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들.이 05] 그대와 영원히.. 사랑하기 때문에
지난 글에서 김현식을 되돌아보며, 당분간 요절한 뮤지션은 글에 담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보다 그 회고가 수월하지 않았다. 마음이 참 힘들었다. 그들이 나와 같이 늙어 지금 나의 낡아 버린 모습과 조응해 주면 위로가 되었을까? 그들의 요절은 그때 그 모습을 내 가슴속에 영원히 박제시켜 놓은 듯, 그때의 내가 사무치게 안쓰럽고 그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하"의 이름을 떠 올렸다. 이 연재를 처음 기획할 때 "가장 강한 인연, 우연 같은 만남"의 흐름대로 써 내리고자 다짐했다. 김현식의 음악과 생애를 반추하고 추모하는 생각의 끝에 유재하의 이름이 걸쳐 있었다. 그 다짐대로 쓰기로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진부하기 끝이 없다. 동시에 이 말만큼 가슴 설레는 말은 없다. 사랑이 진부하고 낡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떤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는 하루에 한두 번은 그 말을 접하거나 떠 올리며 살아간다. 사랑에 가치의 차별이 있겠냐마는 넘쳐나는 사랑타령에 진정성이라는 값은 땅에 떨어지고 덩달아 그 의미마저 흐릿해진지 제법 되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앞세운 거짓이 횡행하고 밀란 쿤데라의 책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리자면 조건 반사적으로 아직 디지털화되지 않은 낡은 책장 속 낡은 사진앨범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형체가 흐릿해진 채 세상에서 낼 수 없는 추억만이 가능한 색을 띠면서 말이다.
유재하(柳在夏, 1962~1987)의 첫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1987)는 사랑 노래의 옴니버스이다. 흔히 대중들이 "한국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고 하지만, 또 사랑 타령이라니 자기모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유재하의 노래는 "사랑 노래"다. 황홀한 사랑 감정과 쓰리게 아픈 이별, 그리고 환희에 가득 찬 재회를 진솔하고도 영롱한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유재하를 다시 기억하자는 것은, 다른 말로 사랑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자는 이야기로 들리는 이유이다. 세상에 넘치는 가짜 사랑 속에 가리어진 빛바랜 내 사랑의 진짜 모습에 다시 채색하여 복원하는 일. 유재하의 하나뿐인 이 앨범을 통해 그간 잊었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뇌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1987년 11월 1일 새벽이었다. 강변도로를 달리던 포니 2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어가 택시와 충돌했다. 그 차에 타고 있던 꿈 많던 젊은 뮤지션은 온몸이 부서지며 즉사하고 말았다. 고작 25살이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젊은이의 생애는 짧게 끝났지만, 요절한 천재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그의 죽음이 지난 연재의 주인공 김현식과 맞닿은 것은 인연이라는 관계도 있지만, "술"이라는 녀석과 운명을 맞바꾸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때 그날, 그는 여느 때와 다르게 동창회를 참석하고 술을 마신 친구의 차에 올라탄 것이 사달이 되었다. 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명정승 류성용의 14대손으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나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다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유창물산"이라는 탄광 광산을 크게 하시던 부친을 따라 강원도 황지(지금의 태백)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상경하여 서울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태백시에서는 이런 연유로 '유재하 고향 마을 사업'을 추진하기도)
당시의 음악은 아쉽게도 유산계급의 전유물이었다. 제법 큰 광산업과 집안 유산의 덕으로 유재하는 음악을 향유할 기회를 누렸다. 소위 빽판(불법 복제 LP판)과 전축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일렉트릭 기타와 건반악기로 창작의 영감을 일찌감치 마주할 수 있었다.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중학교시절부터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스(Beatles), 피터 프램프톤(Peter Frampton)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나름 스쿨밴드도 만들고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 전업 음악가의 길을 선택했다. 대학 진로를 클래식으로 정하고 한양대학교 작곡가에 진학했다.
당시 음악을 전문적으로 탐구할 제도권 교육의 방법은 폭이 넓지 않았다. 지금의 '실용음악'이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정식 편입되고 보편화된 것은 1990년대나 되어서이다. 그만큼 대중음악에 대한 인식이 편협하던 시기였기에 음악을 위한 선택지는 클래식 음대 진학이 전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서도 대중음악에 대한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 그룹에 키보디스트로 들어갔다. 그의 밴드 생활은 2개월의 짧은 여정으로 끝났다. 당시에는 클래식 전공자들이 대중음악을 하다가 적발되면 퇴학까지 감수해야 하던 시기였다. 이 짧은 시기에 그는 발라드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용필 7집에 올려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게 된 그에게 친구의 제안이 들어왔다.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에 키보디스트가 필요하다고 귀띔해 주자 바로 그 팀에 합류하였다. 1986년의 일이었고, 이 팀에서도 6개월 동안 짧은 활동을 하였지만 자신의 노래 <가리워진 길>을 김현식의 디스코 그래피에 남겼다. 그리고, 김현식이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뮤지션으로 남았다. 김현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술"이 문제가 된 시기가 유재하의 갑작스러운 비보부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사후, 추모의 의미로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
음악적 방향성의 차이로 그룹을 나온 후 솔로 앨범을 위한 작업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1986년 겨울에 베이시스트이자 후에 매니지먼트를 맞게 되는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계획을 공유하고 조력을 요청했다. 이후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을 이미 제시해 놓은 상태였고, 주요 악기 세션도 본인이 직접 가능하였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오케스트라 세션이 필요해 한양대 동문들에게 대중음악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녹음한 일이 가장 큰 고비였을 정도였으니까.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은 드디어 1987년 3월 봄날의 꽃들처럼 망울을 지어 피기를 기다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특히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출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에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에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다. 일종의 사전 "품질 평가"였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이 통과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시의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틀이 없는 이상한 노래" 정도로만 치부하기도 했다. 유재하는 앨범에 대한 늦은 반응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거기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은 예선탈락이 되고 말았다.
