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냥
김어준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정치, 사회의 이슈가 아닌 "록밴드" 때문이었다. 그가 설립한 뉴미디어 기업체 "딴지"는 정말 문어발식 소소한 사업을 진행하곤 했다. 소소하니 세발 낙지발식 사업이라고 할까나. 딴지일보라는 뉴스 미디어를 기점으로 온갖 추억의 불량식품을 판매하기도 했고, 명찰 다운 프로필 하나 없는 덕후들에게 칼럼과 이니셔티브를 내어 주는 진짜 "실험"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미디어 콘텐츠 소비자로서 그의 실험에 관심을 두다가 구매 참여를 한 것이 "무붕콘서트"였다. 당시 립싱크가 만연한 한국 음악시장을 겨냥한 "붕어는 없다"라는 라이브 락밴드 콘서트를 진행했다. 당시 경희대 평화의 홀이 가득 찰 정도의 성황이 이어진 공연에는 인기 가수 전인권, 이승환, 이문세와 대중 밴드가 된 YB, NexT,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이 메인을 서고, 그 뒤에 지금은 유명밴드가 된 크라잉넛, 노브레인, 레이지본의 공연이 이어졌다. 그때 딴지라는 미디어에 올라오는 영화리뷰 등에 호응하면서 지내다가 이내 곧 일상의 밀물과 썰물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수년 후 만난 곳이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야권단일 후보 결선 투표에서였다. 전면 무상급식 반대에 시장직을 건 보수 진영 현 시장의 자리를 위해 범야권 통합이 필수였다. 야당이더라도 당시 정당의 조직력과 자금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유명인 어느 누구 하나 시민후보인 박원순에게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공지영 작가와 팟캐스트 "나꼼수"들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그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퇴직했던 보수적인 미국 기업의 후배가 응원차 찾아온 이유가 "나꼼수"였으니 말이다.
IT를 전공한(실제로 웹사이트 개발 회사가 "딴지"의 기반이 됨) 김어준 총수(자칭)는 인사이트 자체가 따끈따끈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그때에 "모바일 퍼스트" 시대가 올 것이라며 팟캐스팅이 아닌 영상이 뉴미디어를 집어삼킬 것이라고도 했다. 당시 백엔드 기업 인프라에 꽂혀있던 나는 심드렁했다.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의 "촉" 만큼은 엄지 척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 올라온 "김어준이 언론인인가?" 하는 논쟁은 사실 가벼이 여기고 지나갔다. 글 쓴 분의 나이대가 유사했고, 서두의 풀어내는 개인적인 감정으로의 호오에 대해 일견 공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뉴스공장"을 제대로 귀에 담은 적이 없다. 일단 운전을 멀리하니 라디오가 멀어졌다. 그리고 팟캐스트 "나꼼수"의 의제와 딜리버리 방향성에 반감도 있었다. 특히 주진우와 정봉주에 대해 알만큼 알아 버린 이유가 컸다. 솔직히 김어준의 음성 딜리버리나 특유의 전달 형식상 딱히 거리끼지는 않았다. 그냥 덩어리로 싫었다.
공감하고 동의하는 맥락은 "언론인"이라는 단어에 멈추어 섰다. 개인적으로 "언론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언론 종사자"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주장하고 다닌다. '사'자가 들어가진 않았어도 그 명칭엔 구성원 스스로가 쳐둔 울타리가 느껴진다. 종교인, 체육인, 기업인처럼 "~인"으로 맺어지는 명찰에는 직업 이상의 배타적인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말로 나와바리랄까. 그러니 대수롭지 않은 전형을 "언론고시"라고 뻐기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조선일보에 3개월 있었다. 부친 절친이 수도권 판매 임원이었는데 그 백이 통했다. 가족사 때문에 국정원 지원도 못하는 사람에게 언론사 취직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딱 3개월 다녀봤다. 나름 그 "~고시"라는 과정을 거치어 보았기에 "대수롭지 않다"라고 감히 표현해 보았다. "언론인"은 사회나 타인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자격"이 아니다. 스스로 만든 명함이고 명찰일 뿐이다. 노동하는 근로자의 직업은 "~자"로 끝난다. 노동자, 기술자, 자영업자 등 말이다. 놈 "자"가 거슬려서 사람 "인"을 붙이는 자신들의 직업세계는 스스로 추앙하는 일이다.
