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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는 누구든 눈멀게 한다

쓰리 빌보드(2017, Three Billboards Outside..)

by 박 스테파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남편과 이혼 후 아들, 딸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말다툼 후에 나간 딸은 강간당한 체 불에 탄 모습의 끔찍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수사는 지지부진해 보이고, 딸의 살인 사건에 세상의 관심이 사라지자, 엄마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외곽도로 한편에 있는 대형 광고판을 임대하여, 도발적인 세 줄의 광고를 실어 메시지를 전한다. 광고가 세간의 주목을 끌며 마을의 나름 존경받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헤럴슨)와 그의 추종자 경찰관 딕슨은 무능한 경찰로 보도되기 시작한다. 조용한 시골 마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밀드레드의 편에 좀처럼 서지 않는다. 그녀는 범인을 찾아내어 정의를 실현하고 딸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을까?
포스터


복수는 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개봉작, 특히 주요 수상작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보곤 했다. 최근 일상이 녹록하지 않게 되고 코로나로 인한 고립의 시대를 핑계 삼기 좋아져서 화제작들을 제법 묵혀 놓게 되었다. 빠듯한 살림에도 이야기에 대한 갈급은 허기짐보다 먼저가 되었는지 OTT상품이 결합된 통신 요금제는 쉬이 변경하지 않게 되니다. 그 덕분에 서랍 속 깊게 넣어둔 뜯지 않은 편지를 개봉하듯 영화를 마주하게 되는데, 이 번에는 2018년 유수의 영화상을 수상한 <쓰리 빌보드>를 꺼내 보았다.


영화는 한 여인이자 어머니인 주인공이 마주하는 커다란 비극 이후의 시간을 그려낸다. 애틋해지도 알콩달콩하지는 않은 사이였지만 소중한 딸을 비참한 강간 살인 사건의 희생자로 마주하기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정의를 구현하고 악을 응징할 법집행 자들의 태만하고 편견 가득한 행동들을 지켜보는 것은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지옥 같은 날들을 던져 줄 뿐이다. 말기 췌장암에 걸린 보안관의 처지나 마마보이, 인종주의자, 게이라고 손가락질받는 말단 경찰관(샘 록월)의 나름의 삶 따위는 안중에 없다. 모두가 나의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 당사자들이거나 적어도 방관자라고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어머니이자 여인은 광고판에 그들을 도발하고 힐난하며 사건 수사의 진도를 재촉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비이락 격으로 말기암의 마지막 모습을 거부한 보안관이 자살하고 만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쓰리 빌보드'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상심을 어루만지기보다는 고립시키게 된다. 이 순간이 궁지에 몰린 사람들에게는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 시작된다. 모두가 적이거나 적어도 내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신만의 논리와 감정으로 편향된 확신을 굳히는 것이다. 이내 사회의 제도적인 법집행을 불신하게 되고 스스로 내게 손해를 끼친 악의 근원을 찾아 똑같은 고통, 아니 시간이 더했으니 더 큰 아픔을 전해 주고만 싶어 진다. 그래서 딸의 죽음을 스스로 되갚겠다고 결심한 밀드레드는 보안관 사무실에 거침없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불타 죽으며 강간당한 딸에 대한 정의로운 복수는 이것밖에 없다고 확신하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보복'이 아닌 '중재'


기원전 1750년 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왕 함무라비 왕이 공포한 법전, 일명 '함무라비 법전'은 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말로 "동해보복"이라는 원시 법의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손해만큼의 동일한 손해로 되갚는, 똑같은 행동으로 보복을 허용하는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단적인 예로 부모를 구타한 아들의 손목도 잘려야 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죽인 자는 당연히 사형에 처해졌다. 1901년 프랑스 탐험대가 페르시아의 고도 수사에서 발견한 이 법전은 한동안 현전 하는 인류 최초의 성문법으로 사람들의 상식 리스트를 채웠다. (이라크 남동부에서 발견된 우르-남무 법전(기원전 2115~2095)이 정식 인정되고서도 한동안)


복수는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인간의 사회적 본능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복수의 양태는 원시적인 야생의 상태를 벗어난 인간 사회에서 유일하게 증폭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래된 성문법에서 기술한 복수와 유사한 '동해보복'이라는 형 집행의 원칙은 엄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일견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있다. 원초적인 복수의 본능에 기댄다기보다, 오히려 그 본능적 원시성을 제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함무라비 법전

