첵 <마인>으로 보는 소유의 법칙
작년에 책을 한 권 소개받았다. 솔직히 고백컨데 책을 구입해 다 읽지는 못했다. 그저 서점 가판대의 책을 'F자 속독법'같은 훑어보았다. 언젠가 책을 다시 사 모아도 되는 형편이 되면 사서 보겠다고 그저 리스트업 할 목적의 살펴보기가 제법 긴 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팔로잉하고 있는 문학평론가의 글 담벼락에서 이 책의 인용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마인(MINE)>이다. 우리말로 바꾼다면 '내 꺼' 정도 되겠다.
서점에서 스쳐 지나듯 보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를 던져 주었다. 책은 '소유권'에 대한 정치, 사회학적 고찰과 담론을 풀어내고 있다. 제목도 "I, My, Me, Mine"이라고 외우듯 배운 "나의 것"이니 이처럼 직관적인 것도 없겠다 싶었다. 사실 '소유권'은 우리가 단순 인지하여 받아들이는 것처럼 단순한 개념은 아니다. 이 개념은 현대 사회와 그것을 운영, 유지하는 경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 있다. 최근 플랫폼 경제와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그 개념의 정의도 새로 갱신되고 있지만, 권리를 잡고 있으려는 주체들은 그 변화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에서 심각한 갈등이 유발된다.
저자들은 소유권처럼 잘못 알려진 것도 없으며, 소유권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나면 여러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눈 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쉬운 예가 '구독'에 대한 몰이해가 그러하다. 마치 '구독'은 '소유'와 전혀 다른 개념인 것처럼 호도하는 세력들에 의해 소비자는 눈을 멀어 간다.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한 사용의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이미 '소유욕'을 갖기 마련이니까.
"실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머그컵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머그컵을 사려는 학생들보다 그 가치를 두 배 이상 높게 불렀다. (...) 이 모든 실험에 담긴 기본 심리는 동일하다. 인간은 물리적으로 어떤 물건을 차지하고 나면, 그 가치를 전보다 높게 매긴다.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가치로 바뀌면서 물건을 먼저 받고 이를 포기할 때 부르는 가격이, 현금부터 받고 부르는 가격보다 높게 나타난다. 머그컵을 파는 학생들은 평범한 머그컵을 파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나의’ 머그컵을 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가격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탈러는 이를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라고 불렀다." - <마인(MINE)>, 마이클 헬러, 제임스 샬츠먼 지음, 흐름출판, 2022-
이 책의 설명에 따르더라도 '점유'와 '소유'는 다르다. 인간은 소유 욕구가 대단하다.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에 애착을 갖는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소유하지 않지만 단지 점유하기만 해도 거의 같은 소유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 애착의 원인은 '소유한 것처럼 느끼는 착각'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들이 예를 드는 것을 빌어 오자면 이러한 이야기다.
당신은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당신이 쇼핑 카트에 담아 두었던 우유를 쏙 빼서 자신의 카트에 담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이며 반응은 어떠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왜 제 우유를 함부로 가져가시는 거죠?” 그런데 잠시만 이성의 채널을 켜고 생각해 보면 금세 깨닫게 된다. 당신은 아직 그 우유를 계산하지 않은 것을. 따라서 그 우유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임을. 당신은 그저 그 우유를 일정 시간 '점유'했을 뿐이다. 이런 점유의 감정은 소유의 욕구를 일으킨다. 점유한 것만으로 소유 점탈의 감정을 소유권자와 똑 같이 느끼게 된다. 특히 현대의 복잡한 소유 양태가 혼동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저자들은 하나 남은 닭다리, 길거리의 주차 자리부터 디지털 개인 정보, 부의 분배까지 ‘소유’를 둘러싼 세상의 온갖 논쟁은 단 6가지 법칙에 따른다고 이야기한다.
1. 선착순 - 먼저 오면 먼저 대접받는다.
2. 점유 - 점유의 법적 권한은 90퍼센트다.
3. 노동 - 내가 뿌린 것은 내가 거둔다.
4. 귀속 -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5. 자기 소유권 - 내 몸은 나의 것이다.
6. 상속 - 온유한 자들이 땅을 상속받는다.
