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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복수라는 게 있기는 할까?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 (2013, Michael Kohlhaas)

by 박 스테파노

대중은 법의 선을 넘는사적 복수 열광하는 것일까.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426135

현실의 사적 제재는 온라인상에서 가장 활발하다.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억울한 피해를 호소하는 글이 빈번하게 화제가 된다. 소위 '화력지원', '좌표 찍기'’라 불리는 형태로 모여든 여론은 누군가를 감시하고 처단하기에 충분하다. 사적 제재를 행하는 사람들과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 이들은 왜 정당한 법적 처벌 대신 이러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일까. -KBS <시사직격: 온라인 사적 제재, 잘못 새겨진 낙인은 어떡하나> 방송 내용 중-


tvN 드라마 ‘빈센조’ 마지막 회는 주인공 빈센조(송중기)가 극악무도한 재벌 2세 장준우(옥택연)를 천천히 피가 빠지게 한 후 까마귀밥을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명백한 살인이자 불법 행위였지만 대중들은 “통쾌하다”라고 반응하며 15%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로 화답했다.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인 빈센조는 분명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악에 맞선다. 이는 SBS <모범택시>와 tvN <마우스>, 그리고 Tving에서 스트리밍 중인 웹툰 원작의 <돼지의 왕>도 마찬가지로 인기를 얻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주먹은
뒤에서 때리는 주먹이다.
치사한 승리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줘서 효과가 좋다.”


드라마 ‘빈센조’의 주인공인 빈센조가 재벌가의 종노릇을 하는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일침 하며 “어느 마피아 집안의 가훈”이라며 한 말이다. 함정 수사를 펼치거나 독수 독과(毒樹毒果) 이론에 따라 위법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할 수 없는 공권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빈센조의 통쾌한 복수에 대중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람들은 법을 무시한 사적인 복수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 본성의 '복수'의 DNA와 현대 사회의 여러 불평등으로 인한 공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불신'이 더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사법체계가 현실을 반영하는 속도가 늦어지면서 생기는 '법감정-국민정서법'이 촉매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심리학자 마이클 맥컬러프는 책 [복수의 심리학]에서, 복수심은 인간에게 잔혹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는 ‘질병’이나 ‘독’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오히려 복수심은 인간이 진화하면서 겪은 사회적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복수는 인류를 뜻밖의 위험에서 구해준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복수심과 그 행동의 시비에 대하여 고심하게 된다.


복수심은 지극히 ‘사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화되면 즉시 사회화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공공화되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사회적인 단절의 도구는 ‘법과 규제’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 속 세계나 현실은 법과 규제의 테두리에서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복수는 매번 ‘개인의 것’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무언가를 극복하는 태도와 행위에 복수만큼 쉬워 보이고, 간단해 보이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이다. '복수로 무엇이 회복되었을까?' 매듭을 원한다면 이 복수의 결심과 행위가 나의 것이어야만 하는지 생각하는 지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복수"가 마지막 수단이라면, 이 역시 제3자나, 대중, 여론, 언론, 법집행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니까.



'정의'의 모습은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채롭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대중을 이해하면서도 우려스럽다. 혹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개인의 범주를 떠나 '모두'의 판단이라 착각하곤 한다. 그러면서, 다각적이고 입체적인 "사건"의 모습을 단면을 잘라 오판하기 십상이 된다. 소수의 다른 의견이나, 다양한 판단에 대해 '사회적 비용'이 든다며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칼이 답'이라고 이야기한다. 엄청나게 잠재적인 폭력이 도사린 위험한 생각이다. 특히 정보가 희박한 타인들 사이의 문제, 해외의 전쟁과 분란, 그리고 가십의 사건들.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의 것이 '정의'가 되곤 하니까.


하루아침에 나는 명예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미하일 콜하스의 선택 (Michael Kohlhaas, 2013)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당당히 맞선 한 남자의 외로운 투쟁.

말 중개상을 하는 미하엘 콜하스(매즈 미캘슨)는 다른 지방으로 넘어가려는 다리에서 새 남작이 강압적으로 통행료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반발하자 그에게 돌아온 건 여윈 말과 폭행당한 하인, 그리고 소송장을 내러 갔다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아내였다. 급기야 딸의 목숨까지 위협해오는 공권력에 분노한 미하엘은 남작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는데…

-다음 영화 소개 중-


매즈 미켈슨이 나온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보게 된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예상만큼 쉬운 영화는 아니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불의와 폭거에 그가 봉기를 한 한 가지 이유는 정당한 절차에 의한 심판의 부재였다. '정의'와 '복수'라는 단어가 어른 거리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요즘의 마음들을 견주어 보게 된다. 딸의 왜 싸우냐는 질문에, 잃어버린 말 때문에도 엄마 때문에도 싸우지 않는다는 미하엘 콜하스의 대답 속에서 오버랩되는 '정의'와 '복수'의 경계를 생각해 본다. '정당한 절차'를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이 미하엘 콜하스의 '정의'였던 것이다.


'정의'의 기준은 생각보다 사람마다 다채롭다. 이해하기 힘든 세상 현상들에 대하여 '어쩔 수 없어'라고 자위적 자문자답하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시시껄렁한 '복수'의 마음을 엿보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구어 놓은 작은 결실을 기다리는 지금도 팔자와 신세에 대한 푸념은 아직 마음 구석 한가득이니까.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의 시선과 말들이 혹 '복수'의 마음은 아니었는지 되새겨 본다. 또한 지금 권력을 부여잡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복수’는 아닌지 이따금 의문이 드는 요즘이다.


“정의는 조화지만 복수는 자기만족이야”
크리스토퍼 놀런 <배트맨 비긴즈> 中
복수는 정의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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