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의 일상 #1
긴긴 세월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청준 [이어도] 중 -
내 마음속의 이어도, 제주
예전 이어도는 제주도민에게 환상의 섬이었다. 천리 바닷길 멀리 낙원과 같은 섬이 있다 전해 질뿐 그 섬을 가본 사람은 이승에 있지 않았다. 그 섬으로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실제로 이어도는 존재하는 섬이다. 마라도 남서쪽 14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수중섬이다. 요즘 제주도 이주가 한창 유행이다. 요즘이라기보다 멀리 뒤돌아 보면 10년 전부터 최근 2~3년 사이에 제주도에 이주민들이 많이들 정착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도 7년 전부터 제주 이주를 꿈꾸어 왔고, 실제로 작년 말과 올해 여름에는 그 이주 실현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기도 하였다. 복잡하고 답답한 이 서울 거대도시에서의 생활이 싫어서 이기도 하였지만, 왠지 푸른 바다와 초록빛 오름들이 있는 제주라면 평화로운 삶을 천천히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주를 오가며 중산간과 해안도로를 둘러보노라면 환상은 금방 깨지게 된다. 도시에서의 편의시설을 포기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스스로 만들지 않는 한 전무해 보였다. 해안가 곳곳에 형성된 카페들과 음식점들 덕분에 땅값은 가파른 우상향 상승곡선을 그리고, 화교 거대 자본들이 매집하는 대지에는 제주의 본연의 모습을 가리는 기이한 시설들이 계획되고 있었다. 토박이들도 이주민을 환영하는 사람과 반기지 않는 사람으로 선을 그어 나뉘게 되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도 거대도시 서울만큼 만만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많은 것을 각오하고 가지 않으면 이주 정착이 힘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실행에 옮겼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도 각오해야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제주는 예전부터 항상 부족함으로 힘들어하는 섬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가 고팠고, 부지런히 절약하며 살아도 가난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예전부터 섬을 떠나고 싶어 했고, 기회가 된다면 육지로 육지로 향하였다. 하지만, 섬을 떠날 수 없었던 사람은 마음속에 이어도의 꿈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남쪽 수천리 가면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이상향의 섬, 이어도를 그리며 현실의 궁핍하고 고달픈 생활을 이기며 살아갔던 것이다. 도둑도 거지도 대문도 없던 제주도는 풍요로운 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이어도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게 제주도는 이어도였을지도 모른다. 이 거대도시에서 연속되는 인생 실패 행진 속에서 겨우 겨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제주플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안정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돈'이었을 것이고, 그 '돈'을 점유하지 못한다면 여유롭게 이 거대도시에서의 허덕거리는 삶을 벗어 날 수 없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던 이 끔찍한 곳에서 품을 수 있는 희망은 언젠가 갈 것이라는 이상적인 삶이 있는 곳, 제주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그리고 천천히 살아갈 수 있는 환상의 섬, 제주도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거의 포기했었다. 삶의 목표가 없어졌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제주도 근처에도 가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슨 바람인지 한가위 슈퍼문의 인력 때문인지 명절 첫날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싫어 아무 계획 없이 제주로 향하였다. 2박의 일정을 연장하여 4박 5일을 꽉 채워 제주 곳곳을 둘러보았다. 비자림에서 숲의 위안도 얻었고 한동리 에메랄 빛 바다에서는 여인의 속삭임도 느낄 수 있었다. 사뭇 다른 남쪽 바다의 거친 파도를 보고 위태로운 생각보다는 후련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5.16 도로는 실망시키지 않았다. 송악산에서 고산리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에서 가장 힘든 생각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제주플랜'을 꺼내 들었다. 아니 이제 '제주플랜 2'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젠가 사랑하게 되면 거주하고 싶었던 상가리, 저지문화 마을을 둘러보고, 게스트하우스도 체험해 보았다. 그리고 정착한 이주민들의 생각과 고민도 함께 귀담았다. 어렵겠지만, 처음 생각했던 마음, 소박하고 천천히 사는 삶에 대한 희망도 품게 되었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제주에 자주 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하나씩 하나씩 준비해 가리라 생각한다. 당장이라는 조급함을 버렸다. 언젠가는 이라는 여유를 가져 본다. 삶의 목표라 할 수는 없지만 이정표는 마련한 것 같다. 그 이정표 끝에는 삶의 목표가 있을 것이리라. 아마도 '늘 사랑하면서 살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제주도에 가고 싶다. 누구와 함께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그곳에 있으면 되니까. 그 누군가 찾아오겠지. 봄이면 꽃은 섬마다 피겠지. 그 누군가는 바로 너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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