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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15. 2016

트로피가 뭐길래

아재의 일상 #14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티브이에서는 드라마보다 흥미가 진진한 청문회와 뉴스가 종일 흘러나온다. 오늘은 부정입학과 관련한 교수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부정 입학한 사람은 입학이 취소되었으나 부정입학을 주도한 교수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변한다. 낯 뜨거운 변명의 잔치가 계속된다. 귀마저 더럽혀질 말들을 교육자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넘친다. 분노와 짜증이 밀려들었다. 마치 익숙한 기시감, 아니 기시감이라기보다 내면 깊숙이 구겨 넣었던 잊고자 했던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떠 올랐다.


초등학교 취학 전 조부모, 고모, 삼촌들과 함께하는 방 세 칸짜리 셋집에 살았다. 9남매 장남이었던 부친은 조부의 사업부도로 나의 출생 직전에 상경하였다고 한다. 조부모와 출가했으나 기거처가 없었던 고모들의 네 식구와 출가 전의 고모, 삼촌들과 함께 말이다. 남한산성 자락에 자리 잡은 거여동의 슬레이트 지붕 집을 거쳐 우리 형제의 취학 직전 서울 동남쪽 성내동 골목에 자리 잡은 1층 가겟집 위의 어설프게 자리 잡은 집에서의 기억이다. 철 모를만했을 법한 나이여서 식구가 북적거리고 놀아 줄 사람이 넘쳐나는 대가족이 좋았을지도 모르나, 나는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다. 일찍 철이 들어서라기보다 그 시절 고생하는 모친의 눈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식구의 생활과 경제적 회복을 위해 부친은 중동 파견 근로자로 해외 장기 출장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그 집에서 가장 힘없고 어린 서열 막내의 존재였다. 조부의 도산 후 없는 살림에 입이 하나 늘어난 불청객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모친은 나를 티가 나게 챙겨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은 장손이라는 이유로 명분이라도 있었으나, 나는 수태의 순간과 출산의 순간에 집안에 최대 재앙을 가져다준 아이였기 때문이다. 생일상이라고 챙겨 받을 수 없었고 새 옷이라고 입어 볼 수도 없었고 방은 물론 책상을 대신할 작은 교자상마저 내 차례가 되기까지는 많은 기다림이 있어야만 했었다.


그러던 모친은 나를 어려운 살림에 '미술학원' 간판이 달린 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모친은 10남매 막내딸로 존경받는 지주이자 지역향교의 전교(향교를 대표하는 직책)가 가장 아끼는 여식이었다고 한다. 그런 막내의 눈으로 본 자신의 막내아들이 가여워 보였을 것이다. 철이 들었다기보다 눈칫밥만 가득한 일곱 살 아이였던 나는 유치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리고 간판 값이라도 하듯 미술교육이 중점이 되는 유치원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집에 가면 엎드려 그릴 스케치북도 크레파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림 그릴 종이책 하나 없어 얇은 종이 일력의 뒷면이나 아무도 보지 않는 족보책 앞뒤 여백에 볼펜과 연필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그런 시간의 보답인지 어른들 보기에 그림이 제법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내게  원장 선생님은 전국 사생대회 출전을 권유하였다. 일요일 많은 식구들의 끼니를 챙겨야 하는 모친은 고민 끝에 나의 보호자로 함께 덕수궁 석조전 앞 잔디밭에서 열린 사생대회에 참석하였다. 모친과 단둘이 처음 나서는 나들이는 참 좋았었다. 나만을 위해 시간을 쓰는 모친만으로 그날 모든 것을 이룬 것만 같았다.



그림은 잔디밭 위에서 공차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을 이용해 그리기 시작하였다. 한껏 좋아진 기분처럼 그림도 참 잘되었다. 순조로운 일의 서막에는 늘 예측 못한 어두운 함정이 있기 마련이듯, 문제가 발생하였다. 양보다 많이 집어 먹은 김밥 때문인지, 오래간만에 먹은 음료수 때문인지 배가 몹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변의가 치밀어 오르고 참다 참다못해 모친에게 화장실이 급하다 말하였다. 모친은 이 중요한 마무리 시간에 화장실 가면 괜찮겠냐 되물었지만 이내 곧 화장실에 데려가 변의를 해소하게 해 주었다. 그만큼 짧아진 마무리 시간에 최대한 서둘러 마무리하고 그림을 그려 내었다. 생각에 나쁘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하였다. 당일 심사하여 당일 시상하는 대회여서 당일 시상을 하게 되었다.


참가상인 입상부터, 가작이 발표되고 장려상이 발표되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기쁜 마음에 시상대에 올라 상장을 받고 상품을 받았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모친을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매우 어두워 지다 못해 화가 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때의 나는 이유도 영문도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 노는 내내 모친은 입을 떼지 않았다. 어린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 때문이라는 느낌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요일 저녁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방이라고 있을 턱이 없어 늘 모친 옆에서 잠을 자던 나는 간만의 나들이 덕에 일찌감치 곯아 떨어졌다. 얼마나 깊은 잠을 이루고 있었을까, 모친이 흔들어 깨우며 일으켜 앉히더니 내 등짝을 내려쳤다.


"네가 화장실만 안 갔어도, 우수상, 최우상 받았을 것 아니야! 넌 종이 쪼가리 상장이지만 아무개와 아무개는 트로피 받은 것 못 보았어? 아무리 급해도 참고 마무리했어야지."


자다가 봉창이라는 속담을 알기 전에 뜨끈 거리는 등짝으로 체감하였다. 그때는 물로 수년이 흘러 성년이 되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하고 여러 일들을 겪고 이혼을 하다 십수 년 만에 모친과 이부자리에서 옛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때 물어보았다. 그때의 등짝 타격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시간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시효가 지나 무덤덤해졌는지 모친이 감정하나 넣지 않고 답했다.


"그때 원장을 통해 주최 측에서 네 그림 알고 최우수상 준다고 먼저 연락이 왔지. 그런데 찬조금을 달라고 하더라고... 네가 알잖아 우리가 먹고살기도 빠듯했는데 찬조금이 어디 있겠어. 못 주었지. 그랬더니 이층 집주인 아들 아무개하고 건넛집 넓은 마당 아무개 하고가 트로피 받았잖아. 그게 속상했어. 나한테 속상했는데, 풀 데가 없더라고 넌 세상모르고 코까지 골면서 잠자고... 미안했다. 엄마가. 많이 아팠냐?"


어릴 적 등짝이 아픈지 안 아픈지 기억은 없었다. 그날 모친의 설명도 그리 안 아팠다. 그런데 오늘 이런저런 티브이에서 쏟아지는 부끄러운 변명을 듣자니 기억이 일었다. 조금 서글프고 아팠다. 그 어릴 때의 내 가난이, 그리고 그 가난이 극복되었다 생각했다 다시 찾아온 내 청춘을 묻어 버린 가난이 아픈 것은 아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와서 내 소중한 일상이 세상의 변화에 작은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며 소망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못한 것이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던 비정상의 거래가 40년이 흘러 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된 지금에도 성립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프다. 어린이와 청춘들의 꿈과 희망은 여전히 풋풋하고 찬란한데 세상의 어른들은 여전히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아간다. 이것만으로 내가 매주 광장에 나갈 이유는 충분하다. 이제 그만하라 말하는 사람들의 진의는 잘 이해하지만,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방심 중에 찾아온 감기를 물리치고자 병원을 방문했다. 아프면 반칙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광장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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