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디어 생태계에서 조롱이 기본값이 되기까지
※ 오늘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254
- 조롱(嘲弄)의 심연과 그 서사적 궤적
- 비틀린 웃음의 미학, 언어의 감옥
- 조롱·해학·풍자, 그 경계와 오인에 대하여
인간의 감정 체계에서 웃음은 흔히 정화와 연대의 징표로 호명된다. 그러나 그 밝은 표면 아래에는, 타자를 겨누는 차가운 칼날 같은 웃음이 잠복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조롱(嘲弄)이라 부른다. 이 웃음은 단순한 유머나 해학과는 결이 다르다. 해학이 동일한 지평 위에서 서로를 향해 열리는 공감의 몸짓이라면, 조롱은 위계 속에서 아래를 향해 낙하하는 시선의 폭력이다. 그것은 타자를 깎아내리는 행위이기 이전에, 이미 낮추어진 존재를 더욱 평평하게 눌러버리는 감각의 작동에 가깝다.
미학의 층위에서 이 웃음은 대상을 물신화한다. 인격의 결을 지워버린 자리에서, 균열은 더 깊이 파이고, 그 틈새에서 파괴적 쾌감이 번져 나온다. 살아 있는 존재는 점차 사물로 응고되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시선은 자신이 남긴 상처를 인식하지 못한 채 가벼워진다.
‘조롱’이라는 한자어의 결은 그 잔혹한 본질을 또렷이 드러낸다. 비웃을 조(嘲)는 입 구(口)와 아침 조(朝)가 결합한 형태다. 본래는 새가 아침마다 지저귀는 소리를 형상화했으나, 인간의 언어로 건너오며 타인을 향해 흘려보내는 말의 가벼움, 경멸의 발화로 굳어졌다. 입술은 더 이상 생명의 울림을 전하는 기관이 아니라, 타자를 소모하는 얇은 표면이 된다.
희롱할 롱(弄)은 더욱 노골적이다. 두 손으로 옥(玉)을 받들어 만지작거리는 형상. 귀한 것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즐기는 그 장면이 인간 관계로 치환되는 순간, 대상은 주체를 잃고 장난감으로 전락한다. 손 안에 놓인 것은 더 이상 타인의 삶이 아니라, 마음대로 굴려도 되는 무게 없는 물건에 가깝다. 조롱의 어원은 이미 이 전제를 품고 있다. 타자를 의지 없는 사물로 치환하고, 언어로 그것을 희롱하는 행위.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저서 『웃음』에서 웃음의 사회적 기능을 “기계적인 것이 생생한 삶 위에 덧씌워질 때 발생하는 사회적 교정”이라 말했다. 이 정의는 조롱의 어두운 핵심을 비춘다. 여기서 웃음은 교정의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기계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조롱은 살아 있는 것을 굳히고, 움직이는 감각을 정지시킨다. 그것은 타자를 고정된 형태로 박제하려는 미학적 폭력이다.
결국 이 웃음은 관계를 닫는다. 공명 대신 단절을, 교감 대신 침묵을 남긴다. 웃음이 더 이상 함께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밀어내며 혼자 울리는 메아리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이면의 냉기를 감지하게 된다.
웃음의 방향, 위계의 기울기 위에서
문화사의 결을 따라가면, 조롱은 때로 아래에서 위를 겨누는 드문 무기였다. 억눌린 이들이 손에 쥘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언어. 한국의 전통 가면극인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희롱하는 장면은 단순한 모욕에 머물지 않는다. 견고해 보이던 신분의 질서에 금을 내고, 권위의 허세를 군중 앞에 드러내며, 잠시나마 숨을 돌릴 틈을 만든다. 웃음은 그 순간, 억압을 비트는 미세한 균열로 작동한다.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말한 '카니발적 세계관'에서, 웃음은 성스러움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높은 것을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는 생동의 힘이었다. 그것은 파괴이면서 동시에 재배치의 에너지다.
그러나 지금, 이 힘은 방향을 잃은 채 흩어져 있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영화 <조커> (토드 필립스, 2019)는 그 균열이 어떻게 비틀려 돌아오는지를 보여준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무심한 시선과 냉담한 웃음 속에서 점차 무너진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은 더 이상 관계의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고립된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에 가깝다. 끝내 그는 자신을 조롱하던 세계를 향해 되돌려 웃는다. 그 순간의 웃음은 해방이 아니라, 공감이 사라진 자리에서 울리는 괴물의 비명으로 남는다.