길게만 느껴지던 이 무명의 시간은 그의 이름처럼(在夏)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며 끝을 내는 듯하였다. 가창력의 호소가 아닌 다독이듯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이들의 위안이 되었다. 이 위안의 목소리는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 판매도 호조세로 전환되었다. 특히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의 라디오는 지금의 뉴미디어를 능가하는 젊은 세대들의 반응이 즉각 반영되었다.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는 한 주간가요 순위를 자체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다. 노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하는 방식이었는데, 지난날'이 기록적으로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그 역주행하는 인기가 오작용을 일으킨 것일까? 평소 잘 나가지 않던 동창회 참석을 나간 유재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팬들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그의 삶은 빛바랜 사진처럼 정지되었어 버렸다. 앞으로 발표할 수많은 걸작들은 그저 그의 머리와 가슴에 묻혀 버렸다. 콘서트나 기타 활동이 없어 대중과 밀접한 접촉이 없었던 그에게 세상은 오랜 시간 추모와 기억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3년 동안 애벌레 상태로 땅속에서 자유로운 비행을 꿈꾸는 존재가 있다. 그 오랜 기간을 견디고 버티어 낸 후, 벅찬 비상과 유영을 하려 세상에 나오지만 그 시간이 고작 "하루" 밖에 안된다. 바로 '하루살이'의 일생이다. 25년은 인생의 길이에서 반의 반토막 정도로 느껴지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십 수년의 음악에 대한 갈망을 품고 지내다 세상에 나와 "가수"라는 타이틀을 단 시간이 고작 백일 남짓이다. 그의 일생이 하루살이처럼 애처로운 이유이다.
1년 후의 추모공연은 조동진, 이광조, 김수철과 같은 당대의 음악인들이 함께 했다. 그 수익금과 더불어 발족된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조규찬, 유희열, 이규호, 박인영 등의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다. 사후 10주년에는 김현철이 주축이 되어 신해철, 이적, 이소라 등 100여 명의 음악인들이 모여 추모앨범을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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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어떤 날"을 소개하며 음악인들 세계에서의 이정표라고 소개하였다면, 유재하는 그 음악을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있어서 분기의 이정이 되었다. 그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그가 남긴 발라드의 문법은 이후 이문세를 비롯한 변진섭 등 1990년 댄스 음악의 출현이 있기 전까지 우리 음악계의 주축이 되었다.
유재하에 관한 비평과 리뷰, 추모와 헌정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게 이제는 버거운 일처럼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짧은 인생과 절대적으로 짧은 음악 경력 속에 그가 남긴 것은 단 한 장의 앨범뿐이기 때문이다. 내 청춘 시절부터 깊은 중년의 지금 까지 지난 35년 동안 무한 반복 듣고 이야기 나누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하의 음악은 늘 "새로 고침"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세대가 출현해도 그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해야 할까.
유재하의 음악을 이해하는 모두는 "한국의 대중음악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라고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받아들여진다. 방송의 초기 '푸대접'은 이제 후일담의 소재로만 남아 있다. 유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인물 가운데 몇 손가락에 들어가는 뮤지션이 되어 있다. 진정한 전설, 레전드의 반열에 오를 만큼 평가의 그래프는 생전과 정반대로 돌아섰다. 유재하가 대중음악의 신화로 비상한 때는 세월시 지나서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바로 그날부터인 것이다. 그를 음악적 레퍼런스와 롤모델로 삼은 뮤지션들은 부지기수이다. 특히 자신이 데뷔한 날 유재하가 사망한 날이라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신승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평가 척 클로스터먼은 현대 대중음악은 본디 "작가의 의도"보다 "관객의 반응"으로 규정될 때 가치가 있다고 했다. 유작이 된 첫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작가는 25세의 나이로 35년 전에 산화되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중으로부터 새로운 반응을 얻어 내며, 훌륭하게 익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절한 창작자를 대신하여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요절 작가들의 당시 나이를 보면 그 작은 숫자에 놀라게 되지만, 늘 "형님"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민중 록 가수 "빅토르 최(Виктор Чой)"의 노래 중 <레토(Лето)>라는 노래가 있다. 얼마 전 동명 영화로도 상영관과 넷플릭스 상영으로 만나 볼 수 있었다. "레토"라는 제목은 러시아어로 "여름"이라는 뜻이다. 빅토르 최가 음악 하던 시대는 소련 공산당에 의한 관제 음악이 아닌 이상 음악을 직업으로 가질 수 없었던 사회였다. 공연을 하든, 몰래 해적판 리코딩을 하든, 행사를 뛰든 정식 수입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그 시절 록 음악인들은 모두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화생방 훈련실 마냥 호흡 가쁘게 답답한 현실에서 큰 한숨 쉬어 볼 수 있는 시간은 음악을 하는 순간, 그 음악을 함께 듣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문화 운동의 모임을 ‘뚜소브나(get-together)’라고 부르며, 그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억지 확보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하였다. 그 짧고 짧은 카메라 플래시 같은 행복의 시간은 길고 긴 겨울왕국 러시아의 여름 같이 잠시 왔다 가는 그런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름은 젊음의 시절, 상록의 시절이라는 의미 이상의 간절한 행복의 꿈같은 시간을 의미했다.
