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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에 관하여

베터 콜 사울(2022, Better call Saul)

by 박 스테파노

'이야기'가 실종된 '드라마 어워즈'에 대한 관심


2022년 미국 LA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한국 극예술 부문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프라임 드라마 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배우 이정재)과 감독상(황동혁 감독), 게스트상(배우 이유미), 디자인상(채경선 감독 외), 스턴트상(심상민 무술 팀장 외), 특수 시각효과상(정재훈 슈퍼바이저 외)까지 총 6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으나 배우 박해수와 오영수, 정호연은 각각 남우조연상 후보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이후 한국 영상물의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수상'에 집중된 '이야기'에 대한 평가


수상 자체가 상당한 의미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매체를 통한 보도나 온갖 사회관계망을 통해 쏟아 내는 평가의 모습은 '몇 관왕', '최초 수상', 그리고 '아쉬운 작품상 불발'등의 어워드(award)에 대한 조망이 집중되었다. 상을 타고 못 타고 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으며, 몇 개를 타고, 상의 가치 비중이 얼마인가 하는 올림픽 관전평 같은 "메달 타령" 일색이었던 것이다. 하기야 감독마저 '작품상을 기대했다'라는 수상 욕심을 솔직히 드러내었고, 지구 반대 편의 일이라고 전쟁마저 '이겨라'하고 응원하는 세상이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다만, '이야기'라는 인류의 고유하고 숭고한 창작의 세계를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온 데 간데없고, 온통 '트로피 자랑'이니 씁쓸한 뒷맛은 쉬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드라마의 깊이


해외 영상물이라고는 스크린, 비디오, DVD 영화 트레일이 전부였던 "주말의 명화 키즈" 세대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 미드, 일드, 중드, 영드라는 해외 시리즈물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드라마는 사전 제작은 고사하고, 당일치기 납기를 맞추고 실시간 반응을 고려한 '쪽대본'이 성행하던 열악한 환경에 더해, 주 타깃 층이 "안방 프라임 시간"인 가족단위의 시청자들이었기에 이야기의 다양성도 한계가 있었다. 솔직히 조악한 구성에 허술한 이야기와 어설픈 연기가 더해진 완성도가 높을 수 없는 작품들의 집안 잔치였다. 그러다가 인터넷이라는 놈이 결국 모든 세상을 뒤집는다. 케이블과 무선 전파를 타고 음으로 양으로 찾아보는 해외 드라마의 세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로스트>, <24>, 그리고 <로마>까지.

해외 드라마의 고전들

'드라마'의 어원은 '드란(dran)'이라는 희랍어에서 기원한다. 이 단어의 뜻은 '행동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연극, 희곡 등 극예술의 총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종의 문학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소위 '극적인 요소'인 전개와 진행의 행위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예술 장르로 이해된다. 복잡한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여러 장치와 분석과 기술들이 겹겹이 자리 잡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드라마의 근본은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드라마는 좋은 드라마라 평가받기 어려운 이유이다.


이번 제74회 에미상의 주요 수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그 '이야기'의 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보인다. 물론 <오징어 게임>도 포함해서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이번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좋은 평가를 주고 싶은 작품은 <베터 콜 사울>이다. 십여 년 전부터 입소문을 통해 '꼭 보아야 할 미드'로 꼽히던 <브레이킹 배드>의 스핀오프 작품으로 벌써 여러 해 동안 시즌을 거듭하고 있었다. 메인 스트림이 아닌 스핀오프가 시즌이 지속되며 이야기에 이야기를 쌓으며 어느새 작품의 뛰어남을 인정받은 것이 참 대단해 보인다.



'타임머신'이라 쓰고 '후회'라고 읽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베터 콜 사울>은 본류 작인 <브레이킹 배드>의 등장인물 중 가장 매력 있는 캐릭터인 변호사 '사울 굿맨'의 이야기다. 스핀오프라고 생각 들지 않을 만큼 <브레이킹 배드>를 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야기에 진입할 수 있고, 인물의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과 사울 역의 밥 오든커크의 능청스럽고 치밀한 연기에 쉽게 놓지 못하는 작품이 되었다. 작품의 매력 포인트 한가운데에 "이야기"가 있다. '사울'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제법 다채롭고 충분히 깊은 울림이 있다.

