속에서 마케팅으로 이식되었다. 긴 글 대신 인포그래픽과 카드뉴스가 자리를 차지한다. 문장은 더 짧아지고, 메시지는 더 직접적이 된다. 요약은 선택이 아니라 기본이 된다. 결국 스니펫 문화는 짧고, 핵심적이며, 명확한 정보를 선호하는 시대의 표정이다.
지금의 소비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당장 답을 원한다. 긴 글과 긴 영상은 쉽게 지루해진다. 필요한 부분만 잘라 취하는 습관. 이들은 흔히 빨리감기 세대로 불린다. 시간 대비 효율을 중시하며,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한다. 경험이 빗나가는 순간조차 견디기 어려운 환경, 그것이 이들의 조건이다.
두쫀쿠, 두바이 쫀득 쿠키의 유행은 이 감각 위에서 번졌다.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 반도의 도시 두바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흐름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두바이 초콜릿 열풍에서 파생된 이 현상은 단순한 미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만 카스테라나 탕후루와 달리, 출처가 모호한 생산물이 무한히 복제되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흐릿한 채, 형태만 반복된다. 그것은 최근 AI가 만들어내는 생성물과도 닮아 있다.
이 장면은 소비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감각은 점점 바깥으로 밀려난다. 프랑스의 상황주의 철학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직접적인 경험이 이미지로 대체된 구조로 설명했다. 두바이 쫀득 쿠키 역시 그러하다. 맛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시각적 낯섦이다. 카다이프가 부서지는 소리와 장면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반복되며 가치를 키운다. 사람들은 미각을 음미하기보다, 그 장면을 소유했음을 드러낸다. 소비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이미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개념을 빌리면, 여기서 소비되는 것은 실제 두바이의 맛이 아니다. 미디어가 구성한 두바이성(Dubai-ness)이다. 동일한 맛이나 품질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자극과 두바이라는 이름이 전부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변형된 이 쿠키는 원본 없는 복제가 되어 떠돈다. 이국적 이미지와 화려함, 그리고 한정판이라는 희소성이 결합되며, 현실보다 더 강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욕망은 그 위에서 증폭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조용히 우리의 감각을 대신하고 있다.
진짜의 그림자, 흔들리는 내면의 자리
어떤 시대는 진짜를 갈망한다. 그러나 갈망이 깊어질수록, 질문은 더 또렷해진다. 지금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이 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내면에서 길어 올린 떨림인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표식인지. 창작과 비평 계간지에 실린 성현아의 글 「진정성이라는 대리 물성과 정체성의 딜레마」는 이 물음의 중심으로 우리를 조용히 이끈다.
글은 먼저 진정성의 기원을 짚는다. 진정성은 본래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더라도 ‘참된 자기’를 추구하려는 태도”로 이해되어 왔다(성현아, 「진정성이라는 대리 물성과 정체성의 딜레마」, 창비). 이 정의는 한때 문학이 감당해 온 윤리적 긴장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이 집단의 자리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이동하면서, 진정성은 “텍스트 내부의 문학성에 대한 고집”으로 굳어졌고, 현실과의 접촉은 점차 얇아졌다는 비판을 받았다(같은 글). 세계와 부딪히던 힘은, 어느 순간 세계를 밀어내는 섬세한 막으로 변해 있었다.
이 흐름은 2020년대에 들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보수화된 방향이다.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을 앞세우며, 퀴어·페미니즘과 같은 동시대의 서사를 평가절하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새롭게 부상한 흐름이다. 1인칭의 자기서사와 소수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감정 자체가 진실을 보증하는 근거로 작동”한다(같은 글).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두 경향은 닮아 있다. 진짜를 말하려 하지만, 그 증명의 방식에서 이미 시대의 압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깊은 긴장이 드러난다. 진정성과 정체성의 관계다. 전자는 외부 규범을 밀어내고 내면으로 향하려는 충동에 가깝다. 후자는 사회가 부여한 위치와 이름의 집합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이를 나눌 수 없다. 정체성은 내면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반대로 그 내면은 특정 정체성을 수행하도록 요구받는다. 그 결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더 이상 안쪽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이미 사회의 언어로 번역된 채 우리에게 도착한다.
