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은 그냥 갈라 치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흔한 세대차이
야구를 참 좋아라 합니다. 그 좋아하는 이유를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지만, 게임이 끝나거나 시즌이 마무리되면 저마다의 기준으로 '평가'를 내놓기 마련입니다. 팬의 입장에서 아쉬움과 응원의 감정으로 야구 기자나 해설진의 각자의 기준을 가진 분석으로 내어 놓는 평가는 각양각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시즌으로 다음 시즌을 조망하는 '예측'에는 더욱 민감한 반응들이 오가게 되지요.
https://alook.so/posts/mbtPJ3
야구가 그런 "평"들이 난무하는 이유는 스포츠 종목 중에 지표라고 불리는 '유의미한 숫자'들이 쌓이는 종목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통계와 확률에 의한 분석 기법과 실제 게임, 운영 전력들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영화 <머니볼>에서 통계에 능한 MBA 수료생을 고용해 '출루율 신화'를 만든 야구단장의 이야기부터, 세이버 메트릭스니, 랩소드와 트랙맨 시스템 등 측정장비, 그리고 전력분석팀장이 감독이 되기도 하는 묘한 스포츠입니다. 특히 91학년도 학력고사는 '최고 난이도의 수학 문제'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때의 '문제적 문제'가 야구 승률 문제였으니, 숫자와 야구의 관계는 밀접하다 할 수 있습니다.
https://alook.so/posts/YytKYG
나 같은 꼰대들이 이번 선거를 너희들 같이 젊은 친구들 때문에 망쳤다고도 하더라.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도 아주,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시건방진 어른의 자의식인지 금방 깨닫게 되었어. 비밀투표라고 죽어도 가르쳐 주지 않아 잘 모르겠다만, 너희 또래의 선택은 너희들의 정치와 사회적인 시뮬레이션으로 신중히 선택한 것이라 존중하련다. 다만, 그 선택이라는 것에는 늘 '책임'이 따른다는 것만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본문 중-
야구 이야기를 주저리 꺼내는 이유는 바로 '선거 후 분석'이라는 허황된 이야기들 때문입니다. 특히 "통계 지표"의 사용에서 더욱 의아해집니다. 야구는 '측정되는 지표'가 있습니다. 명확히 결과를 합의된 기준으로 표기하고 도출합니다. 그래서 야구는 '공식 기록원'이 자격 부여가 필요한 종목이기도 합니다. 타석수, 안타수, 타율, 장타율, 실점, 평균자책점, 그리고 그에서 파생된 OPS, 세이버 메트릭스, 득점 생산율, 승리 기여도 등이 집계(물론 여기에도 비판괴 반론이 있지만)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집계가 되는 것은 '투표수/율'과 각 후보의 '득표수/율'뿐입니다. 그 이상은 지역과 투표 참여자의 성비와 연령 등만 측정됩니다. 가장 중요한 실제 투표에 대한 태깅과 추적할 인식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밀투표'가 원칙이니까요.
물론 설문식 조사에 의한 '출구조사'가 근접한 예측을 하였고, 설문조사와 연구자의 경험과 인사이트로 '보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결과작으로 '추정'이 될 뿐입니다. 그 추정으로 그래프도 그리고, 색도 칠하고, 각자의 논평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그 논평이 어찌 익숙하고 뻔해 보입니다. "2030 세대론", "젠더이슈", "정권 심판과 안정론" 등 선거 이전의 각자의 '전망'을 끼워 맞추기 바빠 보이는 것은 그저 제 '느낌'일까요? 세대 투표와 성별 투표성향의 정확한 지표, 사실이라 할 수 있는 팩트 펙터는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럴 것이다 하는 전망에 결과를 붙입니다. 근거는 각종 설문과 여론조사의 '보정'일 뿐이지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다를 바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기대'보다는 '탓'이 먼저 나오는데
http://naver.me/xeURGYfw
20대(18~29세)는 3월 2주 차 조사에서는 긍정 전망(51.5%)이 부정 전망(40.5) 보다 많았지만 이번 조사에서 부정 전망은 10.0% p 하락한 41.5%, 긍정 전망은 9.5% p 상승한 50.0%로 조사됐다. -기사 본문 중-
선거가 끝나고 '탓' 이야기가 눈에 많이 띕니다. 0.73%의 석패에 대한 탓이 2030이라고 뭉뚱그려진 이들에게 향해집니다. 그냥 자의적 결정 없이 태어난 시대의 환경과 개인의 난관을 토로했는데, '조롱받아 마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선거라는 게 투표라는 게 개인의 한표 한 표가 쌓이고 쌓여 양대 각 진영에 1천6백만 표 씩이 모인 것인데, 콕 집어 "너희들이 망쳤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이상합니다. '비밀 투표' 아니었나요? 아직 세대별 투표 참여율도 공개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물론 간신히 이긴 후보자가 '나이스'한 행보를 보였다면, 근거 미약한 추정적 지적에도 괜찮았겠지만, 첫행보부터 심상치 않으니 찜찜하기 마련입니다. '똑바로 하세요'라고 여론으로 아우성치지만, 그저 '고요 속의 외침'같이 권력을 손에 쥐었다 생각한 이들에게 뻐끔거림으로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내 한 표가 2번을 향했던, 그렇지 않았든지 2030 남자라는 이유로 답답합니다. 