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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10. 2018

스타 이즈 본 (2018, A Star Is Born)

익숙함, 오래됨과 새로움의 그 어디 즈음

웨스틴 락스타 잭슨 메인(브래들리 쿠퍼)은 그렇고 그런 공연을 마치고 술집을 찾던 중 골목길 깊숙이 위치한 드렉바를 찾아든다. 여장 남자들의 드렉 쇼가 펼쳐지는 술집에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해 들어 간 잭슨은 찌들 만큼 마셔댄 술이 깰 만큼 매혹적인 여성 보컬의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래에는 타고난 재능을 가졌지만 외모에 대한 평가로 가수의 꿈을 펼치지 못한 무명가수 앨리(레이디 가가)였다.

첫눈에 재능과 매력을 알아본 잭슨의 도움으로 앨리는 자신 안에 잠재된 싱어송라이터의 능력을 마음껏 쏟아 내며 톱스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잭슨은 진심으로 그녀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하기로 하지만, 어린 시절에 대한 힘든 기억과 점점 잃어가는 청력으로 인해 점점 술과 약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앨리의 그레미상 시상식장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돌이 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새로운 스타로 거듭난 앨리는 저물어가는 추억의 스타 잭슨과 함께 갈 수 있을까?


음악 영화, 리메이크 영화, 그리고 남성 근본주의 영화


영화 <스타 이즈 본>을 보기까지 볼까 말까 망설임이 있었다. 첫 번째 드는 생각은 최근 트렌드처럼 밀려오는 음악을 모티브로 하는 영화들 - 뮤지컬 영화, 뮤지션 자전 영화, 뮤지션 성장 영화 등 -이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띄고, 이런저런 이유로 크게 망하지 않을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다음의 이유는 <스타 이즈 본>은 이번 영화까지 총 3번 리메이크된 전형적인 할리우드 신데렐라 스토리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37년에 개봉된 윌리엄 웰먼 감독의 <스타 탄생>을 시작으로 1954년 주디 갈란트 주연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 주연의 1976년 작이 그것이다. 특히 1976년 작품이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처음 접한 이후 생각 보다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거리낌을 주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한 때 스타였던 남자가 저물어 가면서 무명의 여자를 스타덤에 오르게 '육성'하다가 여자가 스타가 되면서 둘 사이의 사랑이 비극으로 치닫는다는 영화의 이야기 줄기가 너무나도 보수적인 남성 근본주의 발상이기 때문이었다. 장 뒤야르댕, 베레니스 베조 주연의 <아티스트>가 전형적인 이야기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비긴 어게인>도 큰 맥락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 이즈 본>을 보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앞에 열거한 망설이게 하는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마지막 이유인 남자가 여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고,  그녀의 성공으로 인해 진심으로 기쁘지만 참담한 열패감을 느끼게 되는 스토리 텔링이 중독처럼 끌리게 되었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 쓰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 만들어지고, 주저하고 망설임보다 다시 꺼내어 보는 처참하고 아린 가슴 아픈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되는 것. 아프고 쓰린 줄 알면서도 어렵게 자리 잡은 딱지를 자꾸 긁어내는 것과 같은 묘한 끌림이 있는 것이 이런 전형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오래됨을 밀어 내지만, 결국 돌아온 자리엔 늘 '익숙함'만이


'Maybe it's time to let the old ways die' (OST : <Maybe it's time> 중)


