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화를 채점 하는 일의 무용
※ 이 글은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13
- 가난이라는 렌즈, 문학이라는 이름의 자리
(1편에 이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가 주관하는 '문학 상주작가 지원 사업'은 매해 공모를 통해 작가를 선정하고, 일정 기간 안정된 창작 환경과 임금을 제공하는 제도다. 제도의 취지는 분명하다. 흔들리는 삶의 조건 속에서도 글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2026년 사업에는 총 171건이 접수되었고, 이 가운데 98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약 2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으며, 경쟁률은 1.75대 1에 머물렀다. 이 수치는 단순한 결과를 넘어, 이 사업이 얼마나 널리 알려졌는지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닿지 못한 이름들, 미처 도달하지 못한 문장들이 있었을 가능성을 지운 채로, 결과만이 조용히 남아 있다.
초연결 사회라 불리는 지금, 정보는 빠르게 흐르고 쉽게 퍼진다. 그 흐름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안내가 이루어졌다면, 더 많은 시선과 참여가 뒤따랐을 터다. 그리고 그 축적된 관심은, 심사와 집행의 과정에 한층 더 깊은 긴장과 책임을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제도는 단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감시되고 질문받을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업에 명시된 '문학'이라는 이름이 어디까지를 포괄하는가에 있다. 무엇을 문학이라 부를 것인가. 이 오래된 물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출판물이 넘쳐나는 시대, 수많은 텍스트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흐름 속에서, 정작 문학의 깊이를 붙드는 이들은 점점 더 외로운 자리로 밀려난다. 풍요의 표면 아래, 창작의 기반은 오히려 얇아진다.
문학의 역사에서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가장 낮은 자리로 밀어 넣어, 끝내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투명한 렌즈였다. 작가에게 가난은 경제적 빈곤을 넘어선다. 그것은 세계의 빛나는 외피를 벗기고, 그 아래 숨겨진 거칠고도 적나라한 진실을 보게 하는 경험이다. 축복과 저주가 뒤엉킨 채, 창작의 가장 깊은 층위를 흔드는 힘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이 제도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지금, 그 이름은 얼마나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가.
결핍의 깊이에서, 문학은 어떻게 빛나는가
소설가 김승옥은 그의 산문에서 "가난은 한 사람의 자존심을 깎아 먹는 가장 무서운 벌레"라고 적었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삶의 가장 은밀한 균열을 드러낸다. 가난은 결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 앞에 서는 방식,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흔드는 상태다.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가 서서히 침식되는 시간, 그 길고 조용한 붕괴의 과정이 바로 가난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마르멜라도프는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극심한 가난(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은 죄입니다"라고 외친다. 이 절규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밀려나는 경계에서 터져 나온다. 그는 삶의 바깥으로 밀려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지, 그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작가 자신이 빚과 궁핍 속에서 문장을 이어갔기에, 그 문장에는 허기와 수치가 배어 있다. 말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끝내 가라앉지 않는 긴장이 흐른다.
프란츠 카프카에게 가난은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그는 그것을 창작을 지키기 위한 고립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문학은 죽음을 향한 도약"이라는 그의 말은, 삶의 안온함이 때로는 시야를 흐릴 수 있다는 경계로 읽힌다. 그러나 이 태도 뒤에는 쉽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 놓여 있다.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벗어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결단에 가깝다. 예술적 순수라는 이름 아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시인 신경림은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이 문제를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건드린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이 물음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억눌리고 왜곡되는지를 드러낸다. 사랑조차 온전히 품지 못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가난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문학은 이 지점에서 미화를 거부한다. 대신, 무너지지 않으려는 마음의 마지막 결을 더듬는다.
오늘의 전업 작가들에게 가난은 과거의 결핍과는 다른 형태로 스며든다. 그것은 굶주림보다, 비교와 소외의 감각에 가깝다. 시장이 모든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는 시대, 팔리지 않는 문장을 쓴다는 일은 종종 무능으로 오해된다. 박완서는 생전에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 고백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궁핍은 때로, 진실보다 안전한 선택을 부추긴다. 그 미세한 흔들림 속에서, 문장은 방향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문학은 가난을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못한 것들에 이름을 부여한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어두운 골목에서 '악의 꽃'을 길어 올렸듯, 작가는 결핍의 깊이에서 인간의 가장 오래된 감정을 끌어낸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남는다.
