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과 이동권 사이, 우리는 무엇을 지불할 준비가 되었는가
※ 이 글은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94
- ‘노인 무임승차’ 논란이 가린 이동권의 본질
- ‘무임승차’ 논란이 드러낸 사회의 계산법
- 9.5%의 효율과 대중교통 개혁의 방향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 (1726) 제3부 ‘라퓨타, 바르니바르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방문기’에는 죽지 않는 존재, 스틀러드블럭(Struldbrugs)이 등장한다. 소인국과 대인국, 라퓨타를 지나 럭낵 왕국에 이른 걸리버는 그들의 소문을 듣는다. 처음에는 그것을 인류가 꿈꾸어 온 축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곧, 그 기대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스틀러드블럭은 매우 드물게 태어난다. 왼쪽 눈썹 위에 붉은 점을 지닌 채 태어나고, 그 표식은 세월과 함께 커지며 검게 굳는다. 죽지 않는다는 징표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늙어간다. 여든이 지나면 법적으로 ‘없는 존재’로 처리된다. 살아 있으나 사회에서 지워진다. 젊은 날의 기억만을 더듬으며, 이후의 시간은 비어 있는 껍질처럼 이어진다.
걸리버가 그리던 모습은 달랐다. 지혜가 쌓이고 역사를 증언하는 존재, 인간의 길을 밝혀 줄 선지자. 그러나 눈앞에 선 현실은 그 반대편에 가까웠다. 서른을 지나며 기운은 기울고, 여든에 이르면 병과 쇠락이 일상을 잠식한다. 그 상태로 끝이 없다. 육체는 자연의 질서를 따르지만, 죽음만이 거부된다. 그 균열 속에서 고통은 오래 머문다.
기억은 쉽게 부서진다. 방금 읽은 문장조차 붙잡지 못한다. 언어의 흐름에서 밀려나,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과도 말이 닿지 않는다. 여든이 되면 재산은 상속되고, 생은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국가가 주는 미미한 연금에 의존하며, 사람들의 시선은 점차 두려움과 혐오로 굳어진다.
그들의 고통은 육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감정의 결이 마르고, 타인을 향한 온기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집요한 생의 고집과 뒤틀린 집착.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도달할 수 없는 안식을 부러워한다. 장례 행렬은 그들에게 하나의 항구다.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하는 곳이다.
스위프트는 이 존재를 통해 묻는다. 죽음 없는 삶은 과연 축복인가. 그는 그 질문을 비틀어, 인간의 욕망이 품은 맹점을 드러낸다. 삶의 의미는 어쩌면 유한함에서 비롯된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오래된 해석을 잠시 흔들어 볼 여지도 남는다. 스틀러드블럭은 정말로 쓸모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들을 그렇게 규정하는 시선이, 더 큰 목소리와 권력의 질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침묵 속에 밀려난 존재들, 그들의 시간은 과연 누구의 기준으로 측정되고 있는가.
9.5%의 효율과 묶인 발걸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출퇴근 피크 시간대 고령층의 지하철 무임승차 제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오래 잠들어 있던 논의가 다시 떠올랐다. 국토교통부 연구에 따르면, 해당 시간대 이용을 조정할 경우 혼잡도는 최대 9.5% 줄어든다. 만차 열차 다섯 대를 보내야 했던 승객이 세 대 안에 탈 수 있는 변화다. 숫자만 보면 분명 효율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9.5%라는 수치는 삶의 무게를 담아내지 못한다. 많은 고령층에게 지하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새벽과 아침, 그들은 저임금 노동과 소액 벌이를 위해 몸을 싣는다. 이들에게 제한은 불편이 아니라 생계의 균열로 이어진다. 작은 이동의 차이가 하루의 수입을 바꾼다.
노인 무임승차제는 1984년 도입 이후 40년을 견뎌온 제도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며 도시철도 재정이 한계에 가까워진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손실액은 7,779억 원에 달한다. 파산 직전의 운영사를 외면할 수는 없다. 혼잡을 줄여야 한다는 요구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적자의 원인을 특정 집단에 돌리는 시선은 오래된 오해에 가깝다. 도시철도의 재정 위기는 단일한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무임승차는 일부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묶여 있던 낮은 운임 체계, 그리고 시간대별 수요의 불균형이 놓여 있다.
