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으로 만든 텍스트 폴리포니
클레오(얄리차 알파리시오)는 멕시코시티 내의 중산층 거주 지역인 로마(colonia roma)에 살고 있는 백인계 의사 집안의 입주 가정부이다. 사회 계급이나 태생이 잠자리의 공간과 부리는 자와 행하는 자로 나누어 놓았지만, 천방지축 4남매와 제일 큰 어른 할머니는 물론 생화학자인 안주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 마저도 클레오를 가족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매일 다를 것 없던 일상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소피아의 남편은 외도 끝에 캐나다 출장을 핑계로 집을 나선 뒤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고, 클레오와 연애를 하던 하층민 출신 페르민은 클레오의 임신 선언에 종적을 감춘다. 세상은 정치적인 충돌로 하루하루 시끄럽기만 하고, 집에 남은 네 아이와 세 여인의 삶은 버거워 보이기만 한다. 이들에게도 어마 어마한 사건이 찾아와 인생의 방향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멕시코 출신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영화 <로마>를 흑백으로 만들었다. 감독이 직접 말하는 이유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자신의 유년기의 이야기를 자전적인 서사로 꾸린 영화이기에 흑백으로 찍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영화 <로마>는 멕시코 - 미국 -멕시코 - 미국을 오고 가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두툼하게 만들던 알폰소 쿠아론의 17년 만에 돌아온 '메이드 인 멕시코' 영화이다. 형식은 가정부 클레오의 시선으로 되짚어 보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 화자는 4남매의 남매인 페페,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시절의 '내'가 말하는 그 시절의 서사로 영화는 흘러간다. 영화의 소재가 감독 개인에게 소중한 기억이기에, 감독은 그의 정체성을 영화 곳곳에 투영한다. 두툼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쌓은 영화 형식적, 기술적인 역량은 물론 그의 이전 작품에서 파고들던 그의 영화적 재료를 맘껏 풀어놓은 영화가 <로마>이다.
태생적 약자로 이 땅의 온갖 역경과 수모를 헤쳐 가는 여인이 주인공이고, 사회적 계급 차별과 정치적 폭력의 묘사가 사실적으로 등장하며, 역사와 일상의 아이러니한 메시지를 열거하는 미학적 시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이 되는 내러티브가 그러하다면 형식이 되는 색과 소리의 사용은 더 치밀하고 감각적으로 돋보인다. 영화의 내러티브 메시지가 더욱 두드러 보이게 만드는 촬영과 음향의 기법은 알론소 쿠아론 감독의 감각은 곱씹을수록 독보적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일면의 이야기이면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일갈이기도 하고, 미학적이며 은유적인 자연과 우주에 대한 세계관은 유려하게 표현된다. 그의 이전 작품 <위대한 탄생>, <칠드런 오브 맨>, <이투 마마>, <그래비티>의 텍스트와 클리쉐를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르게 배치하는 기법은 리얼리즘과 네오리얼리즘의 경계에서 맴돈다. 영화 <로마>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꼭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고 한다. 그의 기억하는 과거와 현재 직시하는 현재, 그리고 통찰하는 미래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이 밋밋한 영화 <로마>에 투영한 것이다.
음악에서도 모노폴리와 폴리포니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는데, 단성악이 다성악으로 발전 진화하면서 음악이라는 청각의 미디어는 입체감을 갖는다는 정의에 모두 공감한다. 문학에서도 폴리포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상호 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하는 비교문학의 틀이 생겨 나기도 하였으니, 세상에서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이야기'는 한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로 반복되거나 변주되기도 하고, 규칙으로 쌓고 겹쳐 놓아 또 다른 울림을 준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빗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마>는 폴리포니의 상호 텍스트 중에서 '메타 텍스트'처럼 읽힌다. 그의 이전 필모그래피의 해설판처럼, 그의 이전 이야기의 당연 명제처럼 느껴진다.
"그저 밋밋하게 진행되다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데, 다
시 그 밋밋함으로 가는 영화 같아."
