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의 속내
2022 카타르 월드컵의 하이라이트는 한국의 16강 진출이다. 한국인들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다. 조별리그 첫 두경기에 승리가 없었는데, 마지막 승리로 도박사 확률 9%의 기적적인 일을 이루었다. 그 조별리그에서 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들 중 한 가지가 있다. 눈에 잘 안 띌 수도 있으나, 예선 세경기 모두 한 경기장에서 치렀다. 바로 카타르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이 그곳이다.
카타르가 작은 나라, 경기도만 한 나라라고 하지만, 이동이 없다는 것은 큰 베네핏이다. 개최국이었던 2002년도 6개 도시 모두에서 경기를 치렀다. 물론 지방 형평 등의 의도가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 숙소와 연습장소가 동일하니 이 또한 큰 메리트가 되었다. 선수들의 컨디션은 물론 지원 스텝들과 비용도 아낄 수 있었다. 2014년 넓은 브라질 땅에서 우승팀 독일은 이동거리 최적화를 고심하다가 비용을 투자해 자신들만의 베이스캠프를 짓기도 했으니 말이다.
스타디움이 위치한 도시의 이름은 직관적이다. 에듀케이션 시티(Education city), 교육의 도시다. 이름만 들으면 주요 초중고등학교나 카타르 국립대학 정도가 있을 법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는 그 이상이다. 카타르는 '포스트 오일'의 시대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카타르는 원유보다 천연가스가 더 주력인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수도인 도하 인근에 에듀케이션 시티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유명 대학 분교들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립 연구대학으로 유명한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이 시작이 되었다. 이어서 코넬 의과대학, 텍사스 A&M 대학, 카네기멜론 대학, 조지타운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이 차례로 에듀케이이션시티에 둥지를 틀었다. 이것이 '포스트 오일'과 무슨 관계인지 살펴보기 위해 카타르의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카타르는 아랍어로 '국가'라는 뜻이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국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이름으로 느껴진다. 카타르는 아라비아 반도 동쪽의 섬나라이다. 페르시아 만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무역항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워낙 외세가 들고 나기를 반복한 역사 가운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산하에서 19세기에 벗어나면서부터, 영국의 보호령이 된다.
아라비아 반도 지역의 역사를 보면 고대ㆍ중세 때부터 외세들이 점령을 거듭하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뭐 돈 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점령 세력들은 기존에 자리 잡은 유목민 기반의 토착 제후(줄여서 토후)들이 하던 대로 지배하게 놔두곤 했다. 이들이 나름 세를 만들어 오스만에게 대항하여 이이제이의 방법으로 영국과 다린 조약(1915년)을 체결하며 보호령 협정을 맺게 된다. 이것이 현대 아라비아 반도의 토후국 나라의 기반이 되었다.
토후들의 경쟁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보호령이 된 반도 동쪽의 아홉 토후 중 하나가 카타르의 지배 토후 알 사니였다. 사우디가 1차 세계대전 틈을 타 독립을 하자마자, 1934년에 처음으로 석유가 발굴되었다. 영국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이 진한 나머지 동쪽 토후국들을 1960년대까지 보호령으로 두지만 노동당 정권이 철수를 결단하게 되었다. 그때 9개 토후가 협의하여, 아부다비와 두바이 중심의 7개 토후는 독립 토후를 유지하고, 바레인과 카타르는 독립국가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남은 7개의 토후 부족이 연합국가를 결성한 것이 아랍에밀레이트 연합, UAE가 된다.
지금 아라비아 국가들의 부는 석유에서 나온다. 카타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에게 시대적 도전이 다가왔다. 친환경, 탄소중립이라고 내세우지만, 사실 자원의 유한성이라는 경제적 판단과 원유국 아라비아 동맹들의 에너지 패권에 대한 견제라는 속내가 작용하고 있다. 바로 '포스트 오일' 시대의 도래가 다가온 것이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두바이다. 상대적 석유 매장량이 적은 것이 퍼스트 펭귄의 용기를 주었다. 자원과 산업을 제외하면 지리 경제적 측면을 검토하기 마련이다. 두바이는 지리적 교통의 이점이 많은 도시이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물류와 금융을 메인 테마로 항만을 확충하고 공항ㆍ항공서비스에 집중 투자하였다. 그 결실이 두바이 공항, 에밀레이트 항공이고, 부산물로 부르즈 칼리파를 위시한 랜드마크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두바이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버렸다.
잇따른 곳은 UAE의 또 다른 중심 토후 아부다비였다. 우리에게 만수르로 더 알려진 아부다비는 원래 두바이보다 역사 문화적 자존심이 높고, 인구도 많고 돈도 많은 토후였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고도 남을 일들이 벌어지자 본격 추격에 나섰다. 문화에 대한 설파와 산업의 트랜스포메이션은 사실 전문가들의 세상에서만 유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부다비도 항만, 항공, 공항에 힘을 쏟았다. 아부다비 항만과 아부다비 공항을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에티하드항공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이제 카타르의 차례가 되었다. 카타르의 주력은 원유 채굴이 아니라 천연가스이다. 그것도 파이프라인이 아닌 액화가스 수출이다. 한국의 조선사업의 주된 고객이 이 액화가스 운송선이니 낯설지 않다. 수도인 도하 인근에 에듀케이션 시티를 만들고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대학 분교들을 유치하기 시작한 것도 이 '액화'기술의 고도화라는 주축 산업 유지가 이유가 되었다. 카타르도 도하공항과 카타르 항공에 힘을 실었다.