SNL작가 출신의 '밥 오든커크'


구박덩어리였던 철 모를 시절을 나름 나름의 수완으로 극복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정상 범주 호소인'들의 기득이 판을 친다. 한 번 도태된 존재에게 재기와 회복 따위는 거저 주지 않는 냉혹한 세상이 펼쳐진다. 사울은 그때 결심하고 결정한다. 멀쩡한 척 주류에 끼어들기보다는 나사가 여러 개 빠진 별종으로 이 무시 무시한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로 한다. 돈이 되면 사건의 모양새 따위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위법과 범법, 편법과 권모술수의 경계를 줄타기하는 것은 다반사가 된다. 드레스코드도 주요 타겟층에 맞춰 한껏 요란을 떨고, 사무실도 법률 사무소인지 흥신소인지 분간 어렵게 운영한다. 그리고 화룡점정. 이름도 '제임스 맥길'에서 '사울 굿맨'으로 개명한다. ('사울'이라는 인물이 성경과 유대민족 역사에서 어떤 인물인지 떠올리면, 딱 들어맞는 개명이 아닐까)


드라마는 이야기 속에서 꾸준히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마지막 시즌 마지막 회차에서 직접 거들어 이야기한다. 마지막 시즌(시즌6)은 FBI의 수배를 받게 된 사울이 외진 북부에 숨어든 모습 중간 중간에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플롯으로 회차를 꾸려 간다. 특이한 것은 도피 생활인 현재는 흑백으로 회상하는 과거는 컬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낯설게 하기의 작법으로 여기었으나 회차가 거듭하면서 마지막 회차에서 선명해지는 주제, 작품 정신에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 사울의 회상 장면은 공통된 대화의 소재가 있다. 바로 '타임머신'에 대한 이야기다. 사울은 삼류 변호를 준비하는 도중에, 아내와 침대에서 나누는 이야기 가운데, 월터 화이트(<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와 도피 생활을 하는 와중에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 거냐?'라고 물어 댄다. 마치, 습관 된 운동선수의 루틴이나 영업사원의 숙달된 라포(rapport) 같이, 상대가 누구든지 묻는다. 대부분의 대화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짧은 대답을 하거나 웃고 넘어 가지만, 고지식한 말기 암환자이자 마약 제조상이 된 전직 과학교사인 화이트는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타임머신 같은 것은 과학자의 양심을 걸고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반복되는 사울의 질문에 역정을 내며 쏘아붙이듯 이야기한다.


"당신은 타임머신 따위가 아니라,
지금 '후회(regret)'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잖아요?
아닌가요?!'


드라마 <베터 콜 사울>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후회에 관하여"가 될 것이다. 이 단순한 주제의식으로 인물을 파편화시키고 사건을 중첩시키며 장면과 장면이 상호 교차하며 이야기로 주제를 선명히 드러낸다. 참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후회'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 아니에요?


'코드'와 '클리셰'에 가려진 '이야기'


최근 한국 드라마의 수상과 흥행의 이면에 서서, '좋은 드라마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추석 때 스트리밍 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 대해서도 SNS와 포털 뉴스는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대박 작품의 흥행 코드와 수작의 클리셰를 잘 적용하고 묵직한 캐스팅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솔직히 개인적인 평가는 '호들갑'이 넘친다는 생각이다. 돈이 되는 콘텐츠가 반드시 훌륭한 작품이라고 등치 되는 것은 아니니까. 거기에 그 이유가 '코드'와 '클리셰'라면 더욱 괴리가 생기기 십상이니까.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는 한국에 대하여 양가적인 고민이 생긴 듯하다. 독특한 콘텐츠의 생산지로서의 매력과 기민하고 역동적인 콘텐츠 소비 시장으로서의 중요도 사이에서 양손잡이가 되려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최근의 행보는 갸우뚱을 넘어 실망과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의 집: 공동 경제구역>은 차용과 인용보다 적극적인 리메이크 전략을 썼으나, 문화와 사회 가치의 충돌, 그리고 캐스팅 실패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후에 영화 <리얼> 이후의 최대 '괴작'인 <카터>, 그리고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우당탕탕 소란극 <서울대작전>은 실패라 해도 반론이 어려울 것이다. 고유하고 독특한 생산기지와 기민한 소비 시장 모두를 잃을지도 모르는 방향성만 탄로 나고 말았다.