소유권은 이런 법칙에 따라 결정이 된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조악한 법칙처럼 보이나 나름 세상의 온갖 평화를 유지해 주기도 한다. 주요 자원이나 식량, 각종 가치 재화, 음식, 주거, 성적 파트너 등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해 갈등과 다툼이 일어날 때 이를 중재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폭력적이고 강업적인 분쟁이 아니라 서로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힘이 있는 사람들의 '유권해석'이 개입하게 되어 이 법칙들이 크게 요동치게 되었다. 국가, 기업, 기득권 등 힘이 있는 권력자들이 이 6가지
법칙을 교묘히 조합 해석하며 원칙을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노동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 세대까지는 전가의 보도처럼 이야기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주인의식'이라는 단어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조직과 회사에서 일할 때 많이 들었던 핀잔이자 경고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사장님, 혹은 자본가는 종사하는 직원이나 노동자가 회사일을 자기의 것처럼 생각하길 바란다. 그 말의 집대성이 '주인의식'이 된다. 주인의식을 말 근대로 풀어낸다면 모두가 '소유권자'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할까? 시대를 거듭하면서 노동 시장이 재편되는 모습을 보면 언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점유한 자리의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흔히 'Job security'라고 하는 고용보장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현실과 이상의 가교를 만들어 주던 것이 정규직이고, 그 안에서의 연공서열식 보상체계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노동 시장에서 혁신의 과제이자 철폐의 대상이 되었다. 논리가 상충하고 주장이 모순을 만든다. 회사를 자신의 것처럼 하기 위한 방법이 개혁의 숙제라니 이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이 없다.
구조조정이라는 상황의 단면을 보면 그 아이러니함이 잘 드러난다. 회사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던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노동자는 자신의 현재에서 미래로 그어 놓은 여러 계획이 회사의 미래에 오버레이 하여 중첩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노동자는 구조조정에 저항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위와 직책, 사무실의 자리와 업무를 '빼앗긴다'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을 소유한 적이 없고, 그저 점유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서 노동 유연화와 탈점유화는 커플링 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 유연화는 자본가와 사용자의 로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들은 그런 상황이 온다면 굳이 '주인의식'같은 것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쉽고 가볍게 움직이고 이동할 수 있어야 격변하는 노동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윤리나 애사심을 굳이 가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노동 인력들의 워크 에식의 문제는 단지 세대론에 묻어갈 이슈가 아닌 것이다. 자본가와 사장님들은 회사에서 점유권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것처럼 주인의식을 가진 인력들을 원하기 마련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커리어'라는 말이 점점 유효해진다. '커리어 패스'가 직급 연공서열의 승강을 뜻하지 않은지 오래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그저 '커리어'를 점유하게 되었다. 커리어는 노동자 개인의 직무 경험의 총합 '경력'이 된다. 직급이 사라지는 이유를 서열을 탈피한 수평적 업무구조의 효율성이라고 하지만, 사실 효능은 탈점유화에 있다. 더 이상 과장, 차장, 부장이 될 수 없는 평평한 커리어 패스에서 점유할 목표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자본가들은 무산계급인 노동자에게 잠시 유산계급의 착시를 주었던 것이다. 회사의 '자리'를 내어 주어 잠시 점유하게 해 줌으로써 그 노동자의 충성심과 주인의식이 녹아든 기대 이상의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일종의 사회적인 합의의 결과였다. 이제는 그 자리마저 빼앗아 노동자는 완전한 무산계급인 것을 각성하게 해 주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공간이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노동력 제공자나 사용자 모두가 거쳐가는 양면 시장이다. 이곳에서 재화의 가치를 내는 데이터 노동자나 공급자는 그저 플랫폼을 지나갈 뿐 어느 한 곳도 점유할 자리가 없다. 그저 경제적 이득이라는 직접적 편익이 '이용'을 선택할 뿐이다.