아차 싶은 후회이거나, 손쉽게 선 그어 버리는 분류 놀이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또 '선 긋기 놀이구나'하는 조소 어린 시선으로 모든 선거 평을 뒤로 넘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리지널 콘텐츠에서 박선경 교수의 글을 보고 그 어줍지 않은 조소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을 모두라 생각 말자던 스스로의 편견을 거둔 것이지요.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아주 잘 정리해 준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할 때, 우리는 종종 세대별로 성별로 혹은 지역별로 나눠진 집단이 마치 하나의 존재인 양 해석하기도 한다. 20대 남성 내에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 ‘20대 남성표는 모두 윤석열 후보의 것’이라는 계산으로 호도되고, 40대 내에서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으므로 40대는 굳건한 민주당 지지집단이라고 이해된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세대포위론도 이런 계산에 바탕한 것이다. -본글 <20대 대선 투표에서의 세대갈등? 그게 아니고> 본 문 중-
세대 "충돌"이 아니라 세대 "차이"
흔히 '세대차이'를 입에 올립니다. 최근에는 그놈의 '신조어'때문에 입버릇처럼 혀를 차곤 했습니다. 미국 회사를 다녔을 때 "약어"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한 때 헬프데스크에서 "약어"를 해석해 주는 일도 있었을 만큼, 미국 기업 문화의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한국은 '표의문자 한자표현'이 있어 제법 짧은 음절로 많은 의미를 표기할 수 있지만, 영어는 '줄여 쓰기'가 약어 외에는 답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온통 줄여 쓰니, 티브이에 나오는 지막이 오히려 눈을 가리게 됩니다.
"세대차이"란 이런 '문화'의 변화와 그에 따른 유행과 수용의 정도 차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화적인 양태가 세대를 교차하며, 순환되는 경험도 적지 않게 목도됩니다. 지금의 패션을 보면 90년대의 디자인이 생각나고, 이따금 인테리어 트렌드인 '미드 에이지(mid-age)'는 1960년대의 것이니, 제법 30년 주기의 유행은 순환되는 것 같습니다. 그 유행은 이전 세대에 대한 '반-anti'의 작용으로 성행한 것이기도 합니다. 90년대 청년들은 소위 'X세대'로 이전 세대인 586세대에 대한 반작용이 작동하였습니다. 87년의 봄을 이끈 선배 세대의 애매한 리더십과 기본적인 역량에 의문이 가득했던 세대입니다.
지금의 2030 세대의 선배 세대는 누구일까요? 2000년 대의 황금기를 거친 X세대의 다음, Y세대이자 밀레니엄 세대라고 하는 "0X"학번들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전 선배들이 기회를 쉽게 가져갔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X세대가 586들을 바라보듯이 말이지요. IMF로 얻은 충격은 이전 선배들의 너무나도 쉬운 '취업'과 비교되며 상대적 절망감을 주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어떤가요? 마찬가지의 박탈감을 호소합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정보가 넘치고, 목소리를 제법 낼 수 있고, 정치세력들이 관심을 주는 척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https://alook.so/posts/a0t0KW
취업은 어렵고, 공부는 더 어렵고, 경쟁은 버겁고, 나만 외롭고, 남들만 행복하고, 이 모든 게 내 탓은 아닌 것 같고, 나의 포기는 끈기의 부족이 아니라 어쩔 도리 없는 현실 탓 이리고 말합니다. 꼰대 중의 꼰대의 마음으로 그 "징징거림"이 참 거북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꼼수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연일 정치권의 구애에 마치 중요 존재가 된 것만 같아, 아우성은 드세집니다. 아버지 선배 세대들의 잘 못으로 기인한 잘못이라는 생각에, 철없는 정치인은 그 아버지들을 포위하라고 "세대 결합론"이라는 것을 내어 놓습니다. (중략) 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을, 그들의 괴로운 호소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봅니다. 기시감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익숙하고 귀에 익은 이야기들입니다. 바로 제가 아버지에게, 저의 세대 아들들이 아버지들에게 대들며 반항하던 그 마음과 똑같이 닮아 있습니다. 내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 않을 터인데 말이죠. 저도 어느새 그때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중-
청년과 장년, 노년의 세대에 '차이'는 있습니다. 시대적 환경이 다르기에 서로의 가치 우선순위가 변동되기 때문입니다. 진화나 퇴보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가 인류의 궤적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된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도전과 그에 대한 응답(challenge and response)"의 연속이라는 것이지요. 흔히 '응전'이라고 번역한 일본어 중역을 싫어합니다. response라는 것을 그저 "대응"이라고 해석되면서, 세대는 더욱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도전과 그 싸움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합니다. 도전에 대한 대응은 "대결"과 "적응"의 선택지가 있는데도 말이지요.
