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인력'으로 치환하는 관료주의의 민낯
※ 이 글은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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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그림자, 창작의 숨을 조르는 것들
예술가와 작가에게 가난은 오래도록 낭만의 언어로 덧칠되어 왔다. 그것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숭고한 예술혼으로 미화되었다. 결핍이 감각을 벼린다는 믿음, 빈곤이야말로 창작의 불씨라는 오래된 서사가 쉽게 소비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결은 전혀 다르다. 가난은 창작을 고양시키는 불꽃이 아니라, 서서히 숨을 죄는 구조적 압박에 가깝다. 예술계에 스며든 에토스(Ethos), 곧 희생을 미덕으로 삼는 관념과 자본주의 사회가 부여하는 낮은 생산성의 낙인이 맞물리며, 이 고단한 상태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많은 예술가가 불안정한 소득 속에서 버틴다.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경우가 절반을 넘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2024 예술인 실태조사 결과(2023년 기준)」는 그 현실을 더욱 선명히 드러낸다. 문학은 연 평균 약 454만 원, 미술은 603만 원, 사진은 334만 원. 숫자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은 결코 가볍지 않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창작은 남는 시간에 겨우 이어진다. 130년 전 고흐가 물감 한 통을 아끼며 그림을 그렸던 장면은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의 예술가 역시 재료비 앞에서 멈추고, 작품이 팔려도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하는 유통 구조 속에서 소진된다.
가난이 예술혼을 일으킨다는 믿음은 결국 오래된 신화에 가깝다. 현대의 현실에서 그것은 창작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예술은 고귀하니 예술가는 궁핍해도 괜찮다는 에토스(Ethos)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착취를 정당화한다. 자본의 기준에서 생산성이 낮다고 분류된 이들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난다. 고립은 깊어지고, 내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균열이 번진다. 그 균열은 작품 이전에 삶을 먼저 흔든다.
따라서 이 상태를 숙명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가난은 예술의 본질이 아니라, 창작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장애물이다. ‘예술인 복지법’과 같은 제도적 시도는 그 인식을 바꾸려는 작은 움직임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일,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에 가깝다. 물론, 어떤 이들은 가난을 황금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로 이해하기도 한다. 염결한 영혼과 진정성을 지키기 위한 거리두기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 거리조차 인간다운 삶을 침식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오늘도 지원과 생계 보조를 둘러싼 정책이 논의되고 실행된다. 여전히 부족하고,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창작을 내려놓았던 이들에게 그것은 다시 펜을 쥐게 하는 가느다란 끈이 된다. 문제는 그 끈이 때로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지원이라는 이름이 모욕으로 변하는 순간, 예술은 또 다른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
가난은 더 이상 미화될 수 없다. 그것은 견뎌야 할 미덕이 아니라, 바꾸어야 할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을 바꾸는 일은, 결국 예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제도의 언어와 현장의 간극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주관하는 ‘문학 상주작가 지원 사업’은, 작가가 도서관과 서점 같은 일상의 공간에 머물며 창작과 지역 프로그램을 함께 이어가도록 돕는 제도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26. 03. 09.)에 실린 「도서관·서점에서 일하며 글쓰는 '문학상주작가' 100명 뽑는다」는, 그 구상을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함께 추진하는 이 사업은 창작의 시간을 지키려는 시도이자, 문학을 삶 가까이 불러들이려는 실험에 가깝다. 작가에게는 안정된 여건을, 시민에게는 생활 공간 안에서 문학을 만나는 기회를 건넨다. 개인의 생계와 지역의 문화가 서로 기대어 서는 구조를 그린다.
지원의 방식은 다소 우회적이다. 대상은 전국의 공공·사립 도서관, 문학관, 서점 등 약 100개소. 작가 개인이 아니라, 그가 머무를 시설을 먼저 선정한다. 각 공간에 한 명씩, 총 100여 명의 상주작가가 배치된다. 약 24억 원 규모의 국고가 투입된다. 정책의 방향은 분명하다.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노동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의지다.