수렵과 유목의 긴 유랑의 세월을 마치고, 비옥한 토지와 농사 기법의 발달로 사람들은 얼굴 붉히는 일이 있어도 거주지역이라는 테두리를 벗아나지 못한 체 서로 부대끼며 살게 되었다. 원시적 노매드의 본능에서 공동체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동물적이고 감정적인 보복의 연쇄작용을 야기하고 그 결과도 매우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손해를 손해로 갚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기 위한 것에서 시작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누구 하나가 죽어 사라지거나 둘 다 공멸할 수밖에 없는 극단을 치닫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속적인 안위를 위해 지배계급은 '납득이 가는 중재'의 노력을 하였을 것이고, 수형자를 가둘 감옥도 없고, 벌금을 징수할 화폐경제도 태동되지 않았으니, 중재자가 제어할 수 있는 '동해보복'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말이다. 이 '함무라비 법전'에 인용된 가장 유명한 탈리오의 법칙에는 숨겨진 그 시대의 배경이 있다. '동해보복'으로 형을 받는 사람들은 권력이나 재력이 없는 일반 하층 서민들 뿐이었다. 소위 기득권이라는 고위층은 손해에 대한 보상과 속죄의 급부를 경제적 배상으로 대신하였다. 앞서 말한 ‘우르-남무’ 법전을 보더라도, 주로 금전적인 배상과 벌금형을 위주로 법을 만들었다. (유아 납치범은 수감과 동시에 은 15쉐켈(1쉐켈은 8.3g)을 물어야 하고(3조), 남자가 첫 아내와 이혼하면 1 미나(500g)를 내야 한다.(9조) 이밖에도 다른 이의 눈을 상해하면 은 0.5 미나를(16조), 다리를 해치면 10쉐켈(17조)을 물어야 하는 등으로 말이다.)


결국 동해보복으로 나의 손해와 피해를 가해자에 동일하게 가하는 것은 어찌 보면 통치자들의 공포적 통치행위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득권은 그 손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 보상하면 그만이지만, 줄 것이 없는 하층 서민들에게는 자신의 손모가지를 걸어야 하니, 범죄에 대한 기회작 비용은 지위고하에 따라 철저하게 불평등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흔한 말은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복수'의 행위를 정당화해 줄 수는 없는 일 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의 단정과 확신이 단지 나만의 감정과 생각의 끝에서 낳은 결과라면 더욱 그러하다. 증오는 그저 또 다른 증오를 낳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래 말이 무색해지지만)



반성은 철저히 용서는 간단히


영화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개인의 단정적 확신으로 인한 사적 보복은 또 다른 증오를 만들게 된다는 것, 진정한 용서라는 것이 증오 가득한 보복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영화의 결말은 제법 반전이 있다. 엄청난 사건이 아닌 가장 보잘것없이 받아들여진 인물의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 큰 울림을 준다. 오해와 편견으로 증오의 대상이 된 그 인물은 억울할 수 있는 자신에게 가해진 누명과 잘못된 보복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자, 매우 '심플'하게 반응한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봐요?
나를 바보로 아나."


증오는 증오를 낳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피해와 손해를 입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곤 한다. 그 피해의 정도가 말 한마디, 복구의 노력, 경제적 보상으로 채워질 수도 있지만, 영구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될 때도 있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죄와 복수보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아닐까 한다. 이 반성의 전제에는 구체적이며 개인적이고 상세하고 적요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두리뭉실한 '죄송'은 아무것도 복구하거나 치유할 수 없다.


그다음은 온전히 피해 당사자의 몫이 된다. 스스로 돌아보아 그 구체적이고 사실 적시의 반성이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저 아주 간단하게 수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구구절절 그 사과와 반성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마음 깊은 곳의 시그널일 수도 있다. 용서할 만큼 충분치 안 하다면 법과 사회가 규정하는 처벌과 보상의 구제를 받는 것이 나은 방법이 된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한 맘으로 똑 같이 갚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소중한 오늘과 내일을 아픈 과거에 다 써버릴 수도 없는 법이니까.


영화에서 증오의 마음을 담아낸 미국 미주리주의 에빙 외곽의 세 개의 옥외 광고판을 불태운 사람은 딸을 죽인 범인도, 단정하고 오해하는 그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순간 분노하고 증오 가득한 잊고 있었던 주변의 누구였다. 증오로 복수를 시작한 쓰리 빌보드는 결국 불타 버리면서 증오보다는 냉정한 단죄와 단순한 용서를 풀어내며 마지막 역할을 다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원제는 단순한 듯, 심오하다.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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