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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볼모'가 아닌 '자랑'이 되어야

녹사평, 청계천, 다시 용산으로

by 박 스테파노

근현대사 아카이브의 땅, 용산

용산

0.73%로 신승으로 들어서는 차기 정권의 첫 번째 행보가 '용산 집무실' 추진입니다. 모든 주요 어젠다를 삼키는 이유는 언론의 무기력한 받아쓰기 행태도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땅과 집'이 주는 상징성이 생각 이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용산 철도병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용산'이 주는 역사적 의미, 특히 근현대사의 정치적ㆍ시대적 환경으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용산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커다란 '사적'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https://alook.so/posts/70te05k

용산은 사실 개발의 요지라기보다는 위기의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담고 있는 "근현대사의 사적"이라 생각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용산에 군대를 주둔하기로 하고, 그해 8월 용산 일대 가옥과 무덤을 이전시킵니다. 생활의 터전인 전답을 빼앗기고 가옥을 철거당한 데다 조상 대대로 섬겨 온 분묘를 이장해야 했지요. 용산공원이 조성되는 땅은 40년간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것도 모자라 다시 70년 세월 동안 미군부대가 주둔해 ‘금단의 땅’으로 인식된 곳입니다. -기사 본문 중-



1면,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슬픔 가득했던 용산


서울은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고대부터 주요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용산은 큰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기에 알 맞아 한반도에 들어온 외세의 단골 점령지가 됩니다. 수백 년 간 모진 풍파와 외세의 각종 침탈을 모두 견뎌낸 가장 비극적인 땅으로 마치 한반도의 역사와 같은 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 째는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이었습니다. 고려 조정이 원나라에 항복한 후, 몽골군이 고려 땅에서 일본 원정을 위한 병참기지로 용산이 결정하였습니다. 고려 땅에서 수탈된 많은 물자가 용산에 모여 몽골군의 일본 원정 준비를 위해 모여든 것이지요.


다음은 예상 가능하듯 큰 전쟁은 임진왜란입니다. 왜군이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병참 기지가 세워진 곳도 바로 지금의 용산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매우 논리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북방의 몽골이 일본을 공격한다고 세운 병참기지도 용산, 남방의 왜인이 명나라를 공격한다고 세운 병참 기지도 용산이라는 것은 용산의 군사적 요충지를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세의 침략과 수탈의 장면은 거듭됩니다. 당사자인 조선군은 회담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채 용산에서 명나라 장군과 왜군의 강화 회담이 처음 열렸습니다. 왜군이 무참히 조선 백성을 학살하며 퇴각해도, 명나라는 안전한 퇴군을 보장하고 협상 타결 기념비까지 세웁니다. 주인이 배제된 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 지은 기념비, 금도 남아있는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입니다.

심원정 강화비


용산은 이렇게 외세가 침략하면 병참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단골 명소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배들을 수배해 강화도를 친 거점이었고, 임오군란 때는 정나라가 주둔지로 삼아 대원군을 납치한 장소가 용산입니다. 이어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조선 왕조를 위협하기 위해 주둔한 곳이 용산이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점령군 주둔 사령부를 둡니다. 이어 조선군 사령부로 만들면서 거대한 군사도시가 됩니다.


해방이 되면서 애초에 분단 결정이 되었던 일본 대신에 한반도를 두 동강 내면서 미군이 일본의 주둔지를 그대로 물려받고, 미 8군 캠프와 한미 연합사령부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74년이 지나서야, 용산의 미군은 평택으로 이전하고, 그 부지를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메가 글로벌 시티 한가운데 군부대가 있는 것도 시대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땅의 가치, 땅값이 매몰되는 것이 아깝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주민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2면, 서울 행정 중심지가 될뻔했던 용산


http://naver.me/5kqez6JT

서울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이 미술품과 식물, 자연의 빛이 어우러진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는 14일 녹사평역의 승강장을 제외한 지하 1층에서 4층까지 역사 전체 공간을 미술관으로 바꾼 '녹사평역 지하 예술 정원'을 개장했다. 지난해 8월 첫 삽을 뜬 지 약 7개월 만이다. 2000년 문을 연 녹사평역은 역 천장 정중앙에 반지름 21m의 유리 돔이 있고, 그 아래를 긴 에스컬레이터가 가로질러 내려가는 특이한 구조다. 역의 지하 14층 깊이는 35m로 민간 건물 지하 11층에 해당한다.


3년 전 녹사평역이 '미술관'으로 거듭났다는 보도들이 있었습니다. 녹사평역을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어마 어마한 규모의 역사와 지하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8,000~10,000명 사이의 유동인구로 서울 지하철역 중 30위로 중하위권인 역사치고는 어마 어마합니다. 이유는 바로 최대 환승역을 만들려는 서울 지하철 교통 계획에 따라 설계 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녹사평역

녹사평(綠莎坪)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일대는 잡초가 무성해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녹사평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는데,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역 주변도 이태원 초입과 용산 국방부, 육본으로 가는 애매한 지하차도 위의 사거리가 다입니다. 단지, 용산구청이 이야기해 주듯,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행정 중심이 될 뻔했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0037447

사실 서울시의 신청사 문제는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나 결론을 못 내린 채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다. 지난 97년 당시 ‘신청사건립추진위원회’가 신청사 후보지로 ‘용산지역’을 선정했지만 최근까지 이전 또는 현재의 위치 재건축에 대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시는 96년 조순 시장 때 용산 미군기지가 이전하면 녹사평역 부근 5만 평에 3700억 원을 들여 높이 30층, 연건평 7만 평의 새 청사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필요한 청사 건립기금도 현재 1500억 원 정도 마련돼 있다. -기사 본문 중-


