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포기버블 (2021, Unforgivable)
루스 슬레이터(산드라 블록)는 20년 간의 긴 수감 생활을 거쳐 가석방이 된다. 복잡한 인파와 갖은 소음이 가득한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경찰(보안관) 살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녀를 쉽게 받아주는 곳은 없다. 루스에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편견의 눈초리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위협뿐이다. 이런 사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루스에게 유일한 희망사항이 있다. 20년 전 사건으로 인하여 헤어져야 했던 어린 여동생의 "답장"뿐이다. 생사 여부와 안부, 그리고 중요한 "기억". 루스는 동생과 연락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미국에선 "경찰 살인범"은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기 어렵다. 레인저, 셰리프, 폴리스 등 다양한 형태가 말해 주듯이, 미국에서 시민 개인의 안위는 "경찰 조직"에 의존하고 무한 신뢰하고 있다. 국외의 군사적 행위는 먼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고, 실감하는 위협은 "총기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부의 범죄일 테니까. 그래서 9.11 같은 국내 테러를 예측 대비하지 못했다는 진단마저도 있다. 그만큼, 미국에서 "경찰"의 존재는 우리의 예측 이상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경찰에 대한 범죄는 사회적으로 공분하고, 그 범죄자와 전과자에 대한 혐오와 냉대는 당연한 "사회 감정"으로 인식된다.
영화에서 주인공 루스는 자신의 집에서 퇴거 대치 중에 보안관을 살해한 "경찰 살인자"이다. 속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루스와 어린 여동생 케이트의 퇴거 저항을 딱하게 여기어 아들의 방까지 내어줄 요량으로 집으로 찾아온 존경받던 보안관이 총을 맞아 숨지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루스는 중형 수감이 되고, 여동생은 힘든 "사건과 그 이전 기억"을 지운채 안전하고 행복한 중산 가정으로 입양이 된다.
동생의 행복을 위해, 안부의 여부만 확인해도 될 것 같은데 루스는 자꾸 동생이 보고만 싶어 진다. 자기가 좋아하던 목수일로 일자리도 얻고, 친구와 남자도 만나고 이따금 미소 짓는 일상을 그릴지도 모른다. 참 염치없어 보인다. 특히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그 여파로 몸져누운 모친을 모시고 있는 보안관의 아들 두 형제에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일반인들도 "경찰 살인"에 몸서리치는데 당사자들의 분노는 좀처럼 수그러질 것 같지 않다. 갚아 주고 싶기만 하다. 똑 같이.
"국민정서법"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법감정"이라고도 바꾸어 표현하는, "국민정서(國民情緖)"법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특정 사건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감정이나 정서를 뜻한다. 흔히 표현하면 여론이라고 읽히기도 하는데, 소위 '국민정서'가 헌법이나 실정법보다 중히 여겨지는 상황을 비꼬는 말으로 보통 "떼법"이라 칭하기도 한다. 최근 음주운전 가중처벌과 양형 강화를 삼아 입법 발의되었다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난 "도로교통법 개정안(일명 윤창호 법)"을 대표적인 사례로 삼는다.
찬반이 팽팽한 것처럼 보인다(여론조사는 믿을게 못되어서, 논란이 되는 것만으로). 윤창호 법 같이 언론의 스포트 라인을 받는 사안뿐 아니라, 여성ㆍ아동 관련 성법죄나 스토킹ㆍ묻지 마 살인 등, 인간성을 논할 수 있는 여러 사안들에 "처분이 가볍다.", "범죄자에게 인권이 마뜩한 일이냐."등의 불만 가득한 여론들은 늘 옳기만 해 보인다. 그리고 이 여론에 동조하지 않으면, 손가락질도 받고 "동종"으로 여기어진다. 다수의 판단과 그 분노는 항상 마땅하고 당연한 것일까? 그럼 수사와 재판은 왜 필요할까? 이런 비판만으로 동종 전과자나 그 가족, 그리고 잠재적 범죄자와 공범자로 손가락질받는 것은 "사회적 정의"라고 여기어진다.
신문 사회면이나 방송의 사건 중심 저널리즘을 보고 있으면, 그 속에 있는 피의자, 용의자, 피고인 들은 죽일 놈들이다. 자극적인 서사와 묘사도 있지만, 보도의 내용엔 "사건"의 세부 사항이 범죄 행위의 순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거기에 피해자의 참담하고 참혹한 피해의 양상과 상황의 극대화된 묘사는 덤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사고"가 아닌 "사건"들이라는 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영화로 돌아가 보면, 루스가 복역을 하고 동생과 생이별을 하게 되는 이유는 "보안관 살인"이라는 '사건'에 기인합니다. 그 사건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사회적 여론에 의해 예단된 "해석"으로 자리 잡는다. 사실 진실을 추구하는 해석이 아니라 그저 "살인"과 피해자가 "경찰관"이라는 "처리"에 가까운 처분으로 루스를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상대한다. 과연 사회와 사람들은 진실을 추출하고, 그 "사건"의 모든 것을 세밀히 들여다 보아도 그 자의적인 처분을 합당하다고 생각할까? 답에 가까운 훈수는 영화에서 볼 수 있다. "합리적 의문"이 작동하지 않는 "집단의 광기"는 정서법과 여론이라는 재판으로 또 다른 희생양을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민들에게 재판 심리 과정을 체험시키면 도리어 실제 판결보다도 낮은 형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드라마 형식의 영상으로 재판에 필요한 정보들을 열람한 2만 명의 시민들은 가장 많이 (39%) 집행유예를 선택했고 그다음으로는 (29%) 징역 3년 초과 5년 이하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결과들은 정보들을 열람하기 전에 사건의 개요만 간략히 보았을 때의 판단과는 달라지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가장 많은 경우 (27%) 징역 3년 초과 5년 이하, 바로 다음으로 (26%) 징역 5년 초과 10년 이하를 골랐었다. 해당 사건은 실화에 기초하며, 실제 재판부는 5년을 선고했다.
