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촉법소년과 온 동네의 기다림

소년심판(2022)

by 박 스테파노

심판과 재판, 처분과 처벌 사이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그 중의적인 제목은 제법 의미 심장해 보인다. 소년법에 의한 재판이 소재가 된 드라마의 직접적인 표제이면서, 주인공인 소년부 판사의 이름이 심은석(김혜수)이라 줄여서 '심판'이라고 부르는 것이 차용된다. '소년을 심판하는 심 판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드라마 초반부터 밝히는 심은석 판사의 소신인 '소년을 혐오한다'는 것도 잘 드러내고 있다. 재판정에서 심판을 내리는 심 판사와 심판을 기다리는 소년(소녀)과의 대칭과 대립을 보여 준다.

공식 포스터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의미 깊게 본 것은 '심판'이라는 단어이다. 지방법원의 소년부 판사의 업무로 흔히 떠올리는 일상의 언어는 '재판'인데, '심판'이라는 어휘는 제법 다른 어감과 무게로 다가온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처럼 생을 다하고 전능자 앞에서의 판단을 기다리는 일처럼 느껴진다. 마치 염라대왕의 처분에 따라 극락과 지옥의 경계에 있는 그 결정적 순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심판'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들추어 보기로 한다. 심판(審判) '어떤 문제와 관련된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잘잘못을 가려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고, 종교적으로 신이 인간과 속세의 죄를 제재하는 일이라고도 풀이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다음의 내용이다. 심판이란 '심리(審理)'와 '재판(裁判)'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또 궁금함이 꿈틀 대었다. '심리'는 무엇이고 '재판'은 무엇일까 하며 말이다.

심각

심리와 재판, 그리고 심판


심리(審理)란 법률상 재판 이전에 법원이 민사·형사상의 청구 원인에 따른 증거나 방법 등에 대해 행하는 공식적 심사 행위를 말한다. 주로 증인과 피고, 원고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이다. 영어로도 hearing이라고 표현이 된다.


심리는 재판의 기초가 되는 사실 및 법률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법원이 조사하는 행위이다. 판사나 법관은 피고의 출석하에 당해 사건에 관련된 소송절차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 확정하게 된다. 심리가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확립해야 하는데,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충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절차면에 있어서도 합리적이고 공평·신속해야 한다.


재판(裁判 , judgement)은 구체적인 소송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법원 또는 법관이 공권적 판단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또는 그 판단ㆍ소송의 목적이 되는 사실의 성질에 따라 민사 재판, 형사 재판, 행정 재판의 세 가지가 있으며, 그 형식에 따라 판결, 결정, 명령 따위가 있다.


원래는, 옷을 마름질(수치에 맞게 자름) 하기 위해서 생각을 하듯이 판단한다는 의미로, 옳고 그름을 살피어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법부의 재판기관에서 행하는 사법적 판결 행위를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즉 '심판'이란 심리와 재판을 아우르는 표현이 된다. 심리는 재판에 앞서 요건, 상황, 증거,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 조사하는 것이고, 재판은 이 심리의 과정에서 도출된 사실과 진실의 요소를 가지고 판단하는 행위를 말한다. 법률에서 '심판'이라는 용어가 예전에는 사용되곤 했다. 가사 심판법이 있어 일반 소송 절차와 달리 재판을 '판결'이 아닌 '결정'의 형식으로 하고 법원에 일정한 재량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으며, 비공개의 특징을 갖던 절차로 후에 가사 부분의 송사도 복잡성이 증가하여 가사 소송법으로 개정된 바 있다.

심리와 재판, 심판

뉴스나 기타 보도에서 많이 접하였지만, 이처럼 소년이 법적 피고소인이나 처벌ㆍ처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일반 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례가 소년법에 의거하여 '소년보호'사건으로 처분되기 때문에 '심리'와 '재판'을 아우르는 결정의 처분을 '심판'이라고 통칭하는 듯하다.


사실, 소년법의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일반적인 재판과는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보호 처분의 경우 사법 조력자를 '변호인'이라고 하지 않고, '보조인'으로 지칭하는 것이 눈에 띈다. 가장 특이한 점이 형사재판에 의한 처벌보다 소년보호에 의한 처분이 우선 고려된다는 점이다. 갸웃되기 시작해진다. 처벌이면 처벌이지 처분이라니. 그리고 그 처분의 이름이 '소년보호 처분'이다. 법정에서 판사는 피고석에 선 아이에게 내내 '소년'이라 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 죄를 저지른 녀석을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형사재판으로 가도 소년범 감경 (제60조 제2항) 사유에 해당되어 형량이 대폭 감소한다. 사형 및 무기형의 완화 (제59조) 조건이 있어 최고형이 20년 형이고 무기나 사형은 선고할 수 없다. 그리고 '부정기형'으로 선고된다. 소년이 법정형으로 장기 2년 이상의 유기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경우에는 그 형의 범위에서 장기와 단기를 정하여 선고한다(소년법 제60조 제1항 본문). 판례에서 "장기 3년, 단기 2년" 같은 말이 나오면 이 부정기형이 된다. 단기형을 채우면 교정당국의 평가를 받아 장기형이 끝나기 전에 출소할 수 있다. 일반 시민들 사이의 논쟁과 문제제기가 되는 부분이다.