현재 운송 원가 대비 운임 수준은 약 60%에 머문다. 승객 한 명을 태울 때마다 약 40%의 손실이 쌓인다. 이는 무임승차가 사라져도 적자가 남는 구조임을 뜻한다. 문제의 중심은 ‘공짜 이용’이 아니라, 오랫동안 조정되지 않은 요금 체계다.
이용 패턴 역시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자가용 의존은 여전히 높다. 특히 낮 시간과 외곽 지역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이 급감한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자가용 수송분담률은 45~50%, 대중교통은 30%대에 머문다. 빈 좌석을 싣고 달리는 시간은 무임승차 때문이 아니라, 도시의 설계 방식이 만든 공백이다.
혼잡도 9.5% 감소는 계산 가능한 결과다. 그러나 이동권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숫자로 환산되기 어렵다. 한국교통연구원은 무임승차로 인한 사회적 편익을 연간 약 3,650억 원으로 추산한다. 우울과 고립의 감소, 복지 지출 절감, 사고 감소. 보이지 않는 이익은 재무제표의 적자를 넘어선다.
이 논의가 늦어진 이유 또한 분명하다. 표심이라는 계산 앞에서 정치는 자주 멈칫했다. 2023년에 이미 보고서가 나왔음에도 이제야 논쟁이 시작된 배경이다. 갈등을 다뤄야 할 자리는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제한이 아니다. 만약 조정이 불가피하다면, 그 시간대에 일터로 향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선별적 바우처, 대체 교통수단 같은 정교한 장치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가장 약한 이들의 이동을 대가로 편의를 얻는 사회에 가까워진다.
이 문제를 세대 간 대결로 좁히는 순간, 해법은 멀어진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비용을 어떻게 나누고, 시스템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다. 40년 된 제도를 손보는 기준은 효율이 아니라 존엄이어야 한다. 결국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누가 공짜로 타는가가 아니라, 왜 많은 사람이 도로로 나서는가. 그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적자는 반복된다.
이 지점에서 룩셈부르크와 독일의 선택은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무료화와 49유로 티켓은 비용 절감이 아니라 이동 전환을 겨냥한 투자였다. 9.5%를 덜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는 대신, 자가용의 절반을 대중교통으로 끌어들이는 방향. 숫자 뒤에 숨은 해법은 그곳에 있다.
무료의 도시와 막힌 길 사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인 룩셈부르크가 과감한 실험을 택했다. 기차와 버스, 트램을 모두 무료로 풀어낸 ‘교통 혁명’이다. 이는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탄소를 줄이고, 멈춰 선 도로를 다시 흐르게 하려는 선택이다. 그러나 이 소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다. 국내에서 이어지는 ‘노인 무임승차 피크 시간 제한’ 논의와 선명하게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의 결정은 대중교통을 공공재로 밀어 올린 결과다. 비용의 문턱을 없애고 자가용 의존을 낮추려는 계산이다. 반면 한국의 논의는 재정의 경계에서 시작된다. 지하철 혼잡을 9.5%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갖지만, 그 이면에는 40년 넘게 유지된 제도를 줄여야 한다는 부담이 놓여 있다.
다만 이 ‘공짜’ 역시 대가를 필요로 한다. 룩셈부르크는 막대한 세금으로 그 비용을 감당한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이용자가 직접 낼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가 나눌 것인가. 이 작은 국가가 무료화를 실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제적 여력과 사회적 합의가 함께 놓여 있다.
우리의 논쟁은 종종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노인 무임승차 문제는 쉽게 세대 갈등으로 번진다. 한쪽은 적자를 말하고, 다른 쪽은 이동권을 말한다. 그 사이에서 ‘공공성’이라는 핵심은 자주 사라진다. 남는 것은 누가 더 손해를 보는가를 둘러싼 거친 언어뿐이다. 이 사례가 남기는 질문은 분명하다. 교통 정책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우선에 둘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혼잡을 줄이기 위해 누군가의 발을 묶는 선택이 효율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그리려는 공동체의 모습인지, 다시 묻게 된다.
