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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의 희망 노래

파워 오브 도그(2021, Power of Dog)

by 박 스테파노
1925년 미국 몬타나에서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너딕트 컴버배치)은 동업자이자 하나밖에 없는 형제인 조지(제시 플리먼스)와 성공적인 사업 15주년을 기념한다. 순탄한 분업과 동업의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가 자살한 남편에 의해 홀로 아들을 키우게 된 로즈(키얼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을 가족으로 맞이한다. 예고도 상의도 없었던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호시탐탐 그녀를 자극하고 압박하기만 거듭한다. 방학을 맞아 아들 피트(코디 스밋 맥피)가 목장으로 오게 되는데. 이들은 가족으로 화합될 수 있을까? 아니면 섞일 수 없는 남만 못한 관계로 남을까?
공식 포스터 <the Power of the Dog>


제인 캠피온이 돌아오다


1993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피아노>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생소한 풍광을 담은 화면들이, 그 화면들을 채우는 생소한 배우들의 명연이, 그리고 그 배우들이 만들어 가는 놀라운 스토리 전개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감독은 최초로 황금종려를 받은 여성 감독이었다. 단지 여성이어서 놀란 것이 아니라, 당시 많은 정보가 없던 시커먼 대학생의 감각에선 드라마의 작법이, 화면을 채우는 미장센이,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러브신이 "남자의 향기"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12년 만의 장편 영화 <파워 오브 도그>로 돌아왔다.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과 함께 말이다.

제인 캠피온 감독


많은 영화 종사자들이 제인 캠피언을 "여성의 당찬 목소리"라고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은 늘 달랐다. <피아노>는 물론 <스위티>(1989), <내 책상 위의 천사>(1990), <여인의 초상>(1996), <홀리 스모크>(1999), <인 더 컷>(2003), <브라이트 스타>(2009) 등에서 여러 시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빌려 억압과 폭력의 이야기를 해왔다. 대부분 "여성의 몸과 시각"을 빌려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저는 캠피온의 영화에서 "젠더의 무경계성"을 느끼곤 했다. 여자나 남자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욕망과 정체성이라는 버거운 현실 앞에선 "다르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남자라서 더 큰 시야를 갖거나, 여자라서 더 핍박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기구한 운명과 신의 섭리 앞에선 말이다.

영화 <피아노>


젠더? 그래서 뭣이 중한데? 밖에 되는 목숨 주제에


영화는 미국 작가 토머스 새비지가 1967년에 내놓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1920년대 미국 몬타나주의 한 목장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복수와 세밀한 심리를 이야기한다. <피아노>에서도 보이듯, 시대상은 남자의 세상처럼 보인다. "척박한 예기치 못할 위험"을 핑계로 사회 구성원은 마초(Macho)의 굴림을 용인하게 된다. 영화에서도 카우보이 대장 필은 남성성을 찬미하고 동성애를 혐오하며 여성을 하대하고 괴롭히는 전형적인 마초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늘 전부가 아니듯, 동성애자로 인지되는 이 마초 대장의 위태 위태한 이야기를 캠피언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잔인하고 예리하게 펼쳐놓는다. "남자들, 여자들 나누어서 뮈할껀데, 이 엄중한 자연 앞에서 말이야"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형 "필"역의 베네딕트 컴버비치


둘의 노력으로 빈 손으로 막대한 재력을 일군 형제의 모습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위압적이고 거친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형과 달리, 동생은 정중하고 깔끔하며 유순해 보이기까지 하다. 형 필이 "뚱보"라고 이름보다 더 자주 지칭하듯, 동생 조지는 흔히 말하는 "남성성"이 부족해 보인다. 외모도 거의 반대말처럼 보인다. 근육질에 카우보이 부츠로 상징되는 형과 달리 동생은 넉넉한 뱃살에 둥근 얼굴, 그리고 깔끔한 정장으로 대표된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뒤늦게 파악된(다소 느린 전개로) 숨은 실상은 예상과 상반된다.


결혼의 욕구는 동생이 먼저 이루고, 형은 연모의 대상인 죽은 멘토 "핸리 브룽크스"의 망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골이라도 주지사 등 실세들과 사교를 도모하고, 냉철한 사업적 판단은 동생 조지의 몫이 된다. 형은 그저 1500마리 수소의 거세와 말타기, 로프 만들 소가죽 생각만 가득하다. 유추만 되는 묘한(?) 그리움을 품고 말이죠. 이렇듯, 젠더의 특성의 일반화는 부질없다 이야기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며, 존경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은 "여자"만의 것, "남자"만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거대한 우주와 장엄한 자연 앞에선 티끌만 한 점일 뿐이니까. 젠더의 기치를 올려 고귀한 "인간"을 정복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동생 조지, 그의 아내 로즈


"파워 오브 도그"; 시편 22장의 숨은 이야기


영화 <파워 오브 도그>는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일단 느리다. 지루하다 싶을 때 무언가 벌어지지만, 번쩍이고 쿵쾅거리는 서스펜스 따위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름 스릴러이고 미스터리이며 반전도 있는 복수극이다. 우리가 익숙했던 영화 문법과 달라 생소해서 어럽다.


미국의 몬타나는 잘 상상이 안 되는 공간인데다가 무려 1925년이 배경이다. 어렵다. 그런데, 굳이 애써 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 1957>의 그 황량한 개척의 시대와 얼마 전 시커먼 석유를 뒤집어쓰고 나온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데어 윌 비 블러드, 2008>의 답답한 정서가 오버랩되면서 "상상 가능"해 질 수 있다. 이렇듯, 서사시의 구조는 아니지만 그 무드와 정서는 위의 작품과 맞닿아 있다. "죽음"이 이야기하는 함축도 빼놓을 순 없다.