이 전환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개념이 “대리 물성”이다. 성현아는 오늘날 진정성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소비 가능한 표식”으로 변했다고 말한다(같은 글). 감정은 흘러가기보다 전시되고, 경험은 쌓이기보다 인증된다. SNS라는 공간에서 내면은 끊임없이 외부로 옮겨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느끼기보다 타인의 반응을 통해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복합적인 자아는 단순해지고, 대표 가능한 얼굴만 남는다. 깊이는 사라지고, 선명함이 기준이 된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신 문학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민다. 오늘의 문학은 하나의 진정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 어긋나고 충돌하는 감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체성을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흐르는 관계로, 개인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얽힌 자리로 사유하려는 시도들. 그 속에서 진정성은 단일한 중심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흔들리며 생성되는 상태로 다시 읽힌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쉽게 믿지 못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신 속에서, 그것은 새로운 얼굴을 얻는다. 더 이상 순수한 내면의 증거가 아니라, 세계와의 긴장 속에서 남겨지는 흔적에 가깝다. 그러므로 오늘의 문학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비되며,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다.
그 길은 분명 더디고 불편하다. 그러나 그 더딤 속에서 비로소 묻게 된다. 지금 이 감정은 정말 나의 것인가. 아니면 이미 누군가가 이름 붙인 자리 위에, 내가 뒤늦게 도착한 것인가.
진정성의 표면, 사라지는 예술의 깊이
오늘날 우리는 진정성(Authenticity)이 넘쳐나는 시대를 산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려 하고, 미디어와 자본은 그 욕망을 포착해 진정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품을 쏟아낸다. 그러나 성현아 평론가가 「진정성이라는 대리 물성과 정체성의 딜레마」에서 지적하듯, 2020년대 한국 사회에서 이 개념은 더 이상 내면의 윤리적 나침반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향해 다듬어진 ‘대리 물성’이자, 소비를 위한 ‘인증 마크’에 가까워졌다. 이 변화는 문학을 넘어 영화와 방송, 대중문화 전반에서 예술의 쇠퇴라는 징후로 이어진다.
과거의 진정성이 거대 담론에 맞서 참된 자기를 찾으려는 고독한 싸움이었다면, 지금의 그것은 철저히 개인의 감정과 취향으로 수렴된다. 문제는 이 수렴이 확장이 아니라 단절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성현아가 말한 ‘감정의 물신화’는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지운 채, 지금 느끼는 감정만을 진실로 내세운다. 그 순간 감정은 세계와 이어지는 통로가 아니라, 세계를 밀어내는 벽이 된다.
이 경향은 콘텐츠 소비 방식에서도 선명하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와 드라마는 복잡한 인과를 비추기보다,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에 집중한다. 사이다와 신파가 반복되고, 관객은 자신의 감정을 대신 배출해 줄 장면을 찾는다. 창작자는 그 요구를 따라 익숙한 문법을 복제한다. 여기서 진정성은 나를 얼마나 만족시키는가라는 효용으로 바뀌고, 예술이 지녀야 할 낯선 접촉은 사라진다.
2020년대에 들어 퀴어, 페미니즘, 소수자 서사가 부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흐름 역시 시장과 결합하며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정체성은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이지만, 소비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하나의 기호로 변한다. 삶의 서사는 점차 상품의 외피를 입는다.
성현아는 이를 ‘진정성의 외주화’라 부른다. SNS에서 특정 정체성을 드러내고 소비하며 자신의 각성을 증명하려는 욕망은, 작품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알리바이로 바꾼다. 일종의 인정투쟁의 장으로 변질된다. 미학적 성취보다 무엇을 대표하는지가 앞선다. 그 결과 복합적인 인간은 지워지고, 대표 가능한 얼굴만 남는다. 예술은 인간을 탐구하는 장이 아니라 집단의 입장을 강화하는 도구로 기울 위험을 안는다.
예술이 흔들리는 지점은 이 ‘무난함’이 진정성의 얼굴을 할 때다. 영화 <휴민트>와 <왕이 사는 남자>의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익숙한 문법에 기대는 서사는 현실의 복잡성을 밀어낸다. <왕이 사는 남자>가 천만을 넘어서는 동안, <휴민트>는 조용히 OTT 넷플릭스로 이동했다. 이를 두고 완성도의 문제나 평단과 대중의 괴리로 설명하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무난함을 반복하는 선택이 문제에 가깝다.