http://omn.kr/1zjth


흥행의 문법이란 것은 그저 결과론일지도 모릅니다. 대중음악의 소위 '황금코드'라는 것도 의도하기 시작하면서 탄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와 이야기의 창작도 그러할 것입니다. 남들의 요행을 정리된 공식이라 생각하며 쉬운 길이라 생각하는 순간, 진리를 힘겹게 모방하던 그 예술의 본연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모방은 모조가 아니니까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까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말해 준 마틴 스콜세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기사 본문 중-



최근작 <수리남>은 전작들의 아쉬움을 달래 줄 수 있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작들의 클리셰가 집대성되었다느니, 흥행 코드를 잘 스며들게 했다느니, 이전에 없었던 글로벌 스토리 텔링이라니 하며 찬사들을 쉽게 내어 놓는다. 솔직한 생각으로 반만 동의한다. <수리남>은 알려진 대로 1990년대 한국계 마약상 조봉행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야기 자체가 실화 기반이니 실패의 확률을 떨어 뜨려 준다. 그리고, 온갖 할리우드 영상물의 요소들을 짜깁기한다. 바로 그놈의 '클리셰'와 '코드'라는 것들이지요.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변죽에 힘을 주다 보니 극의 한가운데인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이 빠져 버린다. 바로 '그럴듯함'이라고 풀이되는 '핍진성'이 결여된 것이다.

넷플릭스 <수리남>

이야기의 힘은 '공감'에서 측정된다. 이미 겪어 보거나 듣고 자랐던 과거의 이야기, 전설ㆍ신화ㆍ역사는 그래서 힘이 있다. 창작된 허구는 그 장르를 막론하고, 지금 나에게 어떤 바이브로 공감을 주는가에 있다. 영화 <터널>과 <백두산>의 하정우가 그대로 나와 무시 무시한 마약 카르텔과 맞짱을 뜨는 모습은 클라크가 슈퍼맨이 된 것 같은 비현실성을 준다. 거기에 더해 <신세계>에서 튀어나온 황정민은 여전히 투머치 하기만 하다. 연극 무대에 맞는 연기가 아직도 유효한 것이 미스터리처럼 느껴지니까. 실화를 만화처럼 만드는 재주는 윤종빈 감독의 '영화 학도'로서의 고집처럼 보이기만 할 뿐이다.


<오자크>, <브레이킹 배드>, <나르코스> 등의 증명된 작품이 레퍼런스로 쓰였다고 느껴진다. 아는 척하면서 '클리셰'라고 하는 레퍼런스 차용은 그 거죽에 그친다면 그저 단순 인용, 차용, 표절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아쉬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크게 부풀어 오른다. '흥행'이 목적인 대중 예술은 금세 시들어지게 마련이다. '좋은 작품'은 그저 욕심과 욕망만으로는 만들어 내기 어렵다. 과거의 시간과 허구의 공간을 현재의 공감으로 이끌어 내는 일부터가 시작이 되겠다. 하지만, 지금 문화와 사유의 영역에서는 '지적 허세'가 넘쳐 난다. 누군가 '좋더라'하면 이리 저리로 쏠리기 마련이다. <네 멋대로 해라>조차 보지 않은 이들이 조력 자살을 한 영화계의 큰 별(장 뤽 고다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이다. 마치 <전쟁과 평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서문만 펼쳐 보고선 똘스또이와 도스또옙스끼를 거들먹거리는 허세꾼처럼 말이다.


읽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세상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증명된 조각조각을 모아 내면 성공이 된다는 거대한 망상이 넓게 퍼져 있다. '소프트 파워'라는 측면에서 흥행과 성공의 요소를 그저 '코딩'만 해서 훌륭한 '소프트웨어'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좋은 소프트웨어는 지난 시간과 경험의 레거시가 자산이 되고, 미래를 조망하는 깊은 고민에서 '이야기'부터 쓴다. 비즈니스 모델링, 프로세스 도식화, 그리고 스토리텔링부터 하고 그에 맞는 프로그래밍 언어와 개발 프레임을 선정하고, 기민하고 치밀한 코딩으로 디테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의 무지한 발언에 의해 전가의 보도로 여기어지는 '코딩 학원'에서 그 '이야기'는 절대 배울 수 없다.

코딩이 만사형통일까

'후회'라는 것은 한 번의 이불 킥으로 날려 버리고, 나만의 이야기를 써야 할 때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독특한 것이니까. 장 뤽 고다르의 말로 잘난 체 하며 마무리해 본다.


"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만 찍으면, 당신은 TV 영화를 만들 뿐이다. "

"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
장 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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