웃음에는 방향이 있다. 누가 웃고, 누가 그 대상이 되며, 그 궤적이 어디로 향하는가. 이 세 갈래를 따라가면, 우리가 한데 묶어 부르던 조롱, 해학, 풍자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된다. 경계가 흐려질수록 먼저 지워지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위치에 선 이들의 존엄이다.
풍자(satire)는 오래된 형식이다. 권력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 그 궤도는 위를 향해야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소인들의 전쟁 놀이를 묘사했을 때, 비웃음의 끝은 정치적 허영과 전쟁의 어리석음에 닿아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 기계에 휩쓸리는 노동자의 몸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질 때, 그 장면은 체제를 겨눈 고발이었다. 채플린의 카메라는 늘 구조를 향한다.
"풍자는 권력을 향해 던지는 돌이어야 한다. 그 돌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풍자가 아니다."
해학(humor with pathos)은 다른 결을 지닌다. 삶의 금 간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으려는 몸짓. 박경리의 『토지』 속 인물들이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농담을 잃지 않는 장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반지하 가족이 냄새와 계단의 높이를 웃음으로 견뎌내는 순간—그 웃음은 타인을 밀어내지 않는다. 가르치지도 않는다. 함께 아파하며, 같은 높이에서 숨을 나눈다. 핵심은 공감이며, 거리두기의 부재다.
그렇다면 조롱(mockery)은 어디에 서 있는가. 그것은 대상을 낮추는 행위다. 언제나 악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오만한 권력의 민낯을 드러낼 때, 그것은 가장 예리한 풍자의 형태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힘이 아래로 흐를 때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중심이 주변을 향해 웃는 순간—그것을 해학이나 풍자라 부르는 언어는 곧 폭력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한국 예능의 궤적을 돌아보면 이 전락은 또렷하다. 2000년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장애, 외모, 출신 지역, 성별을 웃음의 재료로 삼아왔다. ‘친근한 놀림’, ‘웃자고 하는 소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웃음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분명한 기울기가 존재했다. 그 기울기 앞에서 당사자들이 실제로 웃었는지 묻는 질문은 오래도록 지워져 있었다.
""같이 웃자"는 말은 '나는 웃고 있다'의 확인이지, '당신도 웃을 수 있다'는 보장이 아니다."
영화는 이 문제를 더욱 섬세하게 드러낸다.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은 기후위기를 외면하는 미디어와 정치 시스템을 겨눈 냉소적 풍자다. 그러나 같은 코미디 전통 안에서 흑인 캐릭터의 말투나 이민자의 억양을 웃음으로 소비해온 관습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두 경우 모두 같은 장르로 묶이지만, 그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구조를 겨누고, 다른 하나는 구조 속 가장 취약한 지점을 반복해 타격한다.
국내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봉준호의 <괴물>은 국가의 무능과 외부 권력의 오만을 겨냥한다. 그 조롱은 시스템의 모순을 향한다. 반면 동시대의 많은 콘텐츠에서 ‘병맛 유머’나 ‘현실 반영’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 지방 출신, 비정규직 캐릭터의 결핍이 반복적으로 소비될 때—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재연이며, 결국 강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이 웃음은 누구의 것인가, 그 물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태도다. 풍자는 피해자가 없는 웃음을 지향한다. 해학은 상처를 함께 짊어진 자리에서 피어난다. 그러나 위계에 기대는 웃음은 언제나 누군가를 소모한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그 소모가 가벼운 농담 뒤에 숨을 때다.
웃음은 가볍지 않다. 가장 섬세하고도 날 선 도구다. 그것이 겨누는 방향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웃는 동안 이미 한 편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웃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조롱이 디폴트가 된 시대를 통과하는 법
지금 한국의 미디어를 관통하는 정서를 하나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조롱에 가깝다. 유튜브의 화면을 열면 장르의 경계는 빠르게 무너진다. 정치 채널이든 예능 클립이든 스포츠 하이라이트든, 그 아래 흐르는 감정의 문법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누군가의 실수와 실패, 말의 꼬임과 표정의 빈틈이 포착되고, 잘게 편집되어 반복된다. 그 장면 위로 집단적 웃음이 얹힌다. 문제는 그 웃음의 방향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흐릿함이야말로 지금 가장 또렷하게 응시해야 할 지점이다.
이 현상은 정치 콘텐츠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과 최욱의 <매불쇼>는 진보 진영 미디어 생태계에서 거대한 축을 이룬다. 두 채널 모두 스스로를 정론 저널리즘의 계보 위에 놓는다. 레거시 미디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는 자의식, 권력을 감시하는 위치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화면을 지배하는 정서는 다른 층위에서 움직인다. 상대 진영의 실책 앞에서 터지는 웃음, 특정 발언을 잘라 반복 재생하며 증폭되는 냉소, 스튜디오를 채우는 가벼운 파열음. 그 웃음은 단순한 반응을 넘어 하나의 의례로 기능한다. 그것은 ‘우리는 옳다’는 확신을 서로 확인하는 방식이다.
