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들의 갈등으로 이득을 착취하는 악당
새로운 달력은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한 꼬집 정도는 주는 것 같다. 하루하루 버거운 삶이 지속되지만 무언가 "새로움"이라는 조미료는 삶의 풍미를 일게 할 것만 같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캠핑 중 끓여 댄 이름 모를 김치 넣은 국물요리에 신묘한 가루 "라면 수프" 한 스푼이면 먹을 수 있는 찌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것이 있다면, 정치 뉴스를 조금 멀리 하자는 것이었다. 무관심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간강을 위해 과몰입을 차단하고 빈도를 줄이자는 결심이다. 그럼에도 불구 두 눈처럼 감을 수 없는 두 귀와 부지불식 간에 뉴스 채널 앞에 앉아 버리는 습관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뉴스는 문틈으로 스며든 찬 바람 마냥 이런저런 틈으로 내게 다가왔다.
올해의 시작에서 보이는 3가지의 장면들이 눈에 거슬린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사, 전장연의 출근길 시위, 그리고 언론과 미디어의 의제 설정
https://naver.me/xCiEIwBK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신년사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가장 먼저, 노동 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기득권 유지와 지대 추구에 매몰된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대기업·공기업 노조 등을 성장을 방해하는 ‘기득권’으로 몰아 ‘반노동’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선언이다. 윤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신년사에 포함됐던 ‘통합’이나 ‘협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편 가르기’ 국정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설 중-
윤 대통령은 작년 말 "화물연대파업 대응"이 자신의 최고 치적이라고 생각하는 듯싶다. 10.29 이태원 참사 대응 실패에도 불구 지지율이 상승하는 '비책'을 발견했다고 할까. 정치와 정부의 역할인 갈등을 "조정"하지 않았다. 아주 적나라하게 "증폭"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제대로 먹혔다. 국민들이 이리저리 갈라져 결국 더 큰 확성기가 이기게 놔두었다.
신년사의 3대 개혁은 "3대 갈등조장"으로 들린다. 반노동 정서는 윤 대통령만의 문제다. 우리의 교육과 사회 성숙도 문제로 노동하며 살면서도 노동자이고 싶지 않은 이율배반의 욕망이 작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노동보다 자본이 더 중요한 시대에 "반노동"의 기치는 유효해 보인다. 교육과 연금도 결국 이해득실의 공방이 되지만, 정작 국민들은 자신들이 수혜자인지 손해자인지 가늠도 안될 테니까. 그저 모두를 방관자 관평자로 만들면 되는 일이다.
예전 시골 동네에서 개싸움은 말리지 않았다. 결국 힘센 개가 다른 개를 굴복시키거나 약한 놈이 죽어 나가떨어지면 끝나는 일이었다. 굳이 말리지 않아도 동네를 어슬렁되는 개들의 서열은 자연 정리되고, 인간의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죽어 나간 약한 녀석만 생명을 내어 놓았지만, 그 마저 동네 사람들에게 찰진 단백질이 되었으니까.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738164?sid=102
이런 모습은 2021년 12월 3일 전장연 측이 출근길 시위를 시작한 후 약 13개월간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경찰과 서울시 안팎에선 전장연 시위가 1년 넘게 이어져 시민 피로와 불만이 극에 달하자, 서울시와 교통공사, 경찰 등이 ‘원칙에 따른 엄정 대응’으로 노선을 바꿨다는 해석이 나왔다. 정부가 화물연대 불법 파업에 원칙을 지키며 대응하는 게 국민 지지를 받은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 관계자도 이날 “전장연 측은 최근 약 2년간 출근길 시위 등으로 총 82차례의 지하철 내 시위를 벌였다”면서 “형사 고소와 민사 소송을 추가로 낼 것”이라고 했다. -기사 본문 중-
관련하여 법원의 "강제 조정"이 있었다. 교통공사가 전장연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조정을 결정했다. 전장연이 시위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공사가 2024년까지 19개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도록 강제 조정했다. 전장연에게는 5분 넘게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면 1회당 500만 원을 지급하도록 했다. 전장연은 이를 수용했고, 서울시는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조정 절차라는 것이 "법의 강제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법 행위이고 판결이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집권 여당의 시장은 사법부의 권고를 거부한 셈이다. 아무런 대화의 노력 없이 전장연 시위자들을 "난동꾼"으로 언론 플레이한다. 결국 출퇴근 불편을 겪는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손쉽게 갈등을 눈앞에서 치우자는 생각이다. 2011년 아이들 밥값으로 시장직을 걸던 때가 생각난다.