결국 이 관계는 하나의 역설로 남는다. 비어 있음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결핍이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힘이 된다. 몸은 흔들리지만, 시선은 오히려 더 멀리 닿는다. 그 거리 위에서, 작가는 오늘도 문장을 붙든다.
"작가는 사회의 고통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가난은 나에게 인간의 품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가르쳐준 가장 혹독한 스승이었다."
- 위화, 『우리는 매일 슬픔을 견디며 산다』 중
풍요의 표면 아래, 가난한 문장의 자리
오늘날 한국의 전업 문학작가들은 기술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궁핍한 예술가라는 역설 위에 서 있다. 바깥은 눈부시게 확장되었지만, 그 안에서 문장을 붙드는 삶은 오히려 더 좁아졌다.
2024년 말부터 2025년 초까지 진행된 '2024 예술인 실태조사'는 그 현실을 수치로 드러낸다. 2023년 기준 국내 예술인의 평균 연소득은 1,055만 원. 국민 1인당 평균 연소득 2,554만 원의 41.3%에 머문다. 이 격차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어디에 쓰고,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분야별 간극은 더 크다. 건축은 4,261만 원, 만화/웹툰은 2,684만 원, 방송·연예는 2,485만 원 수준이다. 반면 문학은 454만 원에 머문다. 사진(334만 원)과 함께, 창작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영역에 놓여 있다. 예술인의 75.7%가 월 100만 원 미만의 소득에 머무르고, 31%는 창작으로 얻는 수입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지속될 수 없는 삶의 구조를 가리킨다.
전업 작가의 비중은 약 52.5%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원치 않는 일을 병행한다. 글을 쓰기 위해 다른 노동을 감내하는 역설적 삶이다. 65.5%가 창작을 멈추거나 포기하는 이유로 수입 부족을 꼽는다. 그 배경에는 불안정한 계약 구조가 놓여 있다. 서면 계약은 86.6%까지 늘었지만, 여전히 구두 계약이 남아 있고, 수익 배분의 지연과 제한 같은 관행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저작권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얻는 비율은 29.1%에 그친다. 대부분의 순수문학 작가는 인세보다 원고료나 공공 지원금에 의존한다. 한편, 만화와 웹소설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억대 수입을 올리는 사례가 매체를 통해 반복되면서, 창작의 현실은 왜곡된 기대와 함께 소비된다. 웹툰과 웹소설은 산업으로 자리 잡아 평균 2,000만 원대 소득을 형성하지만, 종이책 중심의 순수문학은 점점 고립된다. 같은 언어를 다루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듯한 풍경이다.
문학은 사회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언어의 원형을 지키는 자리다. 그러나 작가의 연봉이 454만 원에 머문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를 정당하게 나누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문학은 소비되지만, 그 생산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 일시적인 지원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표준계약서의 실질적 적용, 공공 대출권(Public Lending Right) 도입에 대한 논의, 그리고 작가가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 문학이 계속해서 배고픈 이들의 몫으로 남는다면, 그 사회의 이야기 역시 점점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현대 교회의 사목헌장」(1962)은 극도의 궁핍에 처한 이가 타인의 재산에서 필요한 것을 취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우리’라는 범주를 다시 생각하면 낯설지 않다. 이 세계의 재화는 본디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부는 홀로 형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타인의 노동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공동의 기반을 인정하지 않고, 궁핍한 이들을 외면하는 일은 결국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자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 의무를 자주 잊는다.
문화와 예술은 흔히 비생산적인 영역으로 오해된다. 특히 순수문학은 수익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외면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자본과 효율의 정점이라 불리는 AI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가장 먼저 창작자의 자리를 흉내 낸다. 이미지를 만들고 문장을 생산한다. 그것은 SNS와 온라인 공간을 넘어 출판의 영역까지 빠르게 스며든다.
겉으로는 예술의 위기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 형식을 모방하는 이중의 태도다. 그 결과, 'AI쓰레기'라 불리는 미완의 결과물이 범람한다. 그것은 다시 데이터가 되어 학습되고, 표현의 밀도를 점차 낮춘다. 이 흐름의 바닥에는 문화와 예술을 산업의 논리로만 환산하려는 빈약한 사유가 놓여 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감각과 깊이가 지워진다.