구체적인 조건도 제시된다. 작가 1인당 월 약 240만 원(세전)의 보수가 지급된다. 4대 보험 가입이 필수적으로 보장된다. 주 5일, 40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하되, 주 2일은 재택근무가 허용된다. 창작의 리듬을 존중하려는 장치다. 활동 기간은 약 7개월(2026년 4월 ~ 10월 예정). 이 시간 동안 작가는 공간에 머물며 두 갈래의 일을 맡는다.
하나는 자기 언어를 지키는 일이다. 근무 시간 중 일정 비율을 작품 집필과 창작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언어와 만나는 일이다. 지역 주민과 독자를 대상으로 문학 교육, 낭독회, 작가와의 만남, 글쓰기 수업 등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창작과 소통이 서로를 비추는 구조다.
선발 과정은 두 단계로 나뉜다. 먼저 운영 시설을 공모해 선정하고, 이후 각 시설이 상주작가를 공개 채용한다. 평가의 기준은 단순한 작품 이력에 머물지 않는다. 창작 역량과 더불어, 지역과 호흡하며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본다. 모든 절차는 예술위의 가이드라인 아래 진행된다. 부적절한 채용이나 운영이 확인될 경우, 지원금은 회수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제도는 등단 이후 길어지는 생계의 불안을 덜고, 집필에 몰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동시에 시민들은 가까운 일상 속에서 작가를 만나고, 문학의 결을 체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정책이 공공의 형식을 입는 순간, 처음의 의도는 종종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예전 <가족 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처럼, 출발점의 말은 전달되는 과정에서 점차 변형되고, 끝내 낯선 문장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최근 드러난 운영과 선발 과정의 논란은 그 변형의 징후처럼 보인다. 문학이 머무는 자리는 분명해 보이지만, 그 자리를 둘러싼 공기의 결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제도의 언어와 현장의 현실 사이, 그 미세한 틈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지원의 이름 아래, 무너진 존엄의 순간들
주변의 SNS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이 점점 붉어졌다. 선발 면접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끝내 실태파악 조사로 이어졌다. 전국 100여 곳의 시설에서 진행된 면접 가운데 일부에서, 면접관이 지원 작가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외모를 평가하고, 특정 장르를 낮추어 말하며, 고압적인 태도를 드러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말들은 빠르게 번졌고, 침묵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한겨레 기사 「[단독] 문학 상주작가 면접서 외모 평가 등 '갑질 의혹'…정부, 긴급 조사」, (2026. 04. 08. 보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가 주관하는 '문학 상주작가 지원 사업'의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정부의 긴급 실태조사 착수 소식을 전한다.
최근 보도를 통해 확인된 ‘문학 상주작가 지원 사업’의 면접 현장은, 우리 사회가 예술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창작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제도가, 정작 그 자리에서는 예술가를 행정의 부속이나 평가의 대상으로만 다루었다는 사실. 그 간극은 작지 않다. 오히려 깊고 날카롭다.
기사에 따르면 일부 면접관은 지원자에게 외모에 대한 평가를 거리낌 없이 던졌고, 특정 장르를 폄하하는 발언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실수나 압박 면접의 범주로 설명하기 어렵다. 창작자의 고유한 세계를 존중해야 할 공적 자리에서, 작가를 채용 시장의 을(乙)로만 규정한 결과에 가깝다. 권력의 비대칭이 낳은 폭력이다. 이러한 장면은 낯설지 않다. 문학과 예술의 현장에는 오래전부터 비슷한 구조가 반복되어 왔다. 출판권 설정 계약을 떠올리면 더욱 분명해진다. 출판사는 갑(甲)에 서고, 작가는 늘 을병정(乙丙丁)의 자리로 밀린다.
창작 지원 사업의 핵심은 정신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작가를 도서관이나 서점의 활성화를 위한 기능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벤트를 기획하고 민원을 응대하는 역할로 환원된 순간, 창작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제도의 편의와 관리의 언어뿐이다.