"풍자는 권력의 구조를 겨냥한다. 조롱은 특정한 인물의 얼굴을 겨냥한다. 이 둘을 혼동하면, 정치적 쾌감이 비판적 사유를 대체하는 순간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풍자는 구조를 향한다. 시스템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드러내며, 본질적으로 위를 겨눈다. 반면 조롱은 개인의 표면에 머문다. 말투, 표정, 실수와 같은 취약한 지점을 확대해 소비한다. 진보 유튜브가 자신의 방식을 권력 감시라 부를 때, 그 언어는 재검토를 요구한다. 과연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가. 원인을 파고드는가, 혹은 결과를 소비하는가. 형식이 사유를 압도하는 순간, 정치 콘텐츠는 저널리즘의 자리에서 미끄러진다.
더 깊은 문제는 이 감정 구조가 진영 논리와 결합하는 방식이다. 자기 편의 실책에는 맥락이 요청되고, 상대의 실책에는 웃음이 먼저 도착한다. 이 비대칭은 조롱을 풍자로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의 웃음은 정당하다’는 감각이 굳어질수록, 비판은 감정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매회 콘텐츠를 통해 재생산된다.
이 흐름은 레거시 미디어로 스며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밀려 들어왔다. <1박 2일>, <런닝맨>, <놀면 뭐하니>와 같은 프로그램은 출연자 사이의 위계적 놀림과 약점의 반복적 호출을 기본 문법으로 삼는다. 캐릭터는 점차 고정된다. 누군가는 당하는 위치에 머물고, 누군가는 그것을 지적하는 위치에 선다. 이 반복은 관계의 형식으로 학습된다. 웃음은 점점 구조를 닮는다.
"유재석이 "국민 MC"로 불리는 동안, 그의 진행 방식 안에 내장된 조롱의 문법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정상화되었다. 누가 조롱받고 있는지는 묻지 않은 채."
유재석의 경우는 이 문제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오랜 시간 축적된 신뢰와 이미지가 그의 진행을 보호해왔다. 따뜻한 진행자라는 서사는 강력하다. 그러나 그 안에 작동하는 방식은 별도의 검토를 필요로 한다. 출연자의 약점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는 장면, 특정 인물을 ‘당하는 역할’로 고정하는 구조, 실수를 강조하는 편집의 리듬. 이 모든 요소가 웃음을 구성해왔다. 그리고 ‘유재석이니까 괜찮다’는 인식은 그 웃음을 무해한 것으로 변환한다. 이는 결국 조롱이 해학으로 포장되는 과정이며, 신뢰 자본이 감정의 성격을 바꾸는 사례다.
레거시 미디어는 여전히 자신을 구분 짓는다. 방송 심의, 편성 책임, 공익성이라는 언어가 방어선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감정의 문법이 동일하다면, 플랫폼의 차이는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더 넓은 범위에서, 더 안정된 형식으로 그 문법을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책임은 더 무겁다.
지금 이 환경이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타인의 실패를 바라보며 웃는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감각. 그 웃음을 정치적 각성이나 예능적 즐거움으로 포장하는 기술. 이 반복 속에서 자라는 것은 사유가 아니라 반응이다. 풍자는 세계를 바꾸려는 의지에서 비롯되고, 해학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위치를 전제한다. 누군가를 아래에 두려는 욕망, 그 단순한 기울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이미 웃고 있다. 문제는 그 웃음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웃음을 멈추는 일이 아니라, 그 방향을 되묻는 일이다.
불편함은 비평이 아니다 — 조롱의 시대를 응시하는 법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 조롱은 ‘밈(Meme)’과 결합하며 전례 없는 확산력을 얻었다.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이루어지는 이 행위는 대상의 맥락을 지워버린다. 남는 것은 단 하나의 이미지, 조롱되기 위해 추출된 장면뿐이다. 잘려나간 순간은 반복되고, 반복은 의미를 고정한다. 그 과정에서 대상은 점점 납작해진다. 복잡한 삶은 사라지고, 웃음에 적합한 표면만 남는다. 이 장면은 고대 로마의 경기장을 떠올리게 한다. 검투사의 운명을 지켜보며 엄지손가락을 내리던 군중의 제스처. 타자를 완전히 타자화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려는 오래된 심리. 디지털은 그것을 더 빠르고, 더 가볍게 재현한다.