문학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회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기억하며, 어떤 언어로 스스로를 설명하는지를 결정한다. 그 보이지 않는 층위를 외면하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의 깊이를 잃는다. 풍요는 남지만, 그것을 해석할 문장이 사라진다.
비워 둔 자리에서, 문화는 숨을 쉰다
얼마 전 우치다 다쓰루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읽었다. 길 위의 철학자이자 장서가, 그리고 오래 읽고 오래 쓰는 사람인 그가 붙인 제목은 단순한 역설이 아니다. 첫 글이자 표제작인 짧은 에세이는 어느 지방 공공도서관 사서들의 연례 총회에서 이루어진 강연을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규슈의 한 시립도서관이다.
그곳은 ‘효율 개선’을 이유로 민간에 위탁되었다. 운영을 맡은 주체는 향토자료를 정리한다는 명분 아래 폐기하고, 대신 자신이 보유한 고서 재고로 서가를 채웠다. 공간에는 카페가 들어섰고, ‘고객 만족’을 앞세운 마케팅이 도입되었다. 방문객은 두 배로 늘었다. 행정은 성과를 자랑했고, 언론은 이를 성공 사례로 호명했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방문자 수가 늘었다는 사실이, 그 공간의 가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대출 권수와 만족도의 수치가 도서관의 존재 이유를 대신할 수 있는가.
기업의 영역에서 효율은 곧 이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화의 장에서는 다른 계산이 필요하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가치,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의미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수요와 공급만으로 판단할 때, 문화는 쉽게 축소된다. 이미 폐기된 향토자료는 어떤 지표로도 복원할 수 없다. 그 상실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우치다 다쓰루는 그 지점에서 말을 멈추지 않는다.
“도서관은 보통의 ‘점포’와는 다른 공간입니다. ‘도서관 방문자 수가 두 배 늘었으니 도서관의 사회적 유용성이 두 배가 되었다’는 단순한 추론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솔직히 말해서 도서관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우치다 다쓰루 지음 / 박동섭 옮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책과 문화는 효율이라는 기준에 묶이는 순간, 본래의 자리를 잃는다.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순간, 존재의 이유는 오히려 흐려진다. 정권 초기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 또한 이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예술계는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었고, 산업과 경영의 언어에 익숙한 이들은 조심스러운 기대를 내비쳤다. 그 사이에서 언론과 정치의 판단은 흔들렸다.
공공의 역할은 간이역에 멈추는 완행열차를 닮아 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열차는 속도를 늦추고 선다. 기관사는 이를 의무로 받아들인다.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정차는 반복된다. 아무도 타지 않는 날에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중교통 역시 이 원리에 기대어 운영된다. 효율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류장을 지나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치다 다쓰루는 “초월적인 것, 외부적인 것, 미지의 것을 어떤 장소에 불러오려면 그곳을 비워 둘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빈자리 없는 공간, 공석 없이 팔린 좌석,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친다. 비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낯선 것이 들어올 틈이 없다. 결국 감각은 좁아지고, 이해의 폭도 줄어든다.
이 문제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인문학적 리터러시에 대한 결핍의 문제다. 그것은 특정 계층에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라, 오히려 정책을 설계하고 사회를 해석하는 이들에게 더 절실하다. 세계를 수치로만 읽는 시선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반복해서 지워낸다.
교회와 성당, 법당의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은 늘 비어 있다. 그 빈 곳은 채워지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초월적인 것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인간이 스스로를 낮추는 형식이다. 그 비움이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머문다.
나 역시 우치다 다쓰루의 문장을 빌려 말하고 싶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스쳐 듣기라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산업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가 빠르게 회전하는 상품으로 변할 때, 대출이 적은 책은 곧장 시장에서 밀려난다. 존재 이유를 묻지 못한 채,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들은 아직 모른다. 인간이 책을 읽는 일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음악을 나누는 시간이 계산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 편의 그림 앞에 서는 일이, 조용하지만 깊은 윤리의 감각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비워 둔 자리에서, 문화는 비로소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