사건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재판부보다 더 엄벌을 하려는 경향을 보인 사람들이, 심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살펴본 뒤에는 실제 재판부보다도 도리어 한참 더 가벼운 형을 선고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참여재판"의 화두가 되기도 하고 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판사의 판결은 이후 판례로 남아 그 나라의 사법 역사에 평생 남는다. 영미법 계열은 아예 쌓인 판례 자체가 법전이라고 여기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와 원고 사이에 선 판사는 늘 판례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피고, 원고 양측의 이해 사이에서 판결에 대한 책임을 최대한 적게 질 지점에서 판결을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피고 쪽에서건 원고 쪽에서건 덜 비판받는다는 결론의 지점이 곧 판결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통용되기 힘든 "거래법"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그들의 사회에도 "정서적 처벌"을 당연시하는 경우가 있다. 경찰 살인, 아동 성범죄,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가 그러하다.
'사고'는 처리와 처분 후 '복구'라는 행위로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의 경우에는 이전으로의 '복구'는 성립하기 어렵다. 진실을 다투는 순간 이전으로의 되돌림은 '퇴행'이 되고 만다. 그래도 방법이 없을까? 딱 한 가지 굳이 꼽자면 "용서"가 있을 것이다.
용서(容恕)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꾸짖지도 벌하지도 아니한 채, 그저 덮어 주는 것이란다. 마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듯이 덮어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입에 담는 '용서'는 아닌 듯하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꽤 묵직한 법적 처벌을 받고, 온갖 꾸짖음을 들어도 "용서"는 쉽게 허락될 리가 없으니까. 더 큰 처벌과 꾸짖음이 있다면 가능할까? '용서'는 결과로써 응대되는 분노의 대갚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참 어렵다. 우리가 말하는 용서는 '체념', '단념', 그리고 '외면'의 다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원제는 <The Unforgivable>이다.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정관사 "the"가 붙음으로써 "용서할 수 없는"이 아닌,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해석이 적합하다. 그리고 "받을 수 없는"이 아니라 "할 수 없다"니?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의 제목은 <용서받지 못한 자>로 기억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 감독ㆍ주연의 <The Unforgiven(1993)>과 하정우 주연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일 것이다. 두 영화 다 "용서받을 수 없는" 사건과 인간군상들을 '피해자'의 시선으로 그린다. 가해자는 용서를 받을 생각도 없는데, 약자로 그려지는 피해자들은 자꾸 "용서"를 떠 올린다. 그러나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벌하지 않거나 꾸짖지도 않은 채 용서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장기 수감 끝에 가석방된 가해자의 시선으로 말한다. 피해 가족은 물론 사회적 법감정은 루스를 좀처럼 용서를 줄 수 없어 보인다. 나의 소중한 아버지, 존경받아 마땅한 경찰은 죽어 온 데 간데없지만, 살인을 저지른 그녀는 고작 20년의 수감으로 "삶은 계속되어야 해"라고 말한다. 죽여 버리고 싶고, 그녀에게도 똑같은 상실을 안겨 주고 싶은 "복수심"이 솟구친다.
그런데, 영화는 "용서할 수 없는" 너희는 "용서할 자격이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성경, 부처 말씀 같은 성인, 보살이 되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용서'는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는 말일까? 어렴풋한 답은 영화 마지막 반전 결말에서 얼핏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건"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더욱이 이해 관계자도 아닌데 그저 선입견과 통념으로 "일반화"하는 집단 오류의 광기는 자격도 없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기 마련이다. 약자의 편이 되고 "권선징악"의 장르에선 "선"의 편에서 통쾌한 판결을 기대한다. 실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의 피해자의 입장을 동조하여 미디어가 기정사실화 설정한 "나쁜 놈"에게 욕을 퍼붓거나, 적어도 혀를 끌어 차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저런 사건에 용의자, 피의자, 피고인이 될 리가 없다"라는 아주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장 7절-
그런데, 말이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 닥치면 어찌 될까? 세상 사람들은 나보고 죽일 놈이라 하지만, 정작 진실 속의 난 억울하기만 하다. 그럴 리 없다고? 세상모를 일 아닌가? "삼례 슈퍼 살인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그리고 불기소, 무죄로 결론난 그 많던 "미투"들.
그런 불행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은 늘 "나름 나름"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된다. 언론과 사법기관의 정제된 역할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건"은 생각보다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힌 버거운 일상의 일탈일 테니까.
어쩌면 '완전한 용서'란 없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용서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나 되짚어 보아야겠다. 특히 "하나님의 용서"라고 우겨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