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하늘이다-번외 편]
대한민국 헌법 121조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국가의 정체성을 명시합니다. 그 뒤에 주권과 영토, 국민에 대한 규정과 개념을 장엄하게 풀어냅니다. 이와 같이 헌법이라는 것은 규제와 처벌을 위한 일반법과 달리 법 규제와 권리자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지요. 그럼 헌법 제121조는 무엇일까요. 퀴즈 프로그램도 아닌 바에야 일반인들이 숙지하기 어렵습니다. 헌법 제121조는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농지의 소작 제도는 금지된다”라는 ‘'경자유전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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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 청문회나 재산 신고 시에 '도덕성'이라는 것을 검증합니다. 불법투기, 병역면탈, 세금 탈루, 위장전입, 아빠 찬스 등 심사 대상자의 인생이 그야말로 검증대에서 탈탈 털리게 됩니다. 그중 자주 오르내리는 문제 중에 '농지 불, 편법적 취득'이 있습니다. 현행법의 법 위반의 문제이니 도덕적 흠결이라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만 생활하는 도시 생활자들의 시각에서는 다소 '과하다'라는 반문도 내뱉기 마련입니다. '텃밭 좀 가꾸는 게 어때서?'라는 생각과 말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경자유전의 원칙'이 존폐의 기로에 놓이곤 합니다. 어차피 농사를 지을 농민들은 늙었고 농촌도 텅텅 비어 가는데 농지 소유 자격을 완화해서 국토나 잘 활용하자는 현실 이해의 논리가 앞섭니다. 다양한 탈법으로 존재하는 ‘부재지주’의 실체도 인정하고 농지를 소유한 기업들의 소유권도 합법화해서 농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근거 미약한 주장도 나옵니다. 실제로 지난 2017년 2월 국회 개헌특위에서 경자유전 원칙을 삭제하자는 여론에 대한 의견을 농민단체들에 물어왔고 농민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소환된 '경자유전'의 법칙
최근 '경자유전'이 다시 소환됩니다. 그 시작은 국민의 힘에 합류한 윤희숙 씨의 다소 황당한 자기변호에서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그 유명한 조선일보 이동훈 기자가 덧붙여 '경자유전'은 시대를 역행하는 사문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윤석열 장모, 한동훈 가족들과 정호영 까지 모두 이 논리에서 지금의 '부재지주' 불법 논란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https://www.chosun.com/politics/2021/09/05/4FMXORO5XJE5BMVLQGUALK2V3M/
하지만 경자유전이 백화점과 마트마다 수입 농산품이 넘쳐나는 시대상황과 맞지 않고, 기업농 육성 등 영농 규모화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야권 후보 적합도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지난 8월 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청년정책토론회 ‘상상 23 오픈 세미나’에서 “농지법과 관련된 여러 법률들을 보면 경자유전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다”며 “농지나 토지소유 범위 제한이 있으면 농업을 기업 형태로 끌고 가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헌법에 명시된 ‘경자유전’ 원칙을 손볼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사 본문 중-
경자유전의 원칙은 민주화의 꽃이 핀 1987년 헌법에 정식 명시되었습니다. 그 이전 헌법들도 농지는 농민, 즉 경자에 한해서만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제헌 당시 국민은 곧 농민이었고 대다수가 소작농 신세였습니다. 소작제 폐지와 자작농 창설에 따른 농지개혁은 민주주의 권력의 원천인 농민들이 열망한 국가의 밑그림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에서도 경자유전의 원칙을 세우고 농지개혁을 단행했던 세계적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북한이 먼저 공산주의 혁명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남한 정부도 농지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땅을 농민에게 주는 공산주의에 민심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는 남한 기득권의 지상과제가 됩니다. 그래서 남한 최고 땅부자이자 우파 한민당의 당수였던 인촌 김성수도 농지개혁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니까요.
그런데 위와 같은 헌법 및 농지법의 경자유전의 원칙을 1996년 1월 1일 농지법 개정을 통해 도시 거주인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3년부터는 개정된 농지법에 따라 '주말농장' 제도가 도입되어 도시인 등 비농업인이 농지를 주말, 체험영농 등의 목적으로 취득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세대 당 1000 m2(약 300평) 미만 범위 내에서 취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농민단체들은 이것의 원복을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법령의 개정이 시대적 변화 속에서 농지에 대한 가치관이나 그 이용패턴의 변화가 반영된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익 추구 즉, 투기적 농지 매수에 이용될 수 있는 탐욕의 부작용 역시 결코 작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농사만을 천직으로 여기며 땅의 가치를 보며 살아왔던 농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끔 하는 것 역시 결코 적지 않습니다. 농민이 없으면 농사도 없고, 농사가 없으면 우리들 밥상도 위태해집니다.
