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에 붙여
사면은 오래된 제도입니다. 서양에서는 함무라비 법전, 한국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할 정도이지요. 사면은 군주제, 즉 왕과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의 유산입니다. 군주가 은혜로써 죄인을 풀어준다는 은사권(恩赦權)에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이 실질적인 통치의 룰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법부의 결정 심판에 대한 "예외적 변경"이라는 점에서 삼권분립의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회적인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사면법과 관련된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한 결정문을 보기로 합니다.
“사면권은 전통적으로 국가원수에게 부여된 고유한 은사권이며, 국가원수가 이를 시혜적으로 행사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법이념과 다른 이념과의 갈등을 조정하고, 법의 이념인 정의와 합목적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제도로도 파악되고 있다.”(2000년 헌재 결정문)
사법 결정, 재판도 결국 사람의 일이라 오류가 발생했을 때 시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범칙 위반에 해당하는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원활한 교정과 사회복귀 기회를 부여하게 됩니다.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통해 국민화합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회적 통합"이 이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전직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들의 경우가 논란을 부릅니다.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시민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위헌의 소지가 있습니다. 헌법소원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헌재는 번번이 각하했습니다. 내용상 헌법 일치나 합헌이 아니라 위헌 소원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모호한 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헌법재판관의 소수 의견으로 "대통령 사면권의 제한"이 헌법 개혁의 과제라고 대두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국회에 낸 헌법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그 안에는 대통령의 특별사면에 대한 절차적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이 들었습니다. 개정안에서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사면위원회 심사를 거치도록 헌법에 못 박겠다는 내용입니다. 무늬만 있는 사면위원회 심사의 실질화를 명문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자의적 사면권 행사가 이뤄지지 않도록 절차적 통제 규정을 헌법상 명문화한다”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개정안은 폐기됐습니다.
흔히 사면을 "면죄부"를 얻었다고 비유합니다. 면죄부란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 재정 충당을 위해 "대사"를 현금으로 사던 악행을 이야기할 때 씁니다. 대사(大赦, Indulgentia)중에서도 특히 중세 시대에 발행되었던 '헌금형 대사'와 그 증서를 이야기합니다. 돈 많은 귀족이나 실력자들이 돈을 내고 죄의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에서는 "면벌부"라고 용어를 정의합니다. 면죄부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악의적인 폄하 오역이라는 주장입니다. 죄는 짓는 순간 지워낼 수 없는 낙인이 됩니다. 그를 근거로 발각이 되거나, 자진 고백하면 "벌"을 받게 됩니다. 이 벌을 종교적 의미로 "보속"이라고도 합니다. 즉 죄에 대한 합당한 처분과 교화의 노력을 하는 것이 "벌"입니다.
한국말이 죄와 벌을 혼동하기에 면죄부의 의미가 오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죄를 짓다"도 있지만 "죄를 받다"라는 표현도 있으니까요. 사면이나 대사는 "죄"를 사하거나 면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벌"을 멈추거나 덜어 주는 일입니다. 그 후속의 조치로 "복권"은 정치적 해석일 뿐입니다. 사면을 해 주거나 대사를 받은 것은 "죄"가 깨끗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면은 "죄"를 인정하거나 그 판결을 존중하여 "벌"과 "보속"을 받는 사람의 짐을 덜어 주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니 벌이 무겁다고 생각이 들거나, 충분히 속죄해서 벌은 그만 받아도 된다고 생각될 때 "사면"이 되는 조건이 됩니다. 그 기준은 누구의 몫일까요? 바로 "용서"해 주는 피해 당사자들의 몫이 1차적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사죄와 보속, 속죄가 있어야 벌의 사면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직 대통령 등에 대한 징치적 사면은 성립 부당한 것입니다. 특히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면이나 대사는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법 제도의 피해자라면 "구제"를 받는 것이지 "사면" 받는 것은 부당합니다. 정파적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나 사죄도 없는데 용서라니요. 누구의 권한으로 하는 용서일까요? 이런 관점에서 대통령의 사면권은 통치의 "은사"로 내리는 권력자의 혜택이 되어사는 안됩니다. 정치인들의 불법으로 피해를 본 것이 국민들이라면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3672767?sid=100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 전 대통령은 이날 낮 12시 54분께 병원을 나와 논현동 자택으로 오기 전 자신이 오랫동안 다녀온 강남구 압구정동 소망교회를 찾았다. -기사 본문 중-
"면죄부"라는 말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주체들이 사용한 기치였습니다.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은 신만이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돈과 권력의 편의를 받고 죄를 면해주던 썩어 빠진 종교계를 개혁하자는 것이 지금의 개신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최대 개신교 종파는 "장로교"입니다. 장로교의 장로인 이명박 장로는 사면을 "면죄부"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적 사면이 정당성을 갖추었다 억지 인정해도, 그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남은 인생을 속죄하는 보속의 심정으로 보내야 함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측근을 통해 "사과의 의미는 죄의 인정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명박 장로님, 죄가 사해진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 동지가 벌을 면해 준 것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티끌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하면 됩니다. 국민통합의 시작은 그것부터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