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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Dec 20. 2018

만우절(萬愚節)

비둘기, 그리고 마흔에서 쉰 그 중간 어디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창세기 8.21


1.

방황을 넘어 선, 온갖 악한 인간 모습에 하느님의 노여움은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망가진 세상을 큰 홍수로 깨끗이 쓸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하느님은 노아에게 큰 방주를 만들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온갖 짐승의 암수 한 쌍씩과 나무와 꽃과 풀의 어린싹과 씨앗을 배에 싣도록 하시고는, 40일 동안 어마 어마한 큰 비를 쏟아부으십니다. 이세 상은 그렇게 큰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2012년에 개봉한 ‘2012’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묘사된 쓰나미를 떠 올리자면, 하늘의 노여움은 그렇게 커다랗고 좀처럼 누르기 힘든 것이었나 봅니다.


그렇게 40일 동안 퍼부은 큰 비로 인해, 이 세상은 한 발 내 디딜 한 뼘의 땅조차 없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물은 빠지게 되고, 어디엔가 뭍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면서 노아는 드러난 땅을 찾으려 합니다. 처음에 까마귀를 창 밖으로 날려 보냈으나, 까마귀는 뭍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물 위를 날아다니며 다시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는 하루 이틀 지나고 떠나던 그 모습으로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됩니다.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그때 다시 돌아온 비둘기는 감로 나뭇잎을 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어디엔가 땅이 드러나고, 그 땅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십니다. 인간의 천성이란 악한 마음을 품게 끔 되어 있는 것,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동물과 풀과 나무와 꽃들,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주는 흙과 물이 함께 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땅과 이 자연 덕택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2.

초등학생 아이들도 잘 아는 성경 속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온 비둘기가 저에게는 조금 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노아가 땅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 이후에 비둘기를 처음 날려 보낸 날이 바로 4월 1일이라는 기원설 때문입니다. 헛수고가 될 것임에도 분명한 것에 심부름을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심부름을 묵묵히 해내는 비둘기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하여, 결국 4월 1일은 만우절(萬愚節: April pool’s Day)이 되었다는 수많은 만우절의 기원 중 하나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 날, 만우절이고, 이 날이 바로 제 귀 빠진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이 날로 이 세상에 살아온 지 꽉 채워 40여 년이 되곤 합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선배님께서 마흔이라는 나이를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 보여 힘겨운'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스무 살의 낭만’을 건너뛰었고, 현실감에 쫓기어 ‘서른 즈음에’ 느낄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없었기에 제게는 마흔이란 나이가 더 아릿한 모습으로 다가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아가 보낸 비둘기는 어쩌면 진짜 바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에 잠긴 세상이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확신도 없이, 노아의 바람을 담아 깊은 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지친 모습으로 다시 날아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 다시 확신할 수 없는 비행을 주저 없이 나서게 됩니다. 비둘기의 모습을 복잡하고 미묘한 사람의 인생사에 비교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비둘기는 적어도 노아의 부름에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응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떠한 주변의 환경에도 혹하지 않는 ‘불혹(不惑)’의 모습이었습니다.



4.

저는 불혹(不惑)마흔 살을 훌쩍 넘어선 나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삶'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에 '인생'이라 감히 줄 그어 그래프 그려보고, 그것도 모자라 부여잡지도 못할 시간과 생각들을 조각조각 쪼개어 '생활'이라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볼 욕심을 가득 쥔 채 내려놓지 못하고 이리저리 선회하며 방황하는 까마귀와 같은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선 안 되겠구나 싶고, 맘이 그렇고, 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작은 반항감으로 시작된 나의 새로운 발걸음이, 어떠한 욕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뚜벅이의 모습으로 잘 지켜 나갔으면 합니다. 저도 다시는 몇몇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며 살고 싶습니다.


나에게 솔직하고 시간에게 공손하고 오늘에게 감사해하는 그런 마흔에서 쉰 중간 어디쯤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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