영화는 크게 보면 대칭적 구조로 양분된다. 남자와 여자, 삶과 죽음, 새로운 것(New something)과 오래된 것(Old ways) 등으로 대비되어 이야기한다. 특히 새로움과 오래된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의 구성과 등장한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잭슨은 누가에 주름이 파이기 시작한 중년의 남성이고 앨리는 아직 싱그러운 젊은 여인이다. 잭슨의 마초적이고 남성적인 Rock 음악을 하는, 그중에서도 Old fasionable 한 웨스틴 록스타이고, 앨리는 드렉바에서 부른 샹송은 물론 록 베이스 음악에 댄스 음악까지 트렌디하고 힙(Hip)하기 그지없다. 잭슨의 개인사만 보아도 60대의 아버지가 18세의 어머니를 만나 가진 늦둥이로 태어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자지간으로 착각할 수 있는 친형과 음악 동반자로 함께 하고 있다. 앨리의 아버지가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벌리면서도, 리무진 운전사인 그의 동료들과 유튜브를 보며 조회수에 대한 의구심을 토론하는 것도 새로움과 오래됨의 대비를 보여 준다. 록 음악과 같이 화려했던 지난날은 저물어 가고 EDM이나 Midi Sound 같은 새로움의 물결은 거세게 다가온다. 이 이야기가 중년에게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것은 사랑을 주었던 여인에 대한 상실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오래됨'을 '새로움'이 밀어내는 현실에 대한 투영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보다 나은 세상을 내 두 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열정으로 버티어 온 나의 화려한 시간은 가고, 새로운 가치와 이제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새로움들 때문에 스스로 피폐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움'이 '오래됨'을 치환하여 자리 잡을 수 있지만, '익숙함'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잭슨의 형의 입을 빌려 말하는 잭슨의 '좋은 음악에 대한 정의'를 곱씹어 보면 그 생각에 닿을 수 있다. 음악이란 옥타브 내에서 12개의 음을 반복하여 열거하는 것이고, 음악가의 역량이란 그 12개의 음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구성하여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라 정의한다. 세상의 수많은 주파수 음역 중에 12개의 '익숙한'음을 자기 방식대로 들려주는 것이 음악인 것이다. 그것이 록이든 EDM이든 뽕짝 트롯이든 상관없이 그 안에는 12개의 음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상관없이 그 '익숙함'을 말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것이다. 새로움이 오래됨을 밀어낼 수 있어도 익숙함 없이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결국은 '나(I, My, Me, Mine)'


세월에는 장사 없고 대세에는 꼼수가 없듯이 이 모든 순리처럼 포장되는 스스로의 파멸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 지나간 세월에 빠지는 힘만큼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저 상실감에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질한 중년 남자의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의 당연 종결일까?


답부터 내리자면 '아니다'일 것이다. 술과 약은 줄이고 끊으면 되는 것이다. 시간의 상실감에 대해서는 순리에 대한 자각으로 정진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열패감에서 오는 울화는 주위의 도움과 여러 방법으로 잘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 모든 문제를 덮어 두고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미끄러져 개미지옥 같은 구덩이에 갇혀 본 사람은 잘 안다. 잘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두 다리는 더 깊게 그 구덩이에 갇히게 되고,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 수록 움켜 잡은 모래 덩이는 쓸려 내려와 그나마 남은 몸뚱이를 덮어 들게 마련이다. 이 지옥 같은 구덩이를 빠져나가게 되면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정말 쉽지 않은 몸부림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개미귀신의 밥이 되는 개미 신세가 될 뿐이다. 문제는 '내'안에 있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르며, '나를'위해 생각을 다잡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I'm falling in all the good times I find myself longin for change.'
(OST <Shallow> 중)
(변화를 위해 좋았던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 나는 뛰어들고 있어)

 

영화 <스타 이즈 본>에서는 그 해결의 열쇠를 조금조금 보여 주고는 있다. 잭슨은 아버지로 오해받는 나이 터울의 형 바비(샘 엘리엇)와 가족으로서는 결핍된 기억들을 지니고 있다. 반면 앨리는 넉넉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리무진 기사인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과 끈끈한 유대의 가족을 이루며 생활하고 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둘은 '결혼'으로 서로의 결핍과 상실을 채운다. 체계가 갖추어진 매니지먼트에 스카우트된 앨리가 첫 레코딩에서 긴장하며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잭슨은 앨리가 '익숙한' 피아노 앞에서 레코딩하기를 권유하여 위기를 극복한다. 광속으로 추락하는 인생의 내리막 길에 있어도 언제나 그 해결의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찾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저버린 잭슨을 못 잊어 괴로워하는 앨리에게 잭슨의 형 바비는 말한다.


'문제는 앨리 너도 나도 아니야, 네가 잘 못한 것이 아니야. 문제는 잭슨이야. 잭슨의 잘못이야.'


오래간만에 '신파조'의 음악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요즘에는 ‘신파조’라는 이야기로 그저 감성을 자극하여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는 의도된 ‘졸작’을 대변하기도 한다. 제도와 관습을 벗어난 사랑에 대한 응징이라는이면에는 그 사랑이 이루어 지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양면성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신파’라는 것은 세련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는 그저 뒤처진 낡은 감정의 조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뻔한 사랑이야기에 화도 내고 울고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새롭지 않지만 오래된 것 같지 않은 사랑이야기에 빠져들기 좋은 가을날이다. 덤으로 연기 팔색조 브래들리 쿠퍼의 노래실력과 레이디 가가의 민낯을 보는 재미도 함께 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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