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소에서 나눈 영화들
올 한 해는 생각보다 흥행작이나 개봉 중심작을 바로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극장도 가기 힘들었고, 유료 개별구매가 끝나고 OTT 월정액에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헤어질 결심>과 <헌트>도 최근에 보게 되었네요. 그래서 더욱 "작은 영화"들과 친해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작품들을 리뷰로 바로바로 쓰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공론장에 웬 영화 이야기를 처음부터 썼습니다. 800여 개의 글 중 60개 정도는 족히 되어 보입니다. 영화를 취미 이상으로 좋아하다가 현실적인 이유로 직업으로 가까이하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코로나 이전에는 주요 개봉작은 모두 챙겨 보곤 하였고, 일기처럼 남기던 리뷰가 꽤나 장황해지고 두터워졌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이자 그림이고 음악입니다. 읽지 않아도 읽히는 역사책이 되고, 남모를 짝사랑과 소중한 추억의 저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시대정신"을 공유해 줍니다. 시간 배경을 떠나, 영화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줍니다. 때로는 질문으로, 어쩔 때는 묵직한 잔상으로, 그리고 소리 없는 외침으로 말이죠.
코미디가 되었던, 멜로, 액션, 스릴러, 하드보일드, 그리고 애로가 되었든 말이죠. 이처럼 영화는 배경이 되는 그 시대, 개봉되었던 그 시간, 그리고 다시 찾아보는 그 시대와 조우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시대정신"이라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 영화 이야기를 씁니다. 이제 이곳에도 영화 이야기들이 대문에 걸리기 시작했네요. 내년에는 보다 다채로운 영화로 이야기를 쓸까 합니다. 올해의 영화 입곱 편을 꼽았습니다. 모두 얼룩소에 끄적거린 이야기들로 올해를 마무리해 봅니다.
https://alook.so/posts/M9tbpJy
영화에서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중년들의 활력을 잠시 넣어 준 것은 알코올이지만, 결국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것은 각자의 '변화 의지'였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권태롭고 따분해서, 어떤 이는 죽도록 괴롭고 다급해서, 다른 이들은 또 다른 기회를 위해 크고 작은 '차수 변경'을 도모합니다. 각자의 고민은 늘 나름 나르이듯 그 모습과 양태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머리를 자르고 세신을 하기도 하고, 잠시 휴가나 휴업을 하기도 하며, 은퇴와 귀촌을 결심하기도 하지요. 그 차수의 전환을 위해 잠시 필요한 용기가 바로 기분 좋은 취기의 한 잔 더, 어나더 라운드가 아닐까 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취기의 흥겨움은 잠시만) -본문 중-
* 얼춘기를 마치고 복귀를 알리던 이야기, 역시 영화 이야기. 한잔 더 하는 인생의 차수 변경을 꿈꾸는 자들 모여라. 미즈 매즈 미켈슨은 늘 옳다.
https://alook.so/posts/w9t61M
영화는 "용서할 수 없는" 너희는 "용서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성경, 부처 말씀 같은 성인, 보살이 되라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용서'는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어렴풋한 답은 영화 마지막 반전 결말에서 얼핏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건"도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해 관계자도 아닌데 그저 선입견과 통념으로 "일반화"하는 집단 오류의 광기는 자격도 없습니다. -본문 중-
* "완전한 용서"란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https://alook.so/posts/Yyt5vP9
지금 상계동이 위치한 노원구는 거대한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다. 선거철에 인기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30년이 넘은 아파트의 재개발이 이야기된다. 다시 이곳에서 누군가는 밀려나고 누군가는 버티다 사달이 날지도 모르겠다. 성남의 구도심은 정비사업이 되고 있을까? 똥이 많던 녹천 위의 이 콘크리트 마을은 다시 생기를 찾을까? 그 이웃들은 어디에 있을까... 내 고향 서울은 아직도 그늘이 깊게 드리운다. -본문 중-
* 기록은 늘 기억보다 위대하다. 개발의 그늘의 진짜 기록.
https://alook.so/posts/54tdoj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장 무엇을 하실 건가요? 가족과의 시간? 광란의 파티? 못다 한 복수? 신에게 기도? 무엇이 되었든 한 가지는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듯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내는 것,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의인"일 것입니다. 그 의인은 아마도 담대하게 문제와 위기를 똑바로 응시하며 솟아날 구멍을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담대해질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아수라'같은 재난 중일지도 모르니까요. 부당함과 부정한 것에 의심하고, 분노하고, 비판하는 일, 그리고 참여하는 일, 그것이 담대한 의인의 길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 중-
* 희망이란 절망을 담대하게 응시해야 만나게 된다.
https://alook.so/posts/8WtobMy
1862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개념과 담론이라는 그럴싸한 확신에 갇혀, 실재하는 우리 주변의 호소는 제대로 듣고 있는지 말이지요. 전쟁과 역병의 위기감이 지금 윌에게도 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짜 '이성'의 축을 확장해 이 위기를 맞서 낼지, 아니면 그럴듯한 담론들의 향연에 도취되어 말잔치에 빠져 있지도 않을 '기적 같은 도약'에 갇혀 버릴지 말이지요. -본문 중-
* 굶주린 이들에게 기적이란 "살아 내는 것". 그것 밖에 없다.
https://alook.so/posts/E7taD0L
진실은 바라보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아주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실은 이렇듯 언뜻 보아서는 여러 면을 지닌 다면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절대 조각내어지거나 분리되거나 파편화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한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사건과 사고로, 또한 타인의 위해로 고통받아 아픈 사람들의 진실의 덩어리는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어느 영역이 되고, 진보와 보수의 판가름이 되고, 사회에 대한 지표가 되어 구호로 남는 일이 아닌 것이지요. -본문 중-
* 진실은 사실의 총합이 아니다. 개인의 고통은 타인의 잣대로 견주어 측정될 수 없다.
https://alook.so/posts/jdt3k7V
영화 제목의 그들과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자문자답해 본다. 해마다 자리를 바꾼다. 이것도 세월이고 변화라고 하는 것일까. 어제는 그들이 불쌍했고, 오늘은 내가 더 처연하니 말이다. 내 스스로 무엇이라 규정하든 간에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의 중력은 어쩔 수 없이 변화를 낳게 된다. 찬란한 시간은 없었어도 누구나 꿈꾸던 날들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묵념을 거두고 내일을 보고 싶다. 나이 쉰에도 그렇다. -본문 중-
* 그날이 오늘 같다면 행복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그래서 오늘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