말장난을 멈추고 본질적 의문을 던진다. "언론인의 자격"은 무엇인가? 아마 아래의 표현처럼 "사실을 대중에게 취재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방점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일보나 기레기가 그런다고 김어준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럼 조선일보와 기레기는 '언론인'의 자격이 없는 것인가? Yes or No로 묻고 싶은 심정이다. Yes라면 그 안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은 언론인일까?
언론인의 기본은 자신의 취재와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거나 턱없는 주장으로 판가름 났다면 그를 사과하고 수정하는 데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 배 째라고 배 들이미는 것은 언론인으로서는 최악이며 최저의 행태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
언론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입장에서 모두가 "참된 언론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라는 기술적 직무를 수행하는 "언론 종사자"인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김어준은 "언론 종사자"일까?
진보라고 자칭하는, 아니면 한 때 진보라고 했던 "어른"들이 김어준 때리기의 선봉대가 된 지 오래이다. 특히 진중권과 강준만이 특출 나다. 그들의 결기는 허물어진 지 오래다. 오기 같은 독기만 남았다. 이 아저씨들은 부당한 권력이 세상을 뒤흔들 만큼 문제가 되어도 "나이스 가이"만 한다. 말랑한 주제를 들고 황희 정승 흉내내기 일쑤다.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은 억지 시쳇말로 둘러댄다. 대신 그 권력에 저항하는 부류나 만만한 사람을 잡아 분노조절 장애자처럼 쏟아 낸다. 지독하게 조롱하고 증오한다. 그러면서 김어준이 증오와 조롱을 조장한다고 한다. 정작 자신들이 그러면서 말이다.
http://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1
우리 사회에서 젊은 시절엔 정의를 앞세워 부당한 권력을 향해 제법 날카로운 비판을 하던 지식인들 가운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 선문답 같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다. 그중 최악인 것은,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 데로 겨냥하고 정의의 사도인 양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과도하게 열을 내는 경우다. -칼럼 본문 중-
김어준을 까대는 기존 언론 종사자들의 단골 낙인이 "음모론자"이다. 아무 근거 없이 이야기를 꾸며 결국 사회와 타인을 곤란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직격탄이라 쉽게 벗어 내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를 "구라쟁이"로 모는 유일한 이유가 이 낙인뿐일 때가 많다. 음모론자로 낙인찍는 사람들은 정작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음모라는 것인지 거증을 못한다. 무엇이 자의적으로 꾸민 얘기라는 것인지 증거를 내세워 설명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근거가 "설마" 뿐일 때가 다반사이다. 앞선 글에서도 그 근거는 없다. 그냥 "터무니없다"로 일축하고 말아 버린다.
음모론의 대표적 사례로 든 ‘세월호 고의 침몰설’이라든가 ‘대통령선거 개표조작설’은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사건이다. 1987년부터 지속된 개표 조작설이 무리가 가는 가설이지만, 그 가설을 깨는 증거도 제시된 바가 없다. 전자 투표로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만, 기득권 누구 하나 찬성하지 않는다. 보안 운운하면서 말이다. 지금의 투개표가 더 보안에 취약하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증거가 검찰의 수사, 정부의 조사결과뿐이다. 이는 "의혹"에 대한 증거일 뿐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른 언론사의 검증보도가 유일한 증거를 대는 반박인 된다. 그렇다고 가설을 산산 조각내는 반대입증을 한 건 아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 가설이 "무리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김어준이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음모론자가 되고, 그 이유로 언론인의 자격이 없다는 논리는 약한 구조를 지닌다. 그냥 싫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가 빙빙 돌려 복잡해진 느낌만 가득이다.