영화 <자이언트>, <데어 윌 비 블러드>


영화 제목 <파워 오브 도그 Power og Dog>는 기독교 성경 시편의 한 구절에서 차용하였다 한다. 시편 22장 20절 "Save me from the sword; save my life from these dogs."을 인용하며, 혹자들은 이 "개"가 누구이고 "칼"은 무엇인가에 대해 현재의 상황, 철학적, 사회적 의미를 애써 부여한다. 무슨 의미가 되었든 "개"는 나와 우리를 위협하는 무언가 임에는 틀림없다. 보다 이해의 도움을 위해, 인용된 시편 22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가장 길다는 "시편"


시편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책이고, 유대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서이며,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도 가장 많이 인용된다.(이는 유대인, 초기 기독교인이 대부분 유대교도) 그 다양한 내용 때문에 오래도록 널리 읽히게 되었다. 150 수로 구성된 시편은 신앙의 모든 측면에 관한 시와 노래를 담고 있다. 찬양, 좌절, 희망, 탄원, 환희, 심지어 적에 대한 복수도 있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의 지도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을 '성서의 축소판'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참조: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

성경에서 가장 긴 책 "시편"


시편 22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의 예수 고난의 마지막 장면인 십자가 위의 절규(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로도 상호 텍스트 된다. 22장은 다윗의 노래 중에 희소하게 "절규"와 "좌절"을 호소한다. 사자들, 들소들과 개들 등 악당들에게 포위된 자신의 구원을 호소한다. 그리곤 바로 다음절에 하느님의 응답을 듣고 다시 찬양한다.


22절;
사자의 입에서, 들소들의 뿔에서 저를 살려 내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계시를 노래한다.


31절~32절: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 장차 올 세대에게 주님의 이야기가 전해져, 그들은 태어날 백성에게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리니 주님께서 이를 행하셨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에 의로움을 알릴 "말씀(메시아)"가 올 것이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엽고 핍박받는 백성을 구원한다는 이야기, 즉 신약의 완성을 예지 노래하는 대목이 시편 22장의 내용이다. 제목이 된 시편의 전체 내용은 "개"가 아니라, 그 개를 물리쳐 달라는 절규와 응답, 그리고 그 해결자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예지이다.

"Dog"가 아니라 "the Dog"


이처럼 "파워 오브 도그"는 영화에 등장하는 개의 형상을 한 험한 돌산, 그리고 사납고 위험한 인간의 본능 혹은 인간 그 자체를 비유하는 의미로 보인다. 늘 강하고 사나운 외세(앗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로마제국 등)로 부터 위협과 침략을 받아 핍박의 굴레를 돌고 도는 유대인의 슬픈 노래처럼, 영화에서 나약한 미망인 로즈는 늘 위태 위태하다. 체면 가득한 조시의 부모는 데면 데면 하고, 재산을 축내는 존재로 바라보는 시아주버니 필은 으르렁대는 야수 같다. 남편도 그저 그럴듯한 가정의 모습을 지역사회에 보이는 것에 급급하기만 하다. 로즈가 의지할 데라고는 망각의 깊은 "숙취" 뿐이다. 그때 정말 말 그대로 "구세주"같은 아들 피트가 방학을 맞이하여 농장으로 온다. 마치 기숙사 배정 날 "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라는 예고의 실행을 위한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한 줌거리 삶에서


묵직한 반전의 드라마 -일상에서의 반전은 "희망"


영화를 보는 절반 이상의 부분 -피트가 방학을 맞이하여 농장으로 오기 이전에서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를 기억에서 자꾸 들추게 된다. 형 필에게선 혼혈 원주민 베인즈(하비 케이틀)가 비추어지고, 벙어리 여인 에이다(홀리 헌터)는 로즈, 피트 모녀에게 엿보인다. 진흙탕 위에서 피아노를 옮기고, 아이가 있는 사연 많은 여인과 결혼하는 재력가, 그리고 짖어 대는 개들마저 이 영화는 <피아노>를 비추는 거울상이거나, 새로운 버전으로의 오마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좀 아는 체하는 관객에게 영화 말미- 정말 말미에 반전을 이런저런 설명 없이 휙허니 던져 준다. 묵직한 뒤통수 때림과 함께.


반전의 어마어마한 사건은 갑작스럽지만 계획된 것이었다. 시편의 예고 후에 수 천 년이 훌쩍 지난 이 희망 없는 시대에 예전 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청년 예수의 사건처럼 말이다. 그만큼 인류의 지속을 위해서는 또다시 기적 같은 대사건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신의 아들이든 준비된 아들이든 말이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는 밝고 희망찬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살면 살아 갈수록 갑갑해지는 현실의 무게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만 증폭되는 세상을 투영한 영향일 것이다. 그만큼 영화는 그 예전 어느 시기의 사건으로 현실을 응축하여 이야기하는 힘이 있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예술의 매체가 그러하듯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과 듣고 이해하는 사람의 변용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꼭짓점을 이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영화보기는 늘 유효하다.

갑작스런 반전은 절망인지 희망인지 헷갈리다. 그것이 "구원"일지라도


이 영화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리 공들여 다루지 않는다.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의 조용하고 무서운 계획을 결말의 반전으로 되짚어 준다. 산다는 것은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노여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죽음은 그저 갑작스러운 종결일 뿐이니까.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이 남은 자들의 희망이 된다면, 정말 반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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