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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Jan 12. 2023

정치가 생물이라는 핑계... 슈뢰딩거 고양이

선거구제 개편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A.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못마땅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슈뢰딩거와는 달리  "관측을 해야만 비로소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양자역학의 개념에 동의를 못하겠다"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지요. 과학자로서 상자를 열기 전에는 0인지 1인지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 참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으로 발전한 양자역학은 결국 "양자 컴퓨팅"이라는 실체적 "프로세스"를 만들어 냈으니 여러 이야기들이 아이러니하게 얽힐 뿐이지요.


양자 컴퓨팅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하려면 양자 역학을 거들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드는 순간, 이해는 미궁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 대한 세태 비판으로 "슈뢰딩거 고양이"의 비유는 두 가지를 나름 이해하는 입장에서 타당해 보였습니다. 결과를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먹물 속의 진주를 건지는 일이 정치라고들 하니까요.


흔히 "정치는 생물이다"라고 정의합니다. 특히 정치 진영 내에 있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흔한 비유입니다. 정치라는 것은 늘 살아 움직이면서 그 예측이 빗나가기 일쑤인 불확실성 투성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일이든 정치의 상자 안에서는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일견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어찌 정치뿐이겠습니까. 살아가는 일상과 인생도 그러하겠지요.


그런데, 이 말이 쓰이는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 말을 쓰는 경우가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 내뱉은 말이나 약속한 일들을 뒤집어야만 할 때 이 말을 씁니다. 또는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타협안 도출이나 이합집산, 야합의 이유를 설명할 때가 그러합니다. 스스로의 "말 뒤집기"에 대한 여지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정치의 후진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시스템"은 유기적 결합체이나 "생물"이 아닙니다. 시스템은 예측 가능성과 그 예측 범위에 대한 무관용성으로 유지됩니다. 정치도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 정치는 예측이 가능하고 그 예측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을 때 안정감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는 "불확실"의 혼동을 부러  야기하는 세력들이 권력을 유지하기에 늘 시대에 뒤쳐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리멘더링 (출처=금성출판사)


선거구제 개편은 이미 반세기 가까운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통치 체제를 떠나서도 이 문제는 늘 "생물"이라는 불확실성의 핑계로 상식 외의 결정이 나곤 했습니다. 중대선거구니, 정당명부제이니 여러 혁신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늘 이중 플레이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니 한국뿐 아니라 선거구의 기형적 편성마저 상상 속의 생물인 "개리 멘더링"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치 기득권들은 '생물 정치'를 넘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들고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확률이 작용하지 않은 불확정성의 양자 역학의 원리가 정치에 차용되는 이유는 "핑계의 확보"로 보입니다. 상자를 열어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반생반사의 상태로 놓아두어야 자신들의 정치 득실에 유리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양자의 세상은 "불확실성"이 수학 통계를 넘어선 "커다란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상태의 관측도 영겁에 가까운 "우주의 시간"으로 본다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지요. 스케일링, 복잡계 등 이론적 설명도 좋지만 저는 이것을 "우주의 섭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양자 컴퓨터 IBM 퀀텀시스템 윈 (출처=나무위키)


이 섭리의 유추를 통해 양자를 관찰하고 복잡하고 불확정해 보이는 상태를 규준 하여 새로운 컴퓨팅 시스템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전의 디지털이 0,1로 연속된 가까이서 보면 무수한 점(디지트)으로 이루어진 점묘화라면, 양자의 컴퓨팅은 0도 1도 아닌, 아니면 0이기도 하고 1이기도 한 선과 면을 연속적으로 덮어 내는 채색화가 되는 것이지요. 보다 인간의 실제적 삶에 근접한 시스템이 구현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유권자는 두 눈 부릅뜨고 정치를 '관측'해 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옛 개념인 "생물의 정치"나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들며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거나 관측을 방해하는 정치의 꼼수가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비정상이 뉴노멀이 되는 반복을 더 이상 지켜볼 수는 없겠지요. 사안마다 관측과 평가를 명확히 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시스템"의 정치를 기대합니다. 그 발걸음이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진심부터 시작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덕분에 이런저런 짧은 생각이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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