소년에 대한 처분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http://naver.me/56Y26YIp

1953년 소년법 제정 이후 69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어린 무법자들은 어떤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어린 나이가 큰 감경요소가 된다는 점을 악용할 만큼 영악하게 변한 듯 보인다. 멈추지 않는 그들의 일탈을 막을 방법은 결국 강력한 처벌일까? 일각에서는 무조건적인 강력 처벌은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하는 국가마저 아이들의 교화 가능성을 박탈하는 일이 될 수 있고, 나아가 청소년들을 더 큰 범죄자로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심화하는 소년법 논란. 과연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위해 어떤 답을 택해야 할까. -기사 본문 중-


'촉법소년(형사미성년자)'로 흔히 대표되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가벼운 처벌'은 늘 논쟁의 중심에 있다. 청소년이 강력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소년법의 도움으로 처벌이 경미한 점을 이용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성인이 저지른 범죄를 청소년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일정한 대가를 제시하고 대신 자수하도록 하는 등 악용사례도 있다. 심한 경우 성인이 청소년에게 폭력이나 살인을 청부하기도 한다.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소년법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소년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합법적 살인면허의 용인 이리고 까지 지적한다.


드라마에서도 소년들은 쉽사리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억압감을 외부의 약자에게 표출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선택한다. 보호시설에서는 술과 담배의 허용을 두고 시설관리자와 딜을 하려 한다. 스스로 촉법이라는 것을 잘 알기도 하여 대신 자수하기도 하고, 형사재판만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어리숙한 시대의 피해자처럼 코스프레 연기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누구 하나 시원하게 반성하고 교화하는 아름다운 동화는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소년법정 판사 심은석은 수시로 자신의 신념을 강조한다.


"저는 소년을 혐오합니다."


반사회적 청소년 범죄는 일반 성인 범죄와는 달리 '청소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 된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함에도, 최근 청소년들의 정신적인 성숙도와 신체 발육이 굉장히 빠르다는 점을 논거로 삼아, 성인과 동등한 처벌을 원하기도 한다. 이런 갈등의 이유로 촉법소년과 그들의 범죄라는 소재가 역설적이게도 일부 창작물들의 소재가 되곤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본 소설ㆍ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 <방황하는 칼날>을 떠 올릴 수 있다. 사건보다 법체계와 사회적 공론의 질문은 이번 드라마 <소년심판>이 본격적이라 보인다.



처벌이 능사일까?


그렇다면, 신체적으로 성인과 다름없기에 청소년들은 성인에 준하여 처벌받아야 할까? 그런 이유에서 '소년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무용지물이 될까? 교화는커녕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범죄조차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사죄 한마디 없는 이들에게 '보호처분'은 당치도 않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구제불능의 범죄자 녀석에게 '보호'라니.


https://entertain.v.daum.net/v/20220304030300384


아이들은 거듭된 조사 과정에서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는 수사관과 검사 앞에서 자포자기했다. 특히 검사는 아이들을 겁박하며 허위 자백을 유도했고, 단순히 묻는 말에 "예"라고 답하는 아이의 진술서에는 검사의 질문 내용을 아이의 답변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항소심이 시작되고 박 변호사는 "검사는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확신을 갖고 무리한 수사를 했다"라며 조사 과정의 문제를 하나하나 지적했다. 이에 검찰은 공판 조서에 "노숙 청소년은 저희가 생각하는 청소년과 특성이 너무나 다르다. 길거리에서 배운 들고양이 같은 야생성이 있다. 그리고 항상 절도 폭행 성매매 살아남기 위해서 돈도 마련해야 되고 그런 일로 매일매일 밤을 보낸다"라며 아이들을 향한 편협에 가득 찬 시선을 드러냈다. -기사 본문 중-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합당해 보이는 반론도 적지 않다. 소년법은 소년범죄를 증가시키기지 않으며 법학적으로든 윤리학적으로든 나이에 따라 형벌에 차등을 두는 것은 정의에 부합한다는 논리이다. 소년법을 혐오하는 국민 정서는 법, 윤리와 같은 전문분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엄벌주의의 연장선이라고 비판한다.

엄벌이 능사일까

엄벌주의에서 시작된 법 감정에게 흔히 반문해 본다. 얼마나 벌을 주면 되겠냐고. 5년이 작으면 10년? 20년? 그렇다면, '오늘만 살자'주의의 강력범들이 5년이 10년이 된다고 범죄를 주저할 요인으로 작용할까?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가장 큰 처벌인 징역형은 생각보다 무겁다. 2~3평 되는 방에 6~8명이 지내며, 사회와 단절되는 수년은 상상보다 끔찍하다 하다. 그리고, 이것의 방지를 위해 더 극악무도한 범조자들은 완전범죄에 대한 것에 신경을 쓰기에 후속 범죄는 더 잔인해진다고 한다.