김어준의 주장이 다 맞는다는 것도 아니다. 오류가 존재하고 논리 모순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반대 진영에도 동등한 기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기존 언론들의 "추정기사"는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두 "음모론"일 뿐이다. 확정되지 않아 검증해야 하는 사실들을 추정하여 단정하는 모든 언론은 "음모론자"인 것이다. 글 쓰신 분이 다른 언론이 그렇다고 해도 "김어준은 안돼"라는 주장은 그저 느낌만 남는다. 사실의 검증이 가장 중요한 과학의 영역에서 과감한 논리는 환영받는다. 그것이 논리적 모순이 발견되어 까지더라도 박수를 받는다. 진실은 사실의 총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어준을 "황색 언론", "B급 언론"이라고 비판하곤 한다. 그럼 유튜브는 어떤 미디어인지 반문하고 싶다. 삼 프로 TV가 영향력이 커져 이제 자신의 콘텐츠와 생각을 전달하고자 하는 샐럽이 모여들고, 그 출연에 "영광"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메이저와 마이너를 굳이 가르며, "너는 저급하니 언론이 아니야"라는 자의적 해석은 엉성하다. 근거가 미약하다.
"뉴스공장"은 해당 시간 주파수 점유 1위를 한다. 그 청취자들은 황색언론의 구독자이고 B급 미디어의 소비자가 되는 것일까? 누구의 기준이고 판단일까? 뉴스공장을 듣는 택시 기사가 걱정이 되는 심정은 그 개인의 일상과 인생에 대한 훈계인가? 누가 그런 자격을 주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이 어렵다면 "김어준은 언론인이 아니다"는 무언가 모를 식자의 자의식처럼 느껴지기만 할 수도 있다.
내가 김어준에게 불편했던 시간을 가늠해 본다. 그때의 나는 사회적 성취에 한 껏 취해있던 시절, 아니면 그것을 향해 내달리던 시간들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불편했던 이유는 스스로 내 자신이 "사회 엘리트"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어준은 엘리트들의 이중성과 얄팍한 세상 인식을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그의 외모와 말투부터가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다. 툭하면 "똥침"을 날리는 그의 모습에 엘리트들이 만든 기존의 틀은 품어내기 힘들었다.
잘 포장된 썩은 생선을 골라내는 데 특출 난 그의 메시지는 불편할 수 있다. 아니 그 메신저 자체가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부러 그러는 것으로 보인다. 메신저의 애티튜드나 스탠스 자체가 콘텐츠가 된 지 오래이다. 김어준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듯하다. 메시지에 담긴 내용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그의 생각에 일견 공감이 된다.
김어준이 언론 종사들의 규정으로 언론인이 되든 말든은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어준은 이미 "미디어"가 되어 있다. 그의 작동 행위 하나하나가 미디어의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팟캐스트 안이든 교통방송국 안이든, 유튜브 스튜디오 안이든 그는 비중 있는 미디어가 되어 있다. 그는 앞으로도 식자들의 늪, 엘리트들의 근거 없는 기득권력에 계속 똥침을 날릴 것이다. 눈치 보며 간을 재는 "언론인"들과 달리 말이다.
언론의 지형은 룰의 문제가 아니다. 운동장 기울기의 문제도 아니다. 그 운동장의 플레이어들이 문제인 것이다. 대부분 한 방향 골대에 공을 차대는 것이 현재 언론의 편파성이다. 그 판을 깨기 위해서는 종사자들이 다양화되어야 한다. 스스로 "언론인"이라 규정하든 말든 사회의 변화와 혁신을 조망하는 자가 새로운 "미디어"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김어준은 늘 스스로 새로운 판이 되는 미디어였을지도 모른다. 그 미디어를 다시 사심 없이 바라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