전장연 시위에 대해 이곳에서도 의견이 돌고 돈다. 사실 입이, 아니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설득을 했다. 잠시라도 갈등 분노를 삮힐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링크로 남겨 본다. (답글: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럼 다른 "수단"은 있을까요?) https://alook.so/posts/3wt5aM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378023?sid=102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인터넷신문협회가 공동 제정한 언론윤리헌장에 따르면 "윤리적 언론은 특정 집단, 세력, 견해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한 자세로 보도한다"며 '공정보도'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신년사 발표로 대신한 데 대한 언론보도는 '공정보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기사 본문 중 -
언론 지형의 불공정을 이야기하면서 "운동장 기울기"를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를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기계적 평형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언론은 태생이 편파적, 즉 편이 있는 기관이다. 소유주가 누구인지, 그들이 혼맥으로 보수진영 정치인과 재벌 기업들과 얽히고 얽힌 사이라는 것만 보면 알 수 있다. 어찌 자신들의 핏줄에게 총대를 겨눌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언론 개혁"은 이미 태생이 기득권인 언론이 '보도량'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운동장의 경기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편향된 것이 문제이다. 간단한 방법은 있다. 언론인들에게 10~20년 동안 피선거권이나 임명직 고위 공무원 임용을 금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상상이고 헛된 공상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만 결과를 유추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일이다.
운동장이 아니라 팀 편성이 문제다. 다들 왼쪽 골대만 노리고 겨우 한 두 명 오른쪽 골대에 힘겨운 슈팅을 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도 매한가지다. 살아 있는 권력 수사 같은 흰소리는 접어야 한다. 검찰 구성원들의 정치적 인식 자체가, 그 기관의 레거시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 생존의 방식이고 비기였다. 개혁은 고칠 곳을 제대로 알아야 가능하다.
이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가능하다. 편을 갈라 쳐서 "손가락질"하게 만들면 된다. 정치 문제만이 아니다. 건설 노동자 평균 일당 임금이 25만 원이라고, 35만 원에도 타일공이 없다는 기사가 쏟아진다. 진짜일까? 단순 막일(노무직)은 통계에서 뺐다. 목수, 미장, 타일, 배관 등 기술자들 노임이다. 그들은 1990년 대에도 하루 반나절 20만 원을 받았다. 언론의 야비함은 이런 것이다.
https://alook.so/posts/q1tGq0e
갈등(葛藤)이란 '칡나무와 등나무'를 이르는 한자어입니다. 일이나 사정(事情)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 화합하지 못함의 비유하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일상 중에 빈번히 듣게 되고 말하게 되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늘 그 처지에 놓여, 서로 상충되는 견해ㆍ처지ㆍ이해 따위의 차이로 생기는 충돌이 생깁니다.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법과 양심이라는 '도덕'과 화합과 절충이라는 '정치'가 있을 것입니다. - 본문 중-
지난 정권 시절부터 세상은 온통 '공정' 타령이다. 지난 대선도 서로 공정과 불공정 공방으로 0.7% 차이의 결과를 마주했다. 그 후 근 일 년 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공정"이 바로 세워지면 우리는 잘 살게 될까? 세계 최고의 자살률, 가장 많은 산재 사망자, 청소년 우울증 최고 국가, 그리고 가장 출생률이 낮은 이 나라는 "공정"하면 살만해지는 것일까?
공정은 세상의 권력자의 잣대와 척도로 평가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평등은 범인들의 박탈감에서만 측정되는 세상이다. 지금 기득권들이 외치는 "공정"은 "정의"와 등치 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정당화와 합리화의 알리바일 뿐이다. 앞서 수많은 논란을 나은 법치주의의 공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공정이라는 논법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지사로 정당화할 뿐이다. 최약자들의 정당한 권리 구제조차 불공정하다고 공격하는 사회를 조장했다. 갈등이 싹트고 증폭되었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이 갈등으로 번진 "공정" 서바이벌의 심판이나 심사위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누가 더 공정하고 덜 공정한지를 부추기어 갈등의 다툼으로 "승부"를 가려서는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공정이라는 아우성이 숨어들고 평등과 불평등을 이야기하여 누구나 살 맛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까기가 아니라 "모두반사"하는 태도는 상대편의 거울상일뿐이다. 거울에 비친 손이 왼 손이든 오른손이든 같은 손이라는 이야기다.
"완장"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작은 권력이든 큰 권력이든 취하면 약도 없는 주사에 빠지기 십상이 된다. 그 자리가 티끌 같이 작은 미물일지라도 자신의 권력은 달나라에 닿을 듯 넘치게 받아들이게 된다. 사달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배척하고 맘대로 하는 작은 권력은 불공정의 이슈가 아니다.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이다. 공정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아닌 권력의 해석일 때가 많다. 하지만 평등은 누구나 인지 인식 가능한 가늠이다. 이 작은 손바닥 세상에도 완장은 안방순사가 된 지 오래이다. 하지만, 진정 빛나는 완장은 "주번, 당번"의 완장이 아닐까. 책임과 의무로 할 바를 다하는 완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