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씨를 부탁해>
어느 책의 구절들을 뽑아 봅니다.
올 한 해의 마무리로 고민 끝에 이야기를 이렇게 열어 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선거의 모습은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함께 뜻을 나누고 성과를 나누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터였다. 경선인단선정 시에도 인증한 후 함께 홍보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재미있는 선거였다. 시민들이 주최가 되어 자발적으로 움직이니, 누구에게는 끝도 없이 들어가는 선거자금 때문에 곤혹스러울 선거가 축제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 86p
"정당의 조직력과 자금력은 정말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당에 대한 가벼운 우월감이 내 속에 있었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그들의 힘이란 장난이 아니었다. 시민후보 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적.물적 자원으로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94p
"조간신문에 실린 온갖 흑색선전에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다. 출근해 컴퓨터 모니터를 켜면 쏟아지는 원색적인 헤드라인들에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낀다. 미디어로는 원순 씨를 소개하고 알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까지 한 지경이었다.
그뿐인가! 일과를 마치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팬카페와 페이스북, 트위터에 들어와 보면 우리편이라는 사람들도 날이 시퍼렇게 세우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그대로 상처가 되었다.
우리는 직업 정치인도 아니고 선거를 많이 치러 본 정당 지지자도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달관하여 받아들일 줄 아는 성인군자도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경험과 지식도 부족했다. 서로에게 내뱉은 한마디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다녔고, 다시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 168p
"그렇다 '밥'이 문제였다. 단지 어린 아이들의 급식 이야기가 아니다. 상식과 원칙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도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따뜻한 밥 한 공기에 대해 차별되지 않는 삶,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이었다. 상식이고 원칙이었던 것이다." - 196p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크게 남기고 가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모든 정치행위의 목표지향점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주체가 되어 모든 일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으로 이번 선거를 치러냈다. 어느 한 정치세력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며, 돈도 명예도 아닌 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전달되는 정치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희망을 현실에 구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268p
소개드린 어느 "1쇄 작가"의 장르 규정 어려운 책입니다. 2012년도 출판이니 10년이 된 작가 스스로 "망작"이라고 이르는 책입니다. "1쇄 작가"란 책을 출판하고 중쇄를 찍지 못하고 1쇄로 추가 인쇄가 중단된 작가들을 말합니다. 주로 소비층이 낮은 르포타주, 그림책, 비평집 등이 있고, 요즘 독립 출판이나 PoD 등으로 스스로 1쇄로 마감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 책의 글쓴이는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바로 저입니다. 저는 회서에서 공저한 백서, 출간집, 기타 출판물에 저자 기여를 여러 편 한 적이 있지만 오롯한 저의 지적 재산권이 되는 출판물은 달랑 이 책이 다입니다. 이 책은 저의 인생에 의미가 깊습니다. 깊다는 의미는 뿌듯함과 아픔을 함께 떠 올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원순씨를 부탁해>입니다.
2011년에 저는 12년 다니던 IBM을 떠났습니다. 물론 2년도 되지 않아 재합류하게 되었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건강 이유로 2번의 병가를 진행하다가 더 이상 조직에 부담을 주기 싫어 자진 퇴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요양을 병행하며 그동안 관심두지 못했던 곳을 기웃대었습니다. 서울을 도보로 한바퀴 돌아보고, 경주와 대관령, 지리산을 걸었습니다. 걷다 걷다 만난 소식이 있었습니다. 서울시장의 중도 사퇴 소식이었지요.
이전에도 거리 집회엔 이따금 참여했지만, 회사에 로열티를 높이던 시기에 정치적 활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부러 성공한 화이트 컬러 시늉을 한 껏 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시민단체 운동가가 시민 후보로 서울 시장애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의 여론조사 지지도는 2~3%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를 지지하던 시민사회, NGO, 풀뿌리 정치 운동 세력이 서포터 조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 창립 이벤트가 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당첨 보상은 그와의 점심식사였습니다.
편지를 그럴듯하게 쓰고서 잊고 있다 보니 모르는 전화가 왔습니다. 당첨되었으니 와서 행사에서 편지를 읽어 줄 수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을 제법 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솔직히 "귀찮음"이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서울 시장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네트워크라도 만들자는 아주 세속의 비즈니스 마인드가 작용했습니다. 그때 나이 마흔 하나였고, 회사에서 나름 "최연소"의 타이틀을 갈아 치우고 잠시 숨을 고른다 생각했을 뿐이지요.