미학의 층위에서 이는 추(醜)의 극단으로 기운다. 아름다움이 조화와 균형을 향한다면, 이 웃음은 균열과 일그러짐을 확대한다. 그러나 그 강조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조롱하는 시선 또한 같은 궤도를 따라 미끄러진다. 니체의 말처럼, 심연을 오래 들여다본 자는 그 심연의 형상을 닮아간다. 타인을 사물로 환원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을 같은 자리로 끌어내린다. 웃음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타자의 불행을 재료로 삼는 이 연금술은 황금에 이르지 못한다. 남는 것은 차갑게 식은 냉소, 비어 있는 울림뿐이다.
결국 이 방식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두고, 약점을 포착해 소비하는 태도. 그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높이를 포기한다. 진정한 유머는 자신을 향한 시선에서 출발한다. 자조를 통과해 연민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타자와 같은 높이에 선다. 그러나 오만한 조롱은 언제나 바깥을 향한다. 타인의 결핍만을 가리키고, 자신의 균열에는 눈을 감는다. 문화사 속에서 권력을 흔들던 도구로서의 시간은 점차 희미해지고, 이제는 약자를 향해 되돌아오는 왜곡된 형식만이 두드러진다.
이 비틀린 미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선의 전환이다. 조롱의 빠른 반응을 멈추고, 응시의 느린 호흡을 회복하는 일. 그 자리에 공감의 문법을 다시 놓는 일. 웃음이 더 이상 타자를 베는 칼날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온기로 남을 때—그때 비로소 인간은 ‘유희적 인간(Homo Ludens)’이라는 이름에 다가간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다. 김어준, 최욱, 유재석의 이름이 비판적 문맥에 놓이는 순간, 일부 독자들은 곧바로 불편함을 말한다. 왜 그들인가, 더 문제적인 대상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해온 일을 보아야 하지 않는가. 이 반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글이 겨냥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비판의 대상을 진영으로 가르고, 내 편의 균열을 서사로 덮어버리는 습관. 불편함은 이미 작동 중인 감정의 증거다.
"비평은 공격이 아니다. 그러나 비평을 공격으로 읽는 반응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말해준다. 정확히는 — 우리가 얼마나 깊이 특정한 이름들을 비판 불가능한 존재로 내면화하고 있는가를."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신화 만들기(mythologization)’의 전형이다. 한 인물이 오랜 시간 긍정적 이미지를 축적할 때, 그 이미지는 자연의 질서처럼 굳어진다.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것, 질문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남는다. 그 상태에서 분석은 곧 불경으로 읽힌다. 유재석의 ‘따뜻한 국민 MC’ 서사, 김어준의 ‘저항 언론인’ 서사, 최욱의 ‘진보 논객’ 서사. 이 이름들은 하나의 신화로 작동한다. 그러나 신화는 해체될 때 비로소 사유의 대상이 된다. 불편함은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미학 역시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이미지의 소비가 공감을 어떻게 무디게 하는지 물었다. 반복되는 장면은 감각을 마비시킨다. 조롱의 언어가 콘텐츠로 순환될 때, 그 생산자의 의도는 중심에서 밀려난다. 선의를 지닌 사람, 존경받는 이름, 선한 행적—이 모든 조건은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 조롱의 형식을 취하는 순간, 그 효과는 동일하게 발생한다. 의도는 결과를 면제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평이 필요한 이유다.
"좋은 사람도 나쁜 구조를 작동시킬 수 있다. 비평은 그 사람이 나쁘다는 선고가 아니라, 그 구조를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불편함을 견디는 일은 성숙의 지표에 가깝다. 내가 아끼는 콘텐츠, 신뢰하는 인물, 익숙하게 소비해온 웃음을 질문의 대상으로 놓을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이 닫힐 때, 감수성은 이미 조롱의 토대 위에 서 있다. 타자를 관리하려는 욕망,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시선을 제한하는 태도. 두 방식은 서로 닮아 있다.
우리가 향해야 할 자리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회복이다. 그러나 그 놀이는 누군가의 열등함을 전제로 삼지 않는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그것은 멀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시작은 단순하다. 지금 내가 웃고 있는 이 장면이 누구 위에 서 있는지를 묻는 일. 화면이 어디에 있든, 형식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 질문이 불편하다면, 바로 그 지점이 출발선이다.
조롱의 시대는 저절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라보는 방식이 바뀔 때만 균열을 드러낸다. 응시는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통과할 때, 웃음은 비로소 다른 방향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