지하철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반드시 권리의 축소여야 할까. 인프라를 넓히고, 이동 환경을 바꾸어 흐름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는 없을까. 9.5%의 효율을 얻는 대신, 관계의 온기를 잃는 선택은 피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배제가 아니라 확장이다. 모두가 더 나은 이동을 누리는 길을 찾는 일이다.
도시의 이동을 바꾸는 일은 노선을 늘리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습관을 다시 쓰고, 공간의 의미를 바꾸는 작업이다. MBC 김민욱 기자의 심층 보도 「이동전환」 시리즈는 유럽의 두 나라, 독일과 네덜란드가 어떻게 ‘당근’과 ‘채찍’을 엮어 이 전환을 현실로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먼저 독일은 ‘요금 혁신(당근)’을 선택했다. 한 달 63유로로 전국을 오갈 수 있는 『도이칠란트 티켓』은 이동의 문턱을 크게 낮췄다. 신규 이용자가 최대 25% 늘고, 연간 180만 톤의 온실가스 감축이 기대된다는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는 인프라의 한계도 드러난다. 요금의 변화는 결국 촘촘한 교통망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한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다른 길을 택한다. 주차 공간 1만 면 이상을 줄이고 도로 폭을 좁혔다. 사라진 자리에 나무와 놀이터가 들어선다. 길은 통과의 공간에서 머무는 장소로 바뀐다. 상인들의 우려와 달리 방문객은 오히려 늘었다. 차를 덜 편하게 만드는 일이 사람을 더 편하게 한다는 역설이 현실이 된다.
이 흐름은 한국의 논의를 다시 비춘다. 우리는 여전히 9.5%라는 수치에 머문다. 어떻게 덜 타게 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전면 무료화), 독일(전국 정기권), 네덜란드(주차장 폐쇄)가 보여준 핵심은 하나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전환이다.
기후동행카드 같은 ‘당근’이 등장했지만, 이용 증가는 기대만큼 크지 않다. 수도권을 아우르는 통합 체계의 부재, 여전히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 구조가 그 이유다. 이제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과연 주차장을 줄일 용기가 있는가. 전국 단위 요금 통합을 실현할 의지가 있는가.
이동의 전환은 한 번의 정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타는 일이 이익이 되고, 자가용 이용이 불편해지는 구조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그때 도시는 자동차의 소음 대신 사람들의 ‘헤젤러(Gezellig, 아늑함)’로 채워질 것이다.
정책의 가치를 따질 때, 우리는 숫자 너머를 보아야 한다. 이동권이 확장될 때 줄어드는 우울과 고립, 건강의 회복, 의료비 절감. 이 보이지 않는 이익이야말로 더 큰 계산이다. 이미 유럽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료화와 정기권, 주차장 축소라는 선택은 적자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다시 부른다. 이제 우리 역시 묻는다. 대중교통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답을 미루지 않을 때, 비로소 길은 다시 열릴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 우리가 밀어내는 미래
변화가 거세게 흐르는 시대에도 하나의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큰 변고가 없다면 누구나 늙는다. 노화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조용한 힘이 남기는 흔적이다. 늙어감을 자각하는 순간, 인간은 깊은 고독과 마주한다. 곁에 사람이 많아도 그 감각은 나눠지지 않는다. 한 생의 후반은 오롯이 홀로 건너야 하는 구간이다.
이전 세대에서 노년은 저무는 날을 기다리는 시간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의학의 진보와 저출생의 흐름이 겹치며 기대수명은 길어졌다. 삶의 후반은 더 이상 짧은 여백이 아니다. 성년기의 절반 가까이를 ‘노인’으로 살아가는 시대다. 이는 먼 이야기가 아니라, 곧 닿을 우리의 내일이다.