이 지점에서 카타르의 '월드컵 유치'라는 '축구에 대한 진심'과 연결된다. 두바이, 아부다비, 카타르가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지만, 한정적인 인적 구성의 한계로 그 성장과 유지에 물음표가 생겼다. 그때 생각한 것이 '스포츠', 특히 '축구'와의 연계이고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이 세 중동 토후들은 유럽 빅 클럽의 큰 손이 되었다. 에밀레이트 항공의 로고를 가슴에 달고 유럽의 빅리그를 누비는 팀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구단을 인수 소유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아부다비의 만수르는 맨체스터 시티 구단을 인수하여 전 세계 최고의 구단 중 하나로 키웠다. 아부다비는 전 세계 총 12개 구단을 소유하거나 지분을 갖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 FC, 뉴욕시티 FC, 멜버른 시티 FC 등의 유니폼에 에티하드 항공 로고는 지분 100%의 다른 표기이기도 했다. 축구뿐 아니라 골프 메이저 대회, F1 그랑프리의 개최지로 이름을 알렸다.
카타르도 '축구에 진심'인 전략이 도입되었다. 2011년 프랑스 리그앙의 탑 오브 탑 파리 생제르맹(PSG)을 인수했다. 현자 가장 많은 스타 선수가 뛰는 구단 중 하나가 되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의 스타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킬리안 음바페가 이 한 팀에 있다니. 카타르항공은 파리 생제르맹과 더불어 유럽 최고의 클럽인 FC바르셀로나의 유니폼 스폰서이기도 하다.
이는 사실 새로운 전력은 아니다. 1970~1990년 까지, 홍콩ㆍ싱가포르가 취했던 방법의 재탕이다. 홍콩항, 싱가포르항, 그리고 홍콩 공항, 창이 공항과 작은 섬나라에 있는 마천루, 그리고 자국 스포츠 리그는 없지만 스포츠에 진심인 나라. 기시감이 드는 이유이다. 한 발 더 앞서, 아랍의 토후 도시들은 문화 영역에서도 진심이다. 아부다비에는 루브르와 구겐하임(예정) 분관이 자리 잡았다. 카타르 미술관에서는 세잔, 고갱 등을 만날 수 있다.
카타르는 스포츠 대형 이벤트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2011년 아시안컵, 2022년 월드컵, 그리고 중국이 반납한 2023년 아시안컵, 2030년 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부자들의 투자 방법이다. 당장의 손익이 중요하지 않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 모던 아랍 첨단 도시를 알리고, 글로벌 노출이 많은 스포츠, 문화, 미디어 이벤트를 유치해 국지적인 안보 불안에 실드를 치는 것이 된다. 남는 장사가 되는 것이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에만 7조를 부었다. 이를 지원하고 뒷받침할 부대 백업 인프라까지 합치면 300조에 이른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래서 월드컵 경기장이 위치한 곳은 다 이유가 있다. 에듀케이션 시티가 그러하고, 결승전 장소 루사일 스타디움도 그 이유가 있다. 루사일은 60조 원을 들여 만든 석유와 가스 비즈니스 허브이다. 전 세계에 루사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루사일 경기장은 '아라비안 램프' 모양이라고 한다. 램프의 요정처럼 루사일 경기장은 추후 철거되어 기반 시설 확충에 쓰인다니 요술의 땅이라는 비유가 적절해 보인다.
이를 위해 부작용도 지속되고 있다. 우선 카타르 거주 인구의 90%가 외부 유입 인구이다. 300만 중 30만이 토착인구라는 이야기다. 내국인과 외국인 비즈니스 엘리트 노동자를 제외하면 단순 노무자들이다. 대부분 방글라데시와 인도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은 차별과 가혹한 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천연가스 생산 시설 노동자의 94%가 이들이다. 아랍 무슬림 전통의 카팔라가 전통 관습이 되어 있다. 일종의 노예제도를 용인하는 제도이기에 노동자의 권리보장이 어렵다. 1인당 10만 달러의 국민 소득의 그늘에는 이 이주 노동자의 삶이 구겨져 있다. 이것 또한 현실이다.
한국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이를 비판하는 기사나 코멘트가 눈에 띈다. 비판 마땅한 지점이다. 하지만, 그 비판에 차별적 우월감이나 문화ㆍ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있는지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최근 연구에서 '아시아를 어디까지 보는가?'에 대한 사회조사가 있었다. 서남아시아, 즉 중동국가를 아시아로 보지 않는다는 대답이 76%를 이루었다. 이 조사의 해석에는 아시아를 광의로 해석할수록 차별적 편견이 줄어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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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중심의 동아시아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올림픽을 연속해서 개최하였다. 엑스포도 살펴보면, 2020년 두바이 엑스포, 2025년 아이치 나고야 엑스포, 2030년 리야드 또는 부산 엑스포까지 아시아 일색이다. 아직도 서구 일변의 세계 시계를 동쪽으로 돌리고 있다. 아시아의 어느 곳도 이제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 이 방법이 국가의 위상과 경제를 도약시키는데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차별과 부조리를 저 구석에 밀어 넣고 번영이라는 열매를 품게 되었다. 세계 시민의 환희와 찬사는 소수의 것이 되었을지라도, 내 차례가 어느 후대에 올 것이라는 마음 하나로 지금을 이루었다. 서울이나 카타르의 에듀케이션 시티나 다르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기억했으면 한다.
1985년 파견 노동자 부친을 만나러 가던 그 열사의 사막이 이렇게 변했다니 궁금은 해 졌다. 언제고 한 번 가고 싶다. 부친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https://alook.so/posts/Yyt5vP9
당시의 미덕은 힘든 티를 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소개보다 올림픽 한 단어가 먹히는 시대였다. 내 처지보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이벤트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내 세우는 것은 도덕률처럼 되어 버렸다.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시되는 것에 당연함을 느끼는 시대였다. -본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