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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Aug 21. 2016

사랑에 미치다('15,Touched with fire)

빛나는 '광기'의 랩소디, 사랑... 그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시를 쓰며 살고 있는 등단 시인 카를라(케이티 홈즈)는 어느 날 갑자기 지워진 과거의 기억을 찾고 싶어 진다. 부모님 집에 들러 예전 사진을 들추어도 옛 기억들은 온 데 간데없듯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심한 조울증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있어 병이 오기 전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치료를 받은 병원에 들러 의료기록을 보기로 한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엉겁결에 조울증 클리닉에 입원당하게 되고 만다. 답답한 심정으로 낙담하고 있던 그녀는 울며 겨자먹기로 집단치료 시간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시(랩)을쓰며 살아간다는 ‘루나’라는 필명의 마르코(루크 커비)를 만나게 된다.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동질감과 공통점을 느끼는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둘은 연인이 되어 예술의 창작과 함께 느끼는 교감들을 보듬어 가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큰 시련이 다가온다.


창작을 위한 ‘제정신’으로부터의 일탈

영화 <사랑에 미치다>의 원제목은 <Touched with fire>로 심리학자 ‘케이 레드필드 제이미슨’의 책의 제목을 동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심리학 서적은 일종은 상관관계에 대한 실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조울증’과 ‘예술적 창의력’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증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 바로 직전에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예술가들의 이름이 상당기간 나열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대급’ 예술가들은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잘 알고 있는 바이런, 고흐부터 차이코프스키, 헤밍웨이 까지 사실 확인을 떠나 오랫동안 남을 ‘걸작’을 완성한 예술가들은 극단적인 ‘조울증’을 알았거나 그에 의해 영향을 받아 창작을 하였다는 그런 상관관계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영화는 ‘조울증’에 걸린 두 명의 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세상살이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한글 제목 <사랑에 미치다>는 은유적 표현이라기보다 글자 그대로 ‘‘미친놈, 년’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설명을 직선적으로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소품이었다.


카를라나 마르코는 병원의 처방이나 가족의 권유대로 약 복용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한 가지 ‘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시(詩)’를 쓴다는 것은 감정에 몰입하여 그 감정에서 글자들을 끌어올리는 일인데, 냉정하고 평정한 상태의 감정에서는 도무지 시작(詩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High’의 상태에서 내뿜어 내는 것이 시적 언어가 되고 감정에 충실한 표현이 된다는 것. 예전에 마리화나나 대마초를 하는 예술가나 연예인들이 그것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창작’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떠 올리면 상상할 수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일반적인 일상을 보낼 수 없고 자신의 조울의 상태를 예술의 창작으로 끌어올리는 그들에게는 처방에 의한 ‘정상’ 적인 삶은 죽음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전에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읽었던 짧은 이야기에 ‘시’는 술에 취한 채 써야 하고 ‘산문’은 술을 끊고 써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모든 산문에 해당되지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생산물을 내야 하는 연재물이나, 조사나 취재가 필요한 이야기 혹은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글들은 분명 ‘이성’이 지독하게 지배하게 하는 환경의 조성은 필요하다. 반대로 ‘시’가 되었든 심정이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제정신’에 일구어 내기 정말 어렵다. 이성이 개입하는 순간 감정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감성의 통로가 막혀서 일수도 있지만, 이성이 들어와 생각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내면적인 검열은 심화되기 때문이다.‘나의 감정’에 중심이 있지 않고 ‘남들의 시선’이 작용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창작자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이기 때문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

영화 속에서 카를라의 부모와 마르코의 부친은 둘의 사랑에 동조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적극적인 반대를 하다가 카를라의 임신 사실을 알고 울며 겨자먹기로 적극적인 치료를 전제로 둘의 결합을 허락하게 된다. 이 부모나 정신과 상담의들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정상’적이지 않은 그들의 정신상태와 생활이며, 이것들이 결국 그 둘의 삶을 망쳐 놓을 것이라는 결과에 대한 확신이다. 조울증에 걸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생활을 하는 그들은 ‘비정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이라는 것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규범으로 정해 놓은 법과 사회 규칙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이나 불경에, 혹은 선인이나 위인들의 덕담과 격언에 있는 그런 삶의 모습일까? ‘정상’과 ‘비정상’을 단칼에 무 자르듯 평가하는 사람들도 정작 그 ‘정상’에 대한 기준과 세부 설명을 요구하면 제대로 꺼내 놓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혹 세인들이 말하는 ‘정상’이라는 것이 ‘평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난 특별한 욕심 없어. 그냥 평범한 삶을 원할 뿐이야.”