<휴민트>의 실패는 복잡하지 않다. 새로움이 없고, 감정은 낡은 신파에 기대 있다. 분단이 만들어낸 또 다른 층위를 탐색하기보다, 익숙한 상상과 반복된 연출에 머문다. ‘뻔한’ 이야기가 습관처럼 이어진다. 특히 역사적 통시성과 지형학적 공시성은 납작하게 눌려 있다. 비극을 다루면서도 그 이면의 모순을 직시하지 못하고, 단순한 대립과 과잉된 감정에 기대는 방식이다. 이 부진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변화한 소비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공급의 한계로 읽힌다.
이러한 콘텐츠는 대중의 감각에 맞춘 포퓰리즘적 진정성을 앞세워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비판적 사유의 공간은 줄어든다. 카이로스(결정적 시간)와 크로노스(물리적 시간)의 구분은 흐려지고, 창작물은 현재의 자극에만 매달린다. 역사적 깊이를 잃은 표현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유행으로 소비되고, 곧 잊힌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거리를 잃고 ‘중우(衆愚)’로 기울 위험에 놓인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성현아는 해답을 관계 속에서 찾는다. 진정성을 고립된 본질이 아니라, 타자와의 충돌 속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제안이다. 진정한 예술은 ‘나는 진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진짜라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 질문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감각이 열린다. 정체성의 모순과 감정의 배치를 드러내는 일. 세계와의 긴장을 끝까지 견디는 태도. 오늘의 예술이 다시 살아나는 길은, 어쩌면 그 느리고 거친 자리 위에 놓여 있다.
늦게 도착한 질문, 지워지는 감각의 자리
문학을 위시한 예술은 늘 유행의 뒤편에 도착한다. 열기가 식고, 발자국만 희미하게 남은 자리에서 비로소 질문을 시작한다. 그 한 박자 늦은 물음이 문학의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학장은 이 느린 호흡을 견디지 못한다. 출판 시장이 속도를 앞세우며, 조급한 숨을 밀어 넣는다. 그 과정에서 먼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비판의 감각이다. 이는 계산의 결과라기보다 두려움을 피하려는 선택에 가깝다. 묵직한 통증 대신, 부드럽고 무난한 정서를 택한다.
지금 우리는 무해함이라는 달콤한 마취를 지나고 있다. 최근 한국 문학의 지형을 채운 것은 타자를 향한 과잉의 친절, 상처를 어루만지는 선량한 연대, 일상의 파편을 복원하는 안정된 서사였다. 이러한 흐름은 독자에게 즉각적인 안도를 제공했고, 독서는 윤리적 자기 확인의 의례로 기울었다. 그러나 묻게 된다. 이 다정한 위로가 진실의 모서리를 둥글게 닳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상처를 다독이는 손길이 많아질수록, 그 상처가 놓인 자리의 결은 멀어진다. 거칠고 비릿한 현실은 서사의 장막 뒤로 물러난다. 우리는 안전한 문장 속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안온함은 세계의 질감을 지워낸다. 다정함이 쌓일수록 현실은 흐릿해지고, 마찰은 사라진다.
이 흐름은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보다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앞서는 환경. 이때 문학 또한 독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의 진실만을 다듬는 서비스로 기울 위험이 있다. 본래 진실은 불편하고 서늘하다. 때로는 파괴적이다. 그러나 많은 서사는 그 날카로움을 완충재로 감싸 전달한다. 독자가 감당해야 할 긴장과 마찰은 미리 제거된다. 연대라는 이름은 넘쳐나지만, 그 기표가 닿아야 할 타자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기표의 안락사’라 부를 만한 장면이다.
지금 우리가 진짜라 부르는 서사 역시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그것은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정교하게 구성된 형식일지도 모른다. 진정성이 소비 가능한 표식으로 변한 시대, 예술의 역할은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표식의 불안정함과 허망함을 드러내는 데 있다.
유행으로 소비되는 콘텐츠는 위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변화를 이끌지는 못한다. 예술이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난한 진정성이라는 안락사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기를 증명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존재의 불안정성과 모순을 직시할 때 비로소 실재의 울림이 돌아온다. 결국 문학과 예술이 서 있어야 할 곳은 진정성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 이름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시 묻는 자리다.
그리고 문화에 예술을 억지로 포섭해 어색한 밴다이어그램을 그리는 정책의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감각의 실패다.
※ 참고문헌
• 성현아, 「진정성이라는 대리 물성과 정체성의 딜레마」, 창비 계간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김성윤 옮김, 현실문화연구, 1996.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1.
• Google Trends, “로제 떡볶이” 검색 트렌드 데이터 (2021년 기준). “두쫀쿠” 검색 트렌드 데이터 (2026년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