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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ug 13. 2016

덕혜옹주 (The Last Princess, 201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타협에 빼앗긴 작가주의

조선시대에 왕실에는 후궁 소생의 수많은 옹주들이 있었지만 정비 소생의 공주보다 서열이 낮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역사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인물로는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와 망국의 황제 고종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덕혜옹주를 들 수 있다.

고종에게는 일찍이 9남 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렸을 때 죽고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명성황후 민씨 소생의 순종 이 척, 귀인 장씨 소생의 의친왕 이강, 황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 이은, 복녕당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그 때문에 덕혜옹주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애지중지 키워졌다. 덕혜옹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국인들에게 조선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발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몇 년 뒤 어머니 귀인 양씨의 죽음으로 덕혜옹주의 심리 상태는 벼랑 끝까지 몰려 정신분열증으로 비화되었지만 냉혹한 일제는 정략결혼을 통해 그녀를 더욱 비좁은 새장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때문에 병세가 심화된 그녀는 딸과 생이별하고 사방이 가로막힌 정신병원에서 청춘을 흘려보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했지만 이미 영혼이 떠나버린 그녀의 육신은 아득한 유년의 기억만을 남긴 채 파랑새처럼 저 세상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 덕혜옹주 (1912~1989): 한국사 인물사전 中-



매력적인 소재, 하지만 뻔한 전개


영화 <덕혜옹주>의 이야기는 인물사전이 말해주는 실제 인물인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이미 소설로 잘 알려진 영화의 원작은 이러한 실제 역사적 인물의 삶에 작가의 상상을 더한 Faction의 전형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심상치 않은 시대에 태어난 유별난 삶의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삶은 이야기로 전달하기에 적절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더해 역사적인 시대의 정신이 현재의 시대상과 함께 울림이 올 때 반향은 더욱더 해지게 된다. 4년 만에 충무로로 돌아온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는 다분히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앞세워 기획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들 중에 소위 ‘감독론’이라 평하며 말할 수 있는 ‘작가주의적’ 색을 띤 감독들의 복귀작에서는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러하였고,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도 그러하였다. 작가주의라는 아집으로 보이는 작품세계의 구현은 자본이 지배하는 ‘영화산업’에서 고립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라는 개념을 작가주의에서 웰메이드 흥행작으로 애써 방향 전환한 이 중년 감독들의 행보에 사실 무어라 지탄할 생각은 없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자본의 힘에 편승하지 않고서는 맞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작금의 영화 제작의 환경을 깊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전문가도 아니고 감독의 머리에 들어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의 추측이 100%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만든 영화’에 대해서는 논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인물, 그것도 의외의 숨어 있던 인물의 생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매력적인 결과를 기대하게 한다. 최근 미국 재즈 음악의 두 거장인 ‘쳇 베이커’와 ‘데이비드 마일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연달아 두 편 개봉되었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와 <마일스>는 실제적 인물의 삶을 차용하면서도 행간의 에피소드나 이야기들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맛을 내고 있다. <덕혜옹주>도 이러한 사실과 허구의 적절한 배치와 조합이라는 형식으로 문학작품으로 먼저 선을 보였고, 그를 근간으로 영화를 만들어 관객을 만나고 있다. 더욱이 주권을 잃은 식민지화된 나라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라는 인물은 설정만으로 많은 역사적 함의와 개인의 역경을 교차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 굴욕적인 한일합방으로 주권을 왜국에 내어 주고 명색만 조선왕조의 황실로 버티는 고종의 막내딸, 그 수태와 탄생도 고종이 일본과 친일세력에 의해 유폐되다 시피한 시기에 일어났다. 그 어미도 정실 비나 빈이 아닌 소주방 나인이었고, 대를 이을 아들도 아니기에 왕실에서 가장 미력한 ‘옹주’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뿐인가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독살로 전해지는 늙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나라 황실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까지 남아 마지막 목격자가 되는 인물이니 기고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완성도는 이 소재의 설정만으로 과반 이상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이제 나머지 반도 안 되는 완성도를 만들어 가는 것은 오롯이 감독과 제작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덕혜옹주>의 작품 완성도에 대해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타협의 결과는 결국 '어정쩡'