나이가 든다고 청년기의 가치 우선순위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아들들(딸들)이 아버지들(어머니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정치지형이 그대로 가겠지요.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 그들의 아들들은 다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고, 개발과 발전보다 분배와 보편의 가치에 무게를 둘지도 모릅니다. 참 기묘한 역사의 순환이고, 시대정신의 교차라고 생각이 듭니다. 적대시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들어주고 이해하는 기울임이 필요한 때입니다.
'숫자'가 말할 수 없는 '마음속'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의 사람 속은 알 수 없는 것이겠지요. 숫자는 숫자일 뿐입니다. 그것도 측정되지 않고 추정되는 숫자라는 것은 더욱 진실에 허술하게 접속되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를 시작한 야구 기록도 실제를 모두 반영하지 않습니다. 빗맞은 안타나 잘 맞은 안타나 1개의 안타로 기록됩니다. 묘기에 가까운 다이빙 캐치에 잡히거나 심판의 오심으로 당한 삼진도 모두 1 아웃으로 기록됩니다. 진루타와 희생타는 기록 요건이 강화되었고, 세이브와 홀드, 승리 투수 요건은 타인에 의해 깨지기도 합니다.
명장이라는 감독은 기록의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실제'를 기억합니다. 주자 2루에서 힘겹게 밀어 친 내야 땅볼로 주자가 진루가 되고, 후에 득점이 되더라도 정작 그 선수에게 보탬이 되는 기록은 감독의 기억 속에만 남습니다. 간혹 야구 기사와 중계로 진실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현장에 가지 않은 기자는 8회에 성급히 송고를 하고 자리를 뜨고, 게임은 뒤집히면 가짜 뉴스가 나갑니다. 해설자는 투구의 궤적, 회전, 그립, 속도를 판단해 구종을 설명해야 하지만, 학습 없이 관성에 젖어 느낌으로 오판하기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깟 공놀이'도 이러한데, 일상과 생활에 지대적인 정치는 어떠한가요? 집계도 되지 않는 추정적 사실로 이리저리 선을 그어서 서로 갈등을 부추깁니다. 여론조사와 대략적인 연구가 "수치적"으로 사실에 근접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방법론과 연구의 노력으로 대체로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가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투표의 성향이, 결과가, 그리고 분석이 한 장 한 장 기표된 각자의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지는 않기 따문입니다.
어른이 지면, 또 어른이 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19063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할 때 나는 뭘 남기는가. 말을 남기고 가자. 사실 그 사람의 진실한 목소리가 담긴 건 말이다. 내가 없는 세상에는 글보다도 생생한 내 육성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자." -이어령 <내가 없는 세상> 중-
최근 이어령 선생님의 유고 같은 프로그램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와 그분 행적의 평가를 떠나, 글쟁이, 말쟁이, 문화꾼으로서의 행보는 존경하기에 눈에 담아 보았습니다. 역시는 역시구나 하는 선생님의 말씀들 중에 '세대 포위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2030들을 이기려 들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세대 포위가 아닌 세대 균형론에도 적용하며 젊은 세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080이나 4050이 2030을 이기는 날이면 대한민국은 끝난다. 2030이 대단히 잘나서가 아니다. 우리가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다. 윗세대가 이기고 젊은 세대가 설 자리가 없다면 내일의 한국은 사망이 되기 때문" -이어령-
세대의 균형은 치열한 투쟁이 아니라 이해와 양보의 적응이라는 것이지요. 젊은 청년들의 주장과 이야기들이 모두 옳고 정당하며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결국 인간의 운명과 인류의 역사라는 것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은 '시간'이라는 것이지요. 탄생과 성장, 노화와 죽음은 옳아서, 정당해서, 잘나서 달라질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자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4050이 2030을 이겨 먹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 2>에서 청년 연기자들이 나주 공산 마트에서 열흘간 장사를 합니다. 에피소드 중 허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진 할머니가 버스 차편을 묻다가 지긋이 카운터를 보는 출연자에게 이야기를 건넵니다.
"요즘 청년들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은가 봐... 새해에는 그저 좋은 일들만."
제가 혈기 왕성하던 시절, 불과 10년 전까지 그렇게 부정하고 비난하던 아버지, 어머니들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독재의 부역자라고, 천박한 자본주의자라고 일갈하던 제 어리석은 반항에 부모님들은 진 것이 아니라, 져 주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느지막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저 내 아들이고, 딸이며, 나보다 더 살 날이 많이 남은 세대에 대한 온정과 양보였던 것이지요.
더 이상 "세대, 어쩌고 저쩌고..."의 말들은 그만 듣고 싶습니다. 선을 그어 놓는 의도 가득한 사람들의 꼼수에 걸려들지 않기로 합니다. 선이라는 것은 면과 면이 맞닿아 있다는 명징일 뿐이지, 누군가 다이어그램처럼 묶음으로 그어 놓은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저 맞닿은 저 다른 면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화롭게 채워나가면 세상이라는 도화지에도 예쁜 꽃이 피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나의 윗세대 아버지의 세대, 그 어른의 시대를 말과 글로 열심히 채워주신 이어령 선생님의 '안녕, 여러분, 잘 있어요."를 나누어 봅니다.
https://youtu.be/5RNMEVaMu_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