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자들을 위한 부적응자들의 음악을 할 거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파로크 불사라(프레디 머큐리: 라미 말렉)는 이민자로 괄시받으며 공항에서 수하물을 나르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그 지겨운 일상 속에 유일한 낙은 동네 펍에서 라이브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라거 파인트를 들이켜는 것이다. 그 여느 날 중 어느 날 동네 펍에서 잘 나가는 밴드 '스마일'의 보컬이 이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은 멤버에게 다가가 자신의 보컬로서의 역량을 어필한 끝에 밴드에 합류하고 그간 힘겹게 감추어 두었던 끼와 열정을 쏟아 내게 된다. 전설적인 락밴드 '퀸'의 탄생된다.
4옥타브를 넘나드는 독보적인 음색과 화려한 퍼포먼스의 보컬 프레디의 역량과 엘리트들로 구성된 멤버들의 실험정신으로 밴드 퀸은 시대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밴드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반짝이는 영광 뒤에는 늘 그림자가 드리워지듯이, 프레디의 독선과 일탈은 멤버들과의 거리를 만들게 된다. 결국 주위의 유혹과 이간질에 프레디는 팀을 탈퇴하여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솔로 앨범을 제작하게 되는데...
전설의 락 밴드 퀸의 이야기 그들의 노래가 계속될 수 있을까?
락 밴드 퀸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밴드 퀸을 이야기하자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학창 시절과 청년시절을 묘사하던 클리셰가 되었던 밴드이기도 하다. 밴드 퀸은 1973년 데뷔 이후 15장의 정규 앨범을 남겼고, 그중 대중들에게 사랑받은 히트 넘버도 다수이다. 그러나 최근 받은 관심과 인기와 달리 밴드 퀸은 대중음악사에서 과소평가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1970년대를 주름잡던 하드 록 밴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의 아우라에 밀려 있었고, 198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음악의 시류를 이끈 마이클 잭슨과 시대와 호흡한 밴드 U2 등에 묻혀 소위 '끼인' 신세가 되었다. 밴드 퀸은 하드 록은 물론 발라드에서 디스코까지 건드리지 않은 장르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블루스에서 하드록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블루스 토닉의 음악적 계보에서는 밀려나 있다. 록 음악을 완결 지은 레드 재플린의 기타 리프나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부로 불리는 핑크 플로이드의 시대적 은유에 비해 퀸의 음악은 다소 가벼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밴드 퀸에게는 이렇다 할 수식어나 대명사가 따라다니지 않는다. 그러나 치과 의대생, 천체 물리학자, 전기공학자, 그래픽 디자인 전공자들이 밴드를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가 작곡에 참여하는 공화정과 같은 작업 환경, 그리고 밴드의 얼굴인 프레디의 독보적인 보컬 능력과 음악에 대한 해석이 그의 출생과 혈통에서 오는 내재된 히피 정신 등 면밀하게 들여다본다면 밴드 퀸의 다양한 얼굴들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알지만 부른 가수는 몰랐던 밴드 퀸의 주옥같은 노래가 꽉 채운 <보헤미안 랩소디>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는 물론 밴드 퀸에 대한 거대한 헌정곡 같이 느껴지는 당연지사일 것이다.
"부적응자들을 위한 부적응자들의 음악을 할 거야"
데뷔이래 밴드 퀸은 전통적인 블루스 토닉과는 거리가 먼 음악을 내어 놓았다. 클래식을 차용하고 과장된 가성을 사용하는 등 기존의 록밴드의 음악과는 결이 다른 신비주의를 혼합하였다. 그들 음악의 방향이 집대성된 것이 1975년 싱글로 판매되어 아직까지 사랑받는 '보헤미안 랩소디'이다. 이곡은 이전 작업과는 달리 프레디 머큐리의 일방적인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도 잘 묘사되지만 초반 브라이언 메이의 기타 솔로를 제외하고는 기타 리프, 아카펠라, 화성, 변주 등을 프레디가 사전 설명 없이 쌓아 가듯 만든 곡이고, 완벽을 추구하는 머큐리의 작업 특성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든 싱글이 되었다. 10월 31일, 즉 핼러윈데이에 발매된 이 비싼 곡에는 우여곡정이 많았다고 한다. 엘튼 존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존 레이드는 자신이 새로 맡은 팀의 첫 싱글이 6분에 이르는 오페라 같은 곡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 밖어 없었다고 한다. 베이시스트 존 디컨 마저도 곡을 잘라서 발표하자고 어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 로저 타일러, 그리고 브라이언 메이는 완강하였다. 아카펠라로 시작, 발라드로 이어져서 오페라가 등장하고 화려한 록 기타 사운드가 터진 후 다시 발라드로 끝나는 장대한 음악 드라마에서 1초도 덜어낼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선택이 적중했다. 전설이 되는 대중예술은 종종 비즈니스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밴드 퀸, 특히 프레디 머큐리의 '집시'정신이 있었다. 세상의 보편적인 규율과 기준에서 한참 벗어난 그리고 모두가 '정답'이라고 규정한 정의를 과감하게 깨버리는 용기는 프레디 머큐리 깊숙이 내재된 '부적응자'의 DNA였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름 파로크 불사라에서 볼 수 있듯이 프레디 머큐리는 이민자였다. 1946년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인도계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난 머큐리는 탄생부터가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영국 식민지 하급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고대 이란-인도계 혈토인 파르시였다. 파르시는 인도 북부(지금의 파키스탄)에서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다 무슬림의 창궐로 아프리카나 유럽으로 쫓기듯 숨어든 일족이기에 그들의 부모도 늘 떠돌아다니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의 혈통과 외모 때문에 프레디는 인종적 멸시와 차별도 많았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프레디는 성적 취향도 소수자가 된다. (팀이름 '퀸'은 속어로 '게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LGBT로 불리는 성적 소수자들은 규범화된 사회에서 늘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고 주류 다수의 사회에서 좀처럼 자리잡기 힘들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창작이 의도되었든 아니든 상관없이 프레디 머큐리와 밴드 퀸의 음악에는 '집시'적인 '부적응자'의 서사가 스며들어 있다. 