<마인>의 저자들이 노동자들의 점유권을 설명하면서 '바닷가재 갱단'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바닷가재 갱단’ 이란 미그메인주에서 랍스터를 잡는 마을 주민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오랜 유대 관계로 묶인 대가족 및 동맹자들로, 자체적으로 정한 해역을 공격적으로 지키고 독특한 부표가 달린 바닷가재 덫으로 그 영역을 표시한다. 바닷가재 갱단은 조업 시기, 어획량, 항구 설비와 판로, 난파 시 상호 원조 등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조율한다... 이들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다 같이 협력한다. 외부인이 그물을 놓으면, 일단 말로 경고한다. 그래도 거두지 않으면 그물과 낚싯줄을 끊어놓는다.” -<마인> 중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점유+시간=소유권”이라는 공식을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일상에 흔한 '점유권'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내법에서도 국유지나 기타 사유지더라도 장시간 점유하게 되면 소유권자가 마음대로 퇴거나 처분을 할 수 없다. 그 공간의 점유와 시간의 함수를 사회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노동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들이 장시간 회사의 자리와 직무를 점유하게 되면 자본이 마음대로 퇴출시킬 수 없게 된다. 현대 자본은 이를 자신들만의 굳건한 '이해관계자-스테이크 홀더'의 옹벽을 허물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 점유자들이 소유권을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그래서 자본은 소유 공식의 핵심이 되는 점유와 시간에 대한 정보 접근을 원천적으로 제어하려고 한다. 최근의 노동조합에 대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공격이 그 대표적인 양상이다. 그 결과 일반인들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노동조합을 ‘바닷가재 갱단’ 같은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다. 사회의 필요악으로 만들어 그저 찍어 내려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최근의 화물연대 문제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플랫폼'의 자본들이 그러하다. 데이터의 점유나 사용 시간에 대한 지표를 늘 '영업기밀'이나 '베타 실험 중'이라고 에둘러 비공개한다. 사용자이자 공급자이며, 고객이자 데이터 노동을 제공하는 주체들에게 점유와 시간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플랫폼은 '공유'니, '구독'이니 하며 '점유 착시'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바닷가재 갱단의 역할을 일부지만 긍정한다. 제어하기 힘들 수도 있는 외부인의 조업을 제한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바닷가재가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매인주의 바닷가재 어부의 자녀들이 가업을 물려받게 해 여러 세대에 걸쳐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 정부도 이들의 점유권을 인정하고 있다. 완전한 규제도 어렵지만 새로운 세력이 마구잡이 어획을 하게 된다면 바닷가재는 씨가 마르게 될 것이고, 주민들은 생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들도 지적하듯이 이러한 점유는 또 다른 기득세력을 형성한다. 새로운 시참과 외부 유입원들에게 불리하게 불공정할 수도 있고, 변화와 혁신이 필수인 시대에 도태될 수도 있다.
'공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 글쓰기 플랫폼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내 안으로부터의 성찰의 결론이었다. 나는 이곳의 점유자로서의 논리를 내 세워 '손해 감각'을 표출하였다. 그 핑계를 공정과 세대 문제, 기업 윤리와 업무 역량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미 시대는 여론과 가치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 변화된 지형 안에서 점유에 대한 논리가 그저 공정과 정의라면 더 이상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점유에 대한 유권의 해석이 급변했고, 반대로 점유 권리가 개혁과 혁신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양한 주장과 관점들을 고려하여 어떤 갱신의 노력이 필요할까? 공정, 규준, 정의 같은 것들은 오히려 갈등을 미봉하여 곪게 만들 뿐일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 공익과 서로의 편익의 총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정의 기준과 정의의 규준은 시대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 후행적 조치들일뿐이다. 선행적으로 그것들을 상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보편타당한 소유와 점유에 대한 정의는 사회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 된다.
우리는 누가 소유권을 가질 것인지, 왜 내 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지. 아니 도대체 소유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헷갈리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점유만으로 손해 감각이 들게 된다. 나 또한 그리 여기고 자칫 지난한 주장을 거듭한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되었다. 새로운 공론에 나는 공론이 아닌 사견을 마치 '공정한 준칙'인 것처럼 주장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플랫폼' 기업과 경제에 대한 거름종이 없는 날 선 비판이 플랫폼에서는 불편하였을 수 있겠다 싶다. 이제는 '타협'과 '조정'의 의견을 나누는 자세와 탐구로 방향을 새로이 잡아 보아야겠다.
그럼에도 불구 점유에 시간이 곱해지면 소유의 의미가 된다는 것은 나 스스로의 '주인의식'이라는 로열티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의 입장에서 고려해 주기를 바라는 지점이다.
* 문학평론가 한영인 님의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영감과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