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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아침 생각] 탕자의 비유

웅이가 여니에게

by 박 스테파노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루카 복음 15.17,21-


복음 말씀은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루카 복음은 양, 돈, 아들의 세 가지의 비유로 ‘잃어버린 것’과 ‘다시 찾은 것’에 대해 말씀을 전합니다. 이 세 가지 모두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비유는 잘 알면서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자신의 몫을 탕진한 아들을 반겨 잔치까지 연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거슬려집니다. 그리고 꿋꿋이 집을 지킨 큰 아들에게 오히려 가르치듯 훈계하는 모습도 이해가 어렵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24절 후반 ‘그래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로 전후반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각 부분의 말미에는 똑같은 아버지의 말, “이 자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리다’라고 사용한 아폴류미(ὰπόλλυμι)는 루가 15장의 키워드가 됩니다. 이 동사는 다른 구절에서는 ‘죽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굶어 죽게 되었다)


아들의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아버지의 곁을 떠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아들의 비참은 '있어야 할 곳'에서부터 벗어난 결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폴류미의 의미를 생각하기 좋은 힌트가 됩니다.


아폴류미는 이런 의미에서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떠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잃어버렸다고 번역할 경우도 단지 ’ 모습이 없어졌다’ 것만이 아니고, ‘멸망을 향해 떨어져 추락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잃어버린 아들의 귀환’은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됩니다. 단지 종적을 감추고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멸망을 향해 회복 불능의 추락에서 ‘스스로’ 깨우쳐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겐 기적과 같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질시하는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형은 “아버지는 저런 아들을 위해 왜 소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가?”라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형이 동생에 대한 생각은 30절에서 ‘내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동생을 질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한 것으로 생각했던 형은 돌아온 그를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약 큰 아들이 언제나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며 생활하였다면 당연히 잃어버린 동생의 귀가도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형이 아버지의 설득에 따를 것인 아닌지는 말씀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듣는 자에게 맡겨질 뿐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귀에겐 들리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이 흔히 ‘탕자의 비유’라 일컬으며 오독하는 지점입니다. 교회나 서적엔 방탕한자의 ‘회개’만을 강조하는 설교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앞선 두 개의 비유 -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 를 연결해 본다면 쉽게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어린양과 동전이 ‘회개’ 외 ‘회심’으로 주인의 손에 돌아왔을까요?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찾아 나선 주인이 찾아낸 것입니다. 이렇듯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는 큰 아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말씀입니다.


머물러 안주하는 것만으로 신의 축복과 천국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 질시와 미움에서 이해와 사랑으로 변모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 또한 다른 형태의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서만 선한 이중적인 사람과 교회에 다니는 것 자체가 사치인 가난하지만 선한 사람들 중에 누가 천국에 가는가?’라는 질문에 열에 아홉은 둘 다 못 간다고 말했습니다. 참 오만한 신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진영에 무리에 집단에 있다고 모두 선한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의 깨우침은 늘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 학살자 전두환 씨의 폭로성 발언과 행동이 화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성과 용서를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의 회심이 진심이 되려면 이 사회가 변화해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정의고 공정이며 상식이자 양심이 됩니다. 당장의 불이익을 셈하여 침묵하고 애써 외면하는 자는 회개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생을 맞이하지 않으려는 형의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지 않고 동생의 귀가를 형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이해하고 품는 것이 ‘회개’의 또 다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by Father> Sieger Köder (출처=trechiyakobsky museum)


-곰탱이 남편의 어여쁜 아내와 나누는 아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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