허진호 감독의 지난 영화들을 생각해 본다. 대표작이라 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에서 허진호 감독은 ‘사랑’ 이야기꾼으로 등극한다. 뻔한 멜로가 아니라 내 삶에서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제적 사랑의 이야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전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상상 같은 우화나 신화’였기 때문이었다. 운명 같은 만남으로 사랑에 빠지고, 신화같이 변하지 않은 사랑을 하고, 나중에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하는 그런 사랑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의 작품에 드러나는 사랑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사랑보다 육체적인 사랑도 고귀한 것이고, 헤어지는 상황도 찌질 하기 그지없다. 불같이 타오르는 감정으로 사랑이 시작되지도 않으며, 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인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사랑이야기는 매우 실제적이고 일상적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신선하고 새로웠다. 영화 <덕혜옹주>에서도 사랑이야기가 중심으로 버티고 있다. 역사적인 상황에 기고한 여인의 삶이 조망되면서 그 사랑의 모습이 약해 보이긴 하지만, 덕혜(손예진)와 장한(박해일)의 사랑의 이야기는 이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의 감정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덕혜가 그냥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범인의 범주였다면 다르겠지만, 덕혜의 삶은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허진호의 사랑이야기의 특색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들의 일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질곡 같은 역사와 시대에서의 개인의 기구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중심을 잡아 가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에서도 주춤주춤하거나 방향을 잃은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비슷한 소재였던 작년에 재개봉한 <마지막 황제, 1988>를 떠 올릴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황제와 옹주, 그리고 조선과 청나라의 상황이 적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의 범인이 아닌 개인의 삶에 대한 조망은 유사했을 것이다. <마지막 황제>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외세의 침입과 혁명 등을 겪으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삶들에 고뇌하고 번민하다가 결국 나중에 정원사가 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덕혜옹주>에서 덕혜도 역사적인 여러 평가들이 있겠지만 개인으로 조망한다면 그녀의 삶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아쉽게도 그 한 여인으로서의 ‘덕혜’를 찾기 쉽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황실의 볼모로서의 덕혜와 그를 극복하기 위해 음지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끝내 조국을 그리워하다 정신분열이 오는 그런 이야기에서 오롯한 ‘덕혜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에서 그리는 ‘덕혜’의 모습이 입체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이어서 그러리라 생각한다. 다분히 의도되고 설정된 덕혜의 모습은 이 나라 황실의 마지막 자존심이고, 아버지와 어머니 나라인 조국을 잊지 못해 일상적인 삶도 누리지 못하는 그런 역사적 비련의 주인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한글학교를 지원하고 동원 노동자에게 각본에 없는 연설을 하고, 영친왕과의 망명을 위해 모험 길을 나서는 그러한 이야기에 중심이 있다 보니 실제적인 사실성은 평평한 역사책으로 변모하게 된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웰 메이드의 시대: 빼앗긴 작가 정신에도 꽃은 피겠지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이 어렵거나 무거운 영화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은 영화라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소득은 있다. 무엇보다 타이틀 롤인 덕혜옹주를 연기한 손예진의 재발견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만 가득한 그녀가 <비밀은 없다>에서 시동을 걸더니 <덕혜옹주>에서는 여자배우 혼자서 타이틀 롤을 끌고 갈 수 있는 배우의 반열에 오른 듯하였다. 특히 해방직후 덕혜가 딸 정혜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다 좌절된 순간 매국노 한택수(윤제문)을 만난 후 보이는 오열을 대신한 웃음은 압권이었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영화 <덕혜옹주>는 아쉬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글 모두에 작가주의 감독들의 어쩔 수 없는 ‘타협’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들었다. 사실 <덕혜옹주>를보기 이전에 이러한 선입견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작가주의적 작품의 완성과 자본주의적 흥행의 저울질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롯한 허진호 감독의 이야기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여러 의견은 있을 것이다. 정작 작품을 만든 감독이나 제작자는 나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타협’은 늘 절름발이 같은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밖에 없다.



영화관에는 <덕혜옹주>를 보러 온 발길들이 많았다. 특히 중장년 이상의 관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마케팅 관점에서 target segement에 대해 분명한 전략이 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산업의 관점에서 사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전략은 잘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향을 잘 레버리지 한 지금의 현상이 보다 좋은 ‘작가주의 작품’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트레이드오프이길 바랄 뿐이다. 현재 타협의 결과로 이루어진 자본의 힘으로 다음에는 보다 색깔 진한 ‘작가’의 영화를 기대해 본다. 왜냐면, 자본은 무섭지만 강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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