조선일보와 일부 보수 기득권이 '경자유전'은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라 이야기하며 대만의 사례를 듭니다. 대만도 한국과 유사하게 지주의 당이었던 장개석이 대만으로 밀려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농지개혁을 하며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하였다 선포합니다.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의 핵심 이념인 ‘삼민(三民) 주의(민족·민권·민생)’ 가운데 민생(民生) 주의의 핵심 내용이 ‘평균지권(平均地權)’이었고, 이를 떠받치는 핵심 슬로건이 ‘경작자(자작농)가 그 밭을 소유한다’는 뜻의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1993년 경자유전 원칙을 폐지하고 이를 ‘농지농용(農地農用)’ 원칙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농지농용'은 ‘농업용 토지는 농업용으로만 사용한다'라는 의미로 '경자유전'에서 법규문의 주체를 경작인 사람에서 경작지인 토지로 바꾼 것입니다. '경자유전'의 폐지가 아니라 강화에 가깝습니다. 땅 자체를 농지로 규정하며 전용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자경 능력이나 소유자의 조건이 아니라, 그 땅은 '농사만 지을 수 있는' 땅으로 규정해 버린 것이지요. ‘농유(農有)’가 되었든 ‘농용(農用)’으로 바뀌었든, 해당 조치는 시대를 반영하면서 식량 생산 기반인 농지를 최대한 보전하겠다는 헌법적 의지입니다. (조선일보의 주장은 아전인수 격)
그래도 나와 무슨 상관일까
경자유전의 원칙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농지축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이 대기업 자본의 농업 진출을 억제하는 제어장치로서의 역할을 해왔는데, 그것이 없으면 대기업이 농지를 잠식하는 등 농업·농촌부문의 난개발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이 삭제된다면, 난개발은 물론, 임대차가 보편화되고 농지를 마음대로 소유하게 될 것이고, 농업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농지법이 존재하고, 그 핵심이 경자유전인데, 이것이 무너진다면 농업에 대한 특수성을 포기하자는 것이고, 결국 농지법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경상대 장상환 교수, 한국농어민신문 대담 중-
‘농업의 다원적 기능’도 경자유전의 원칙을 유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됩니다. 농업이 식량을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수나 생물 보존의 환경을 보호하는 등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 기능들은 그나마 경자유전의 원칙이 헌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시대를 반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국가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스위스는 헌법에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넣었고, 유엔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자유전이란 헌법적 가치를 어떻게 적용하여 실현할 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재산권 침해 같은 사익의 천박한 자본의 욕구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공생의 가치가 고려되어야 합니다. 되려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그에 대한 보상을 아예 헌법에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리 있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물론, 경자유전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가의 ‘소득’이 보장돼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국가대계를 위해서 경자유전을 유지해야 하고, 농민들도 여기에 동의하게 하려면 직불제 강화 등을 통해 농업소득을 보장해줘야 하는 방안도 간구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물가와 각종 고지세에 허덕이며 도시에 삽니다. '경자'가 누구의 이름인지 '유전'이란 아라비아 사막에서나 찾으라는 반응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경자유전의 원칙과 관련한 법정 판례 중 상당수는 농지법에 묶여 자신의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헌법소원이지 ‘경자유전 원칙’의 훼손 문제에 대한 헌법소원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사회’를 헌법 개정의 큰 가치로 두고, 생명자원의 공공성을 유지하고 향상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고 의무일 것입니다.
밥은 하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공지능이니 메타버스니 초연결이니 떠들에 대도 때가 되면 울리는 배꼽시계의 알람을 멈출 길은 '섭식'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은 거의 대부분 '땅'에서 나옵니다. 아파트 맨션을 거창하게 비용 따지고 투자 효율 따져 봐도 당장 먹을 것은 '농사'에서 나옵니다. 축산도 가공도 농사가 기반이고, 바다에서 오는 것들도 큰 의미의 '바다농사'로 간주하기 마련입니다.
칼로리에 가성비, 배달료 등 넘치는 정보를 따지는 똑똑한 도시인들은 정작 음식의 근원인 '농지'의 문제는 신문 속의 글자일 뿐입니다. 누가 농사를 짓든 싸고 맛있으면 다가 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농지를 보호하고 농업에 투자하자는 소리는 흰소리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필요는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있지만 '입고, 걸치고, 가지고 사는 일'은 없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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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121조 1항에는 '경자유전(耕者有田,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 원칙'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농지취득 자격증명'이 필요한 전·답·과수원 등 농지를 보유한 지자체장은 137명에 달했다. 5명 중 3명(약 59%)은 농지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자체장이 가지고 있는 농지의 면적 총합은 53만 5275.05㎡로 축구장 면적의 약 75배에 이른다. 금액으로 따지면 신고금액 기준으로만 209억 849만 원에 이른다. -기사 본문 중-
소작농이란 단어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부재지주'들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임차농민이 절반 이상입니다. 부재지주들은 진짜 주말농장, 텃밭, 부친의 유지를 위해 농지를 소유하고 있을까요? 설마요. 강남이나 일산, 분당처럼 농지를 밀어내고 언젠가 한 방이 터지길 기다리는 자들이 부재지주들 아닙니까. 이제는 그들에게 세금인 농업직불금까지 흘러들어 가는 판입니다. 개판 오분 전이지요.
헌법을 잊고 살다가 민주공화국의 일원인지 모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힘든 과정과 피를 흘려 권력의 원천이 자신들임을 힘겹게 얻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하늘이라는 '밥'에 대한 생각이 헌법에 몇 줄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밥은 하늘이고 땅에서 나옵니다. 그 땅을 함부로 갈아 업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닐까요. 그래서, 부재지주를 '대수롭지 않은 검증'이라 치부하는 일은 밥상을 걷어 차는 일이 됩니다. 단 한번 씨를 뿌리고 거두어 보지 않은 채, 함부로 땅과 농사를 대하지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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