정부는 월 240만 원의 급여와 주 2일 재택근무라는 조건을 내세운다. 표면적으로는 개선된 처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작이 모욕으로 얼룩진다면, 그것은 지원이 아니라 시혜(施惠)에 머문다. 도움의 이름으로 주어졌지만, 받는 이의 존엄을 흔드는 방식이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작가 지원은 선택적으로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공동의 문화적 자산을 위한 투자에 가깝다. 국민의 세금이 스며 있는 자리라면 더욱 그렇다. 예술위가 뒤늦게 700여 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에 나선 일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조치는 이미 지나간 장면을 되짚는 일에 가깝다.
면접관 구성의 전문성 부족, 그리고 이를 보완할 기준의 부재는 공공예술 지원 체계의 취약한 지점을 드러냈다. 이는 특정 사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각종 공모와 선정 과정 전반에서, 평가 주체의 역량과 태도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의 가능성을 가늠한다는 명목 아래 이루어진 무례는, 결국 창작의 뿌리를 흔든다. 한국 문학을 지탱하는 이들의 자존감이 그 자리에서 꺾였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만남의 자리에서 무너진 언어, 문학이 견디는 균열
문학 상주작가 제도는 작가와 지역 주민이 서로를 마주하는 드문 통로다. 그러나 그 통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면접장에서 장르 비하를 마주하는 현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작부터 훼손된 자리에서, 과연 어떤 살아 있는 프로그램이 태어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장르를 낮추어 보는 시선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오른 낡은 오류에 가깝다. 한때 주변에 머물던 장르 문학이 시간이 흐른 뒤 고전으로 남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다.
문학은 효율의 계산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작가는 기관의 요구에 맞춰 조립되는 부품이 아니다. 이번 논란은 몇몇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기 어렵다. 오히려 예술의 공공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 그 근본을 다시 묻게 만든다.
논란의 시작은 조용했다. 올해 문학 상주작가 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이들이, 면접 과정에서 겪은 경험을 SNS에 남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외모를 평가하는 발언, 동화 등 특정 장르를 낮추는 말들이 오갔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지원자의 역량이나 프로그램 기획을 묻기보다, 상대를 위축시키는 질문이 반복되었다는 이야기 또한 적지 않았다. 말의 방향은 평가가 아니라 압박에 가까웠다.
한 작가는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서의 경력과 지역 문화기획 경험을 제시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너무나 훌륭한 이력’이라는 반어적 폄훼였다고 전한다. 존중이 자리해야 할 대화의 순간이, 오히려 거리를 벌리는 장면으로 변했다. 협력의 파트너가 아니라 기관 운영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 취급받았다는 인식이 그 안에 남았다. 나이와 사회 경험이 많은 지원자를 드러내고 기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증언도 이어진다.
이에 대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26년 4월 7일,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현장의 실태를 파악하겠다는 조치다. 만약 기사와 SNS에 드러난 경험들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는 공공 문화지원사업 전반의 신뢰를 흔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면접 방식과 절차를 근본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점검이 형식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논란이 확산되자 예술위는 곧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올해 지원자 700여 명 전원을 대상으로, 2026년 4월 7일부터 10일까지 온라인 설문을 진행한다. 지원과 전형 과정에서 겪은 부당한 사례를 수집하고, 면접 과정의 인권 침해 여부와 불공정 행위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예술위는 결과를 바탕으로 문제가 드러난 기관에 조치를 취하고, 면접관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며, 심사위원 구성 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재발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단순한 수습으로 끝난다면, 남는 것은 또 다른 침묵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보다 분명하다. 면접 위원의 인권 감수성을 점검하는 구조를 마련하고, 작가를 노동자이자 창작자로 동시에 존중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불쾌한 골짜기 속으로 밀어 넣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지원이라 부를 수 없다. 우리는 예술을 베푸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대신,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공존을 배워야 할 시간에 서 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