드라마나 소설 속 대사 같은 위와 같은 말에는 ‘정상적’인 화자가 ‘비정상적’이었을 듯 한 청자에게 경고나 푸념으로 던지는 속셈이 들어 있다. 과연 ‘평범’한 삶은 ‘정상’적인 삶일까? 그러한 기준에서 ‘평범’을뛰어 넘은 ‘비범한’ 삶은 분명 ‘비정상’에 들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비범한 자는 평범한 시대에 정상일 수 없는 것인 것이다. 이를 떠나 한 사람의 인생의 곡선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평균의 곡선에 선형(linear)하게 밀착하여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때는 비정상의 범주로 뛰어넘기도 하고 비범의 영역으로 들어 서기도 하며, 낙오와 잉여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할 것이다. 삶이라는 게 들쭉 날쭉널 뛰듯 펄스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 당연한데도 ‘평균’과‘평범’을 이야기하며 ‘정상적’인 인생을 강요받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인생일 것이다.





미쳐야 산다

카를라는 아이를 가지면서 적극적 치료를 약속하고 마르코에도 약 복용이나 치료를 거르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하지만 마르코는 그럴 수 없었다. 비단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창작’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었다. Psychosomatic(심신증)이라는 이야기가 있듯 병원에서 처방받은 대로 약을 복용한 마르코는 카를라와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다. 약을 먹고 평정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카를라를 사랑할 수없었다. 사랑하는 감정이 일지 않았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그녀를 안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약을 끊고 조울의 세계로 접어든, 바로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미친’ 상태가 되어서야 아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살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사랑을 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오롯이 사랑하기에도 힘든 세상이다. 결국 궤변 일지 모르나 살기 위해서는 미쳐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미치거나’ ‘눈과 귀가 멀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남들이 보기에 상식과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만 당사자에게는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리가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서는 세상의 규범도 사람들의 이목도 하물며 가족들의 걱정도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에게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이우주와 자연이 주는 세상의 바람과 햇빛이라는 선물을 맘껏 누리며 뜨겁게 사랑하면 되는 것, 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빛과 같은 ‘광기’의 사랑에 등 돌려 세상이 주는 치료약을 먹고 이성이 개입하여 ‘정상’과 ‘평범’을 분간하는 순간 그 사랑은 ‘펑’ 하고 날아가게 된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 인류의 두 조상처럼 말이다. 다소 과장이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기를 권유해 본다. 세상의 틀에서 이룬 평균에 수렴하는 ‘그런 척’하는 삶에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반문은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과 지표에서 ‘평균’에 수렴되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판단되는 이 세상에서 어찌 미치지 않고서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 말이다.



천 만이니 몇 백만이니 하는 대형 한국영화들을 쓰나미처럼 흘려보내고 다시 작은 영화를 찾아보았다. 아직 개봉 전이기도 하고, 개봉을 한다고 한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영화 <사랑에 미치다>를 영화평론가 오동진 선생님이 하는 카페 ‘반하다’에서 작은 시사회로 보게 되었다. 소품 같은 영화를 거대 상영관보다 작은 부띠끄 같은 데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이 개봉관에 걸렸는지 인지되기 전에 사라는 것은 다양한 볼거리에 대한 권리의 침해가 아닌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예술이나 창작에 대해서도 많은 물음과 의미를 던져 준다. 그리고 비정상적이라 하는 '조울증'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우리의 평범할 것만 같은 일상을 투영하게 된다. 영화에서 테마처럼 나오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작품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지난 이른 봄날 문화역사284에서 열린 기획전 '반 고흐 인사이드 - 빛과 음악의 축제' 기획전이 쳐가듯 생각이 무릇 무릇 피어 올랐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자고 약속했던 소중한 인연도 기억해 내었다. '광기' 안에 무엇이든 이룰 수만 있을 것 같은 '눈멀고' '미친' 그날들이 오버랩되었다. 오늘 서울은 36.5도로 최고로 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이 더운 날, 시원한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와 한잔 하는 시사회는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에서 다시 미쳐서 다시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리라 잠시 망상에도 빠진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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