용산 서울시청 이전은 꽤 긴 시간 동안 논의된 이야기였습니다. 노무현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에 발맞추어 서울의 균형발전도 논의가 되면서, 도심은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로, 용산은 근현대사의 역사적 의미와 함께 행정과 새로운 경제 동력(전자상가 등)의 베이스로 삼으려 했고, 기금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MB 이명박 씨가 서울시장이 되면서 용산은 그저 '개발 노른자'로 인지되기 시작합니다. 무리한 개발 계획과 철거 추진은 "용산 참사"라는 비극을 낳았고, 그 개발의 여진은 아직도 성매매 업소 등이 있는 마지막 정비구역까지 진통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용산 참사


결국, MB는 자신의 호대로 '청계'시대를 열고, 청계천 복원 사업의 성공과 대중교통 개혁으로 '일 잘하는' 수식어를 달고 대권에 성공합니다. 청계천 프로젝트는 사실 한국 행정사에 손꼽히는 성과이긴 합니다. 신성장·친환경·탈이념 등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상징하는 사업이었습니다. 그에 걸맞은 추진 과정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민주적 방식’, ‘설득’, ‘신뢰’, ‘합의’에 대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10%대의 지지도로 추락이 되면서, 이념적 통제와 중산층과 노동자들을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그 신호탄이 '용산 철거민 집단 사망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용산'은 지금 수권세력을 가로막는 대명사가 된 것이지요.



이사를 원한다면 '손 없는 날'이 아니라 '손을 빌릴 때'


대통령 당선자(어떤 언론이 '자'가 놈이라는 뜻이라서 '인'으로 호칭하자고 하는 헛소리에도, '당선자'라고 부르기로, 배우'인', '환'인', 확진'인', "... 어려우니까)의 넘버 원 의제가 '집무실 이전'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당위성, 행정 비용의 편익, 기타 풍수지리 무속설 같은 것은 잠시 접어두기로 합니다. 그 정도로 국민들이 형편없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존중 때문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183351

국방부 대변인이 28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집무실 용산 이전과 관련해 “안보는 공기와도 같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해 주목을 받았다. 국방부가 집무실 이전에 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기사 본문 중-


그러나, 추진에 대해서는 고의적 비판을 주고 싶습니다. 16년 전 서울시청 청사에 지금의 국민의 힘은 거세게 반대를 했습니다. 이유는 주변 인프라와 주거 지역, 상권, 그리고 군사기지라는 부정적 인식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물론, 비용과 편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실제 속셈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반대 진영의 주요 의제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4번의 설계 전면 변경, 그리고 구 청사를 문화재관리청 허가 없이 철거하다 딱 걸려 복원한, 현재의 '쓰나미 신청사'의 흉물입니다.


그래서, 무조건의 반대도 지양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가면 안 됩니다. 현대 시기만 잡더라도 70년 넘게 '비공개 보안 시설'의 집합체가 용산 미 8군 부지 일대입니다. 요즘 세대들은 의미조차 몰라 'X리단길'이라고 핫플레이스에 가져다 붙이는 '경리단'이 국군 재정 부대(군의 돈 관리)라는 사실, 그 뒤에는 온갖 군의 첨단기술과 대규모 군수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방위사업청'이 있습니다. 이는 저도 공개할 수 없는 복잡한 인프라가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특히 매우 중요한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통신장비가 있다는 정도만 상상해도 '간단하게' 몇 주만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이는 최근 리모델링 개축을 시작한 '종로구청'의 사례만 보아도 명약관화해집니다. 임시 청사를 구하고, 이전 계획을 잡고, 실제 이전까지 수년이 걸린 일입니다.


http://naver.me/FErz5S3g


정권의 인수는 "통합"에 성패가 달렸다


대통령 인수위원회의 인수를 영어로 ‘이행(transition, 移行)’이라고 한다는 의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transition team에서 유추한 해석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반만 동의합니다. 이유는 transition team은 기업, 행정조직에서 흔히 접하는 조직명입니다. 특히 CxO 등의 리더십이 바뀐 경우, '인수인계팀'을 말하며, 그 기간도 'transition period)으로 명시하여 관리합니다. 여기서 '이행'은 업무의 인계와 인수라는 매우 실무적 의미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이양되는 "인수"는 기업의 '인수 합병', 즉 'Merge & Acquisition'에 가깝습니다. 이전 조직과 레거시는 계승하되 불필요하거나 인수자의 철학이나 방향에 맞지 않으면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됩니다. 보통 PMI라고 해서 Post Merge-Acquisition Integration (인수 후 통합) 과정을 거치는데, D+5, D+30, D+100의 타임 플랜을 가지고 '통합'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때 가장 먼저하는 것은 생산이나 기술, 재무나 회계가 아닌 '문화'와 '소통'의 통합이 우선됩니다.

"통합"이 보여야 하는데

성공적인 인수 이양의 모습은 '통합'이 될 것입니다. 행정부처의 유기적인 업무 통합, 권력 3부와의 견제ㆍ균형의 통합, 그리고 국민들의 통합이 '인수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되어야 하고,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며, 시급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대통령의 이사'와 관련된 이슈는 바로 이런 '통합'의 계획, 적어도 의지마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갈라치기하고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구태의 정치인들이나 측근 무속인의 '손 없는 날'을 귀 기울이지 말고, 당선 이전 약속한 '능력 있는 전문가의 손'을 빌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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