영화를 보고 나서 아내가 내게 말했다. 영화가 밋밋하고 무언가 커다란 사건이 없는 듯이 흐르는데 묘한 긴장감이 있다는 반문이었다. 영화 <로마>는 그런 영화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사건'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일상'이 자리 잡고 있다. 영화 <로마>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장면을 비상업적인 형식으로 풀어냈지만, 오히려 감성과 감각에 다가서는 발걸음은 더 무겁고 성큼 댄다.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 나서 남는 여운과 잔 생각들이 더욱 짖게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은 돌이켜 보면 개인 인생사에 있어서 어마 어마한 것들이다. 소피아의 남편은 젊은 여인과 바람이 나 어린 자식들에게 출장 간다 속이기까지 하면서 집을 나가 버린다. 임신했다는 말에 보던 영화도 뒤로 하고 줄행랑친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클레오는 극렬했던 1971년 멕시코의 '성체 주일 대학살'사건을 스쳐 경험하다 결국 사산아를 낳는다. 가족을 버린 남자를 잊기 위해 그가 애지 중지 주차 관리하던 애마 '갤럭시'로 찾아 간 바닷가에서 두 아이는 죽다 살아난다. 책임과 도리에서 도망간 남자들을 대신해 영화에서 여성이 중심이고, 시선과 시점 또한 여성의 시각이다. 클레오는 두 자녀를 익사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네 아이를 건사하기 위해 생화학자 소피아는 출판사 출근을 결심하고, 도망간 가장을 대신해 어른이 된 할머니는 사산한 가정부를 위해 진심으로 보듬는다. 어마 어마한 사건은 아마도 역사라고 거창하게 부르는 남자들의 이야기라면, 소소하지만 결국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일상이 여자이며 어머니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극명한 대비로 선명한 메시지를 만들어 낸다.
역사는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 정의된다. 엄청나게 어마 어마하고 거창한 사건들을 기록한 사건이라는 점과 점의 연결이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일상의 사전적 의미는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그런 것들의 연속된 선이 일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사건의 기록과 일상의 기억은 좀처럼 섞이기 쉽지 않다. 역사라는 사건의 기록이 승자와 강자의 것이라는 정의에 실어 보자면, 사건과 사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인류 역사의 승자이고 강자라 착각하는 남성 중심의 사고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로마>에서 남성은 '찌질한' 존재로 이야기한다. 정치적 이념이 신념이라 착각되는 시절에 어디에 쓸지도 모를 무술을 연마하며 흙바람 날리는 연병장에서 차력의 대가에게 강의를 듣는 이해 불가능한 남성들, 좁은 차고에 긇히지 않게 핸들을 요리조리돌려 댈 줄만 알지, 차고의 크기에 맞추어 구매할 줄 모르는 비현실적인 남성들에 대한 비판은 비유적으로 담담하다.
'죽으면 말이 없어, 죽으면 어떻게 말을 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 처음에 남자아이들이 총싸움을 하며 옥상 빨래터로 올라가 클레오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총싸움 놀이가 질렸는지 페페는 옥상 채광창에 누워 버리고, 이내 클레오도 머리를 맞대고 눕는다. 그 순간 카메라는 옆집과 그 옆집, 그리고 그 옆집의 옥상을 담아내고, 그 옥상에는 클레오와 같은 여인들이 일상의 빨래에 여념이 없다. 그렇듯 일상은 여인들의 하찮은 듯 중요한 반복되는 생활의 조합인 것이다. 그들의 일상은 곧 그들의 기억이고 언어가 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자리 잡는다. <이투마마>에서 섹스를 갈구하는 구순기의 어린 소년들의 길잡이가 되는 여인이나, <그래비티>에서 결국 살아 남아 생환하는 존재가 되는 여성이나, <칠드런 오브 맨: https://brunch.co.kr/@parkchulwoo/54>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는 잉태 가능한 흑인 소녀는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된다. 암울한 오늘로 실낱 같은 희망을 말하고 싶은 '디스토피아'가 도래한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존재는 짙은 수염 달고 승천한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동정으로 수태할 수 있는 여성의 존재가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되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갈색으로 보였다. 갈색은 대지의 색이며, 안정의 색이고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견실함의 색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모성을 잠재한 존재이다. 그 의미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여성의 시각'으로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클레오가 물로 씻어 내리는 바닥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시작한다. 