이미 고령화는 지나갔다. 우리는 ‘고령사회’ 한가운데에 서 있다. 늙음이 지혜로 이어지는지, 혹은 다른 모습으로 기우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계속 살아간다면 누구든 그 문턱에 선다. 치매와 같은 질병 또한 예외가 아니다. MZ든, 이른바 라떼든, 누구도 이 바깥에 있지 않다. 머지않아 가장 큰 사회적 아픔 가운데 하나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살림이 빠듯해질수록 65세 이상 지하철 무료 승차에서 비롯된 ‘노인 연령’ 논쟁이 뜨거워진다. 논의의 출발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폄훼와 차별로 흐르는 순간, 문제는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어느새 노령 세대는 불편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밀려난다.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도 비슷하다. 젊은 세대가 왜 부양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겉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단순하지 않다.
노인 연령을 규정하는 과정부터 이해득실의 셈법으로 채워진다. 60세, 65세라는 숫자 사이에서 실제 삶의 조건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복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계산이 앞선다. 마치 노인들이 다른 세대의 자원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존재처럼 말해진다.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지금의 사회적 기반은 그들의 시간 위에 세워졌다. 복지와 후생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 노동과 저축, 그리고 성실한 조세 부담이 축적되며 현재가 만들어졌다. 젊은 세대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부양한다는 생각은 균형을 잃은 시선이다. 스스로 자라난 존재는 없다. 삶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공허를 견디는 일도 쉽지 않다. 그들이 다음 세대에게서 밀려나는 순간, 어떤 기억은 지워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걸리버 여행기』의 스틀러드블럭은 18세기의 풍자지만, 오늘의 풍경과 겹친다. 특히 빠르게 늙어가는 한국 사회의 불안과 단절이 그 안에 비친다. 다만 시선을 조금 옮겨 볼 필요가 있다.
걸리버가 스틀러드블럭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닮아 있다. 그들이 80세에 법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고 재산을 잃는 설정은, 현대 자본주의가 노인을 ‘생산성이 끝난 존재’로 규정하는 방식과 이어진다. 한국 사회에서도 노인은 종종 성장의 주역에서 ‘부양의 대상’으로 축소된다. 개인의 역사와 지혜는 지워지고, 비용의 항목만 남는다. 이 프레임은 확증편향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며 젊은 세대와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로 고립되는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노년은 뒤로 밀린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감각은 쉽게 낡은 것으로 분류된다. 젊은 세대는 일부 장면만 보고 단절을 확신하고, 노년 또한 이해의 문을 잃는다. 서로를 낯선 존재로 바라보는 장면이 반복된다.
걸리버가 목격한 육체의 쇠락에 대한 혐오는, 오늘의 미적 기준과도 연결된다. 젊음은 선으로, 노화는 극복해야 할 상태로 소비된다. 미디어는 노년을 종종 병이나 추함의 이미지로 그린다. 이러한 시각은 “노년은 비참하다”는 인식을 강화하며,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다.
이러한 시선이 계속될 때, 악순환이 시작된다. 사회가 노인을 고집스럽고 시기심 많은 존재로 규정하면, 그들 역시 고립 속에서 방어적으로 변한다. 단점만을 확대해 바라보는 확증편향은 결국 그들을 더 깊이 밀어 넣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 결과를 다시 근거로 삼는다.
스위프트가 남긴 경고는 단순한 영생의 저주가 아닐지 모른다. 인간을 효율과 외형으로만 재단하는 태도, 그 안에서 사라지는 존엄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의 시선은 노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점점 늙어가는 이방인으로 밀어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스틀러드블럭이다. 노년을 지혜가 아닌 기능의 상실로만 규정하는 한, 그 비극은 반복된다. 우리가 만든 럭낵 왕국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참고 기사
• 곽주영, 「[단독] 李 띄운 '노인 무임승차' 제한…“출퇴근 혼잡 9.5% 감소할 것”」, "중앙일보", 2026.03.31.
• 김민욱, 「[이동전환①] "기차도 버스도 트램도 다 공짜라고?" 파격적인 룩셈부르크의 교통 혁명」, "MBC 뉴스데스크", 2026.03.28.
• 김민욱, 「[이동전환②] 전국 정기권 만든 독일·주차장 없앤 네덜란드‥이동 전환의 '당근'과 '채찍'」, "MBC 뉴스데스크", 2026.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