편지를 이화여고 강당에서 그럴듯하게 읽어 내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훌쩍거렸습니다. 그분이었습니다.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그 기분으로 인사를 하고 다음 인연을 도모했지요. 그리고 점심 식사 후 스텝들이 서포터 조직에 자원봉사를 요청했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사진 좀 찍고, 글 좀 끄적거린다고 했더니, 바로 시민 후보의 동행 취재를 맡겼습니다. 지지자의 시각에서 SNS나 뉴미디어 매체를 활용하자는 의도였지요. 기성 언론은 기사 한 줄 써주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야권 단일 후보 선정을 할 때까지 20여 일만 고생하자는 순수한 마음, 이 또한 비즈니스 자산이 될 것이라는 계산, 그리고 어쩌면 터닝 포인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얕은 욕심에서 서울 25개 구를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이 만 컷이 넘더군요. 낮에 동행하고 저녁에 사진과 함께 동행기를 인터넷에 올리는 고된 일과였습니다. 정당 조직도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자비 부담이었지요. 그러다가 2011. 10. 3 장충동에서 열린 야권 단일 후보 선정이 기적처럼 이루어지고, 제 역할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당에 바로 합류하지 않은 시민 후보에게 지금의 민주당은 소극적인 지원으로 일관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만 거창하게 "조직"이라 만들고, 진짜 일하던 자원봉사자들은 의자 하나 얻어 앉기가 버거웠습니다. 그때도 "청년 정치인"이라는 당원 친구들은 명함을 파서 자기 자리에 붙여 놓고 캠프를 비우기 일쑤였습니다. 그 빈 곳을 지하철 노동자 형님, 택시 기사 영감님, 주방 찬모 아주머니들이 자원봉사로 메꾸었습니다. 그때 정치는 하지 말아야지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수행이 없으니 후보의 행적도 바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결심하고, 선거 기간 동안 "진짜 자원 봉사자"의 마음으로 동행 취재를 계속했습니다. 어느새 제 카메라의 포커스와 써내리는 글의 핀트는 후보가 아닌 그를 기다리고, 그의 말을 듣는 시민들의 모습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열심히 전달하다 보니, 보궐 선거가 진행되었고 시민 후보는 서울시장이 되었지요. 거기까지가 원래 계획이었습니다. 시민단체나 정치 단체 사람들은 자리를 기대했겠지만 사실 공무원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요.
취임식이 진행되었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음 생보를 도모하던 중 연락이 왔습니다. 엎선 "편지 이벤트" 점심 식사를 하자는. 그 자리에서 지지세력이 미미한 무소속 시장의 서포터 관리를 부탁받았습니다. 큰 고민하지 않고 수락한 후, 첫 번째 일로 지난 동행 취재기를 액자식으로 넣은 기록을 완성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스스로 집필, 교정, 편집, 판본까지 해서 을지로 인쇄소에서 20권의 기념 인쇄본을 만들어 시장님과 주변 분들께 선물했습니다. 그 후 출판사에서 정식 출판을 해 보자는 의뢰를 받고 낸 책이 이 책입니다. 그분은 "원순씨", 고 박원순 시장입니다.
그 후 시민 지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조직도 집단 의결체제로 지난 정치인 팬클럽의 정치 조직화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봉사활동과 시민 시정에 적극 참여 하면서, 지금처럼 애정을 담아 시장님 면전에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민주당 입당 시점에서 지지 철회하겠다는 으름장도 놓았습니다. 재활의료 NGO에 잠시 있다가 다시 IBM으로 복귀하고서는 서울시 정보화 자문을 하기도 했으나, 일상을 이전으로 돌려놓았지요.
2014년 재선 선거 준비가 시작되자마자, 정책ㆍ공약ㆍ일정 기획을 위한 마이크로타게팅 TF에 합류하였고, 선거를 이기고 기획 보좌관으로 잠시 어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무를 뒤로하고 다시 IT 바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점부터 개인사가 다난해지며 원순 씨와 소원해진 어느 날 비보를 듣고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보내곤 했습니다.
세상의 시선과 평가가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거기에 더해 금융사고와 사법의 피해자가 되어 제법 큰 재산의 손실과 명예의 실추를 겪었습니다. 이 비루해진 명찰에 "원순씨"라는 이름이 참 버거웠습니다. 쪽 팔린 비겁함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인간 자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의 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모든 업적이 폄하될 일에 휘말린 사람의 곁을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추정과 평가는 세상의 몫입니다. 제게는 가족 이상의 의미가 있는 분을 부정하는 것은 제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 고향 서울"을 고향답게 만들고자 나누었던 숱한 의견들, 무엇보다 몸을 기울여 귀를 열던 그 모습, 그리고 힘들 때 잡아 준 생각보다 두툼한 손. 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내년에 원순씨의 3주기를 맞이하여 서울시 디지털 보좌관이었던 친구 녀석과 "이제는 보내 주자"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11~2017까지의 말과 글들을 추려 지난 이야기들을 마무리하고자 도모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시작할까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불편한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다 한다기보다 그 불편함 충분히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름을 기억하고 잘 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제게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는 1쇄 <원순씨를 부탁해>는 멋진 글이 아닙니다. 글도 투박하고 기획도 어설픕니다. 하지만, 그 책의 표지를 보면 늘 초심이 생각납니다. 제게는 나침반이 되는 책일지도 모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브런치 책방"에 입고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프로필에 달려 있는 책, 그리고 그 안의 이름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이곳에서 이 글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단 그분과 나눈 "서울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분이 즐겨 쓰던 말로 고백 아닌 고백을 마무리합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