처벌은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얼마 만큼의 판단능력으로 저질렀느냐에 따라 다르게 부과되는 것이 법정신이다. 그에 따라 죄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정신으로 범죄를 저지른 상황과 정신지체장애를 겪는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죄질이 다르다. 판단 능력의 본질적인 저하라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요소로 인한 것은 참작이 된다. 이는 현대 법의 근간인 '책임주의'에 근거한다.

소년사법 처리

청소년은 미숙하다. 경험의 미숙이 아니라, 판단 능력이 미완되어 있다. 이런 기준에서 법의 집행, 즉 심판과 재판, 그리고 처분과 처벌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책임주의'이다. 미숙한 판단능력의 참작, 상당한 교화 가능성, 그리고 억울한 미성숙자의 구제라는 사회적 책임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SBS <꼬꼬무>의 '수원 노숙인 소녀 살인 사건'에서 본 사항이나,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범죄에서 종범ㆍ공범으로 보였으나, 죄를 대신 뒤집어쓰거나, 피해자가 강압에 의한 가하자로 둔갑된 사례 등도 적지 않다. 검사나 판사들은 늘 법의 집행이라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억울한 사람의 구제'에 있다고 말한다. 처벌과 처분으로 사회의 기강 구조를 잡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 이 사회에서 '억울한 이'는 늘 '약자들'의 몫이 된다. 소년법은 이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처분은 어쩌면 견진을 위한 어른의 기다림


드라마에서 심은석 판사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한다.


"아이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한다는 말이 있지요.
아이 한 사람이 잘 못되면, 온 마을이 아이를 망치는 것 아닐까요."
온 마을이 필요한

법의 책임주의를 비유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법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쉽게 이야기한다. 믿음을 보여 달라고, 난 널 믿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각자가 정의하는 "믿음"의 모습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머리가 굵어지고 변성이 되어 제법 어른의 외형을 갖추었다 해도 미숙하고 어리석기 마련이다. 계약처럼 굳센 약속, 신념에 의한 확고한 신뢰는 어른들의 말이니까. 아이들은 믿음이라는 것을 '기다림'이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천주교에 '견진성사'라는 것이 있다. 가톨릭의 7 성사 중의 하나로, 세례성사를 받고 난 사람이 신앙을 확고히 했음을 증명하는 성사이다. 견진(堅振)이라는 한자도 '굳건히 받아들이다'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the Sacrament of Confirmation, 라틴어로는 Confirmatio라고 하며, "확고, 확정"이라는 뜻이 있다.


쉽게 비유하자면 세례성사는 출생신고에, 견진성사는 주민등록증 발급 내지는 성년의식에 견주면 된다. 그래서 견진 후에 대부와 대모의 자격 요건을 갖는다. 세례성사나 견진성사 때 신앙적 후견인으로 함께 하는 대부 또는 대모의 역할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만이 수행할 수 있다. 누군가를 신앙으로 책임질 성숙을 인정받는 것이다.

견진성사


주목할 점은 더 있다. 유아기나 유소년기에 '영세'라는 세례로 입교 의식을 한다. 그런데, 이는 '조건부 시한'이 명시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자율의지'가 완성되지 않아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크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견진성사 전에는 영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한다. 다시 말해 견진성사는 '종교적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도 강요가 아닌 선택을 하는 스스로의 결정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 그 보수적인 가톨릭에서 말이닺


드라마에서도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가 이따금 전해 진다. 그 기다림의 길이와 정도에 정답은 없지만, 기다리다는 사실만으로 믿음은 형성되는 것이다. 이 기다림과 관련하여 관계가 재정립되고 미숙한 아이의 심경의 변화가 도모되며 방관했던 어른의 책임감이 형성된다.


<소년심판>을 보면서 내내 부글 거렸다. 교활하고 반성 없는 녀석들에겐 혼꾸녕 밖엔 답이 없다 일갈하고 싶었다. 세상이 왜 이모양인지, 부모 친지들은 무얼 했는지 혀만 끌끌 차고 있었다. 그러나, 회차가 거듭되면서 혐오한다던 주인공의 사연을 알게 되고, 또다시 범법자로 돌아온 당시 촉법소년의 양태를 살펴보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본이 부모를 대신해 줄 것이라는 물질 만능의 쉬운 생각,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 유전자의 부ㆍ모성애, 당한 놈이 문제라는 안일한 판단, 그리고 결과의 단면만 보고 엄벌과 처단을 외치는 법 무지까지. 무엇 하나 피해 갈 수 없이 어른으로써 공동 정범이었다.


기다려 달라는 진심에 응답하고, 기다리라 하고 때를 지키는 그런 마을 어른이 되었으면 바란다. 우리 동네에 억울한 아이 하나 나오지 않도록 모두가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대책 없는 정부기관, 여력 없는 사회, 그리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유기체가 모두 말이다.




keyword
이전 10화죄 없는 자, 누가 돌을 먼저 던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