극중 프레디는 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부적응자를 위해 연주하는 부적응자들이다. 세상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 어디엔가 속하지 못하고 마음 쉴 곳 없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밴드다”라고 말한다.’랩소디'라는 음악의 장르가 말해 주듯 롤러코스터 같은 서사의 이야기를 자유로운 음계로 웅장하게 풀어내는 것만이 자신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부적응자'의 페르소나를 표현하는 적합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밴드의 구성원들이 유망한 천체 물리학자에 매력 있는 치의대생, 전기 공학자라는 점도 '부적응자'들의 밴드를 말할 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부적응자'들은 이 사회에서 무능력으로 도태된 루저가 아니라 편협된 선입견이 만들어낸 규범에서 벗어난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낙오자로 낙인찍어 벌레 보듯 하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고함이 그들의 샤유팅이었을지도 모른다.
Whatever happens, I'll leave it all to chance.
Another heartache, another failed romance.
On and on, does anybody know what we are living for?
1991년 발매 앨범 'Innuendo' <The show must go on> 중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아무래도 마지막 십여분 동안 '재연'된 1985년 "Live Aid" 공연일 것이다. 솔로 선언을 하고 팀과 결별한 프레디는 술과 마약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에게 달려드는 것은 썩은 고기에게 달려드는 날파리와 같이 마지막 남은 것 까지 모두 빨아먹고자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달라지는 몸 상태를 보며 프레디 머큐리는 다시 노래하고 싶어 졌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호흡하고 한 목소리로 떼창 할 수 있는 그곳으로의 Comback home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멤버들과 화해하고 재결합 첫 공연을 전 세계 15억이 시청하는 "Live Aid Concert"에 서게 되고, 10만 명의 함성과 함께 피아노 전주가 시작되며 밴드 퀸의 귀환이 선언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음악 팬들은 잘 알고 있듯이 프레디 머큐리는 그 후 에이즈로 투병하다 1991년 11월 24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에 에이즈 투병임을 알린 지 24시간 만에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보컬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헌정'에 대한 배려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에이즈 환자의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간단한 텍스트로 그의 생을 정리하며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올린다. 그때 울려 퍼지는 노래가 바로 1991년 발매한 마지막 앨범에 수록된 마지막 곡 'The Show Must Go On'이다. 생과 사를 가늠할 수 없는 투병생활 중에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노래했다. 삶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누군가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생의 끝자락에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그 우연들이 모여 필연을 만들고 그 필연들의 집합이 운명이 된다는 것을 프레디는 노래한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부활'을 노래한 것이다. 불치병으로 스러져가는 육신은 결국 재가 되어 (프레디의 부모는 조로아스터교 전통방식인 조장- 독수리가 시체를 쪼아 먹는 것-을 원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화장했다.) 남았지만, 그의 3옥타브가 넘는 샤우팅으로 외치고 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의 바람대로 그의 영혼은 불멸하는 목소리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며 울려 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레디는 'Live Aid' 공연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의 신념이었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대로 산 것이 행복이고 성공이었는지 물었던 지난날의 자신의 야유에 대해 사죄와 존경을 보낸다. 파란만장하고 화려하지만 어두웠던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래도 기대어 갈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집(Home)이었을 것이다. 그 집이라는 것이 부모와 형제가 있는 집이기도 하고, 음악의 동지들이 있는 '밴드 퀸'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방랑하고 돌아온 탕자의 일화처럼 영화 같은 삶을 살다 간 뮤지션의 이야기는 울림이 있었다. 그간 음악사에서 과소평가되던 밴드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을 재조명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그 재조명이 한 편의 뮤직비디오 (최초의 뮤직비디오를 <보헤미안 랩소디> 뮤직비디오라 말하는 사람이 많다.)처럼 만든 랩소디로 헌정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연이어 음악영화 그것도 록 음악이 중심이 된 영화를 보았다. 록 음악은 스러져가는 '과거의 영광'을 대변하는 시대의 은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록 음악이 없다면 현재의 대중음악의 기틀이 없듯이 나의 지나간 날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보며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중년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근력은 빠지고 머리엔 희끗희끗 새치가 자라나며 눈은 점점 침침해진다. 육체는 이제 노쇠의 길로 들었으나, 삶을 바라보는 마흔은 또렸해지는 것을 느낀다. 참 다행이다. 이 모든 것이 웃고 울면서 이 영화를 함께 바라본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이 아닐까 싶다. 장황한 랩소디의 끈에 세레나데 끝맺음이 생뚱맞을 수 있으나 사랑은 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