여느 롱테이크와는 달리 바닥을 제법 근접 줌 업하여 씻겨가는 물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 준다. 3분 여간의 이 첫 롱테이크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음악도 없고 명확한 소리도 없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영화 <로마>의 영화 기술적 특징은 '롱테이크'와 '왜곡 없는 사운드'에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하루를 마감하며 클레오는 아이들을 재우고 2층부터 1층까지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불을 끄며 하루를 정리하는 360도 팬을 돌리는 롱테이크가 등장한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의 무게를 묘한 공간감으로 보여준다. 양수 터진 배를 부여잡고 도착한 병원은 낮에 발행한 시위 테러 사건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 어수선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특별한 영상적 장치 없이 클레오의 가장 슬픈 사건을 담담히 보여 준다. 후반부 가족 모두 함께 여행 간 바닷가의 모습과 일렁이다 못해 삼킬 듯이 밀려오는 파도에서 팔 한두 개씩 허우적거리며 등장하는 장면은 급박함은 없지만 숨 막히게 만든다. 영화의 시그니쳐 장면처럼 되어 버린 두 아이를 익사 직전에 구하고 '남겨진 가족'이 돼버린 모두가 부둥켜안고 서로를 보듬는 장면은 따사롭기 까지 하다. 이처럼 흑백은 오히려 사람들이 상상 가능한 색을 입히어 자시만의 컬러북을 그려 내듯 다채롭다.
영화 <로마>의 특징은 사운드에도 있다. 처음 영화를 보면서 음향을 여러 번 체크하게 된다. 사람들의 말소리 보다,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길에 지나가는 소년 고적대의 행진 소리가 더 크고 우렁차게 들리고, 새소리와 강아지 소리, 시위대의 구호 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와 세상의 백색 소음은 묘하게 섞여 울린다. 이런 현실감 있는 사운드는 흑백이라는 영상의 한계와 1970년 대라는 시간적 제한을 보완해 준다. 사운드는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 주고 그 상상을 배가 시켜 준다. 거기에 더해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한 편집에서 드러나는 시퀀스와 시퀀스의 유지적 연결이나, 장면 장면에서 등장하는 화자의 위치 변화는 그가 얼마나 '감각'적인 서술가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영화 <로마>를 고민하다가 보았다. 그것도 Netflix를 가입하고 첫 작품으로 보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영화 <로마>를 왜 Netflix라는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제작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흥행이나 시장의 반응보다는 창작자의 미학적 욕구의 발로에 의해 만든 흑백 영화를 올리기 위한 좋은 대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영화는 사실 한 번으로 느끼고 생각하기에는 아쉬움이 크기 마련이기에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수년, 수십 년이 지나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것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이런 스트리밍 플랫폼의 시대가 되면 극장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의견을 물었다. 내 대답은 '아니다'로 정리하였다. 우선 영화 <로마>는 적어도 스크린이라 느껴지고 음향이 제대로 된 곳에서 다시 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영화라는 콘텐츠를 담고 배달하는 플랫폼으로서의 넷플릭스는 매우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극장에서는 보는 이유가 나름 나름 존재한다. 스트리밍 되는 음악도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듣는 것과 직접 보고 듣는 공연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인하여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성의 영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의 축복이고, 이런 기술의 시대에 사는 행운임에는 틀림없다. 산업의 측면에서도 극장의 존속은 유효하다고 생각된다.(오히려 위협은 드라마 시장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거대 방송사들이 제작관여 송출하는 드라마. 드라마의 수익을 숟가락 얹은 수천 명의 구성원이 나누어 갖는 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어찌 되었든 영화 <로마>는 밋밋한 진행에도 불구하고 아주 많은 생각을 던져 주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 한 편으로 다른 영화가 떠오르고, 다른 장르가 생각나고, 개인적인 추억이 기시감으로 오르며, 하다 못해 기술과 산업에 대한 고찰까지 던져 주는 그런 영화가 <로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