유재하의 이름 "재하(在夏)"는 "여름이 있다, 여름에 있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의 인생의 여름, 음악 경력의 여름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짧은 여름처럼 너무나도 금세 지나쳐 버렸다. 그를 생각하면 애잔한 선율의 회고적 가사로 멜랑꼴리해 지지만 묘하게도 여름이 떠오른다. 그의 지난 옛일은 모두 지나간 지난날이지만 그날은 여름 일 것만 같고, 처음 느낀 그대 모습을 본 그때도 여름인 것만 같은 것은 그의 짧은 여름 같은 생애 때문이 아니었을까.
칼럼이나 기사 등을 보면 음악적으로 뛰어난 몇몇 거장들의 앨범을 소개할 때마다 나오는 문구가 "대한민국 100대 명반"이라는 말을 거든다. "대한민국 100대 명반"의 가장 앞자리에 있는 가수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데뷔 앨범이 유작이 되어버린 요절한 천재가수 유재하이다. 2018년에 선정된 앨범 순위라 지금도 유의미하다. 멜론, 한겨레, 그리고 음악 전문 출판사인 태림스코어에서 전체 기획을 총괄하고 평론가 47인이 참가하는 선정 작업을 진행하였다.
유재하의 음악적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이 나올지도 모른다. 대부분 대중가요는 코드 위주로 틀을 짜고 그 전개에 멜로디를 얹게 되는데, 클래식 작법은 멜로디를 떠올리는데 그것이 코드의 문법에 신기하게 들어맞는 경우를 추구한다. 영화에서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오선지에 콩나물을 그려나가던 모습을 상상하면 쉽다. 유재하의 음악은 후자의 클래직 작법의 영향이 지대해 보인다.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변조나 독특한 코드 진행 등을 이용해 당시 가요의 수준을 팝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렸다. 쉽게 합쳐지기 어려운 메이저 코드와 마이너 코드를 섞어가며 사용하고, 메이저 코드에서도 애절한 선율이 전개된다. 탁월한 작곡 실력으로 어색하게 들려야 할 코드 진행을 대중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 것이었다. 이전의 사랑 노래에는 무조건 "뽕끼"가 필요했지만, 유재하는 그것과의 안녕을 선언하였다.
유재하는 녹음 당시부터 데뷔앨범 제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곡을 쓴 것은 물론이고, 편곡과 프로듀싱을 도맡았으며, 당시로선 드물게 현악세션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이상향을 구현하려 애썼다. 반복을 거듭하며 들어도 고급스럽게 들리는 뛰어난 편곡 실력이 놀랍다. 가요의 편곡에 클래식 악기를 끌고 들어와 보여준 지금까지도 그 수준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오케스트라적 편곡 기법으로 바이올린 첼로 등의 현악기와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등의 관악기까지 노래에 사용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땀의 결실은 LP의 하향세로 인해 본모습을 잃게 되었고, 우리는 유재하의 음악을 접하면서도 올바르게 그의 사운드를 만끽할 수 없었다. "바이닐 레코드"라는 LP판의 특징은 보관 기간과 저렴한 생산방식 등 여러 장점들이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그 "사운드의 품질"에 있다. 현재의 디지털 음원은 위아래로 대패질을 한 것처럼 매끄럽다. 그러나, 사실 음역에 따라 작은 노이즈들이 배음이 되어 섞이게 된다.
피아노도 사실 현악기이면서 타악기에 가까운 형식이라 파장으로 흔들리는 음역을 평균으로 잡아 주는 역할이 이런 노이즈들이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은 영국에서 리코딩할 때에 벽아래 보조 마이크로 수음을 했다. 벽을 타고 내려오는 노이즈 배음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CD부터 시작된 디지털 음원에서는 그 노이즈 배음들이 제거되고 말았다.
만약에 여건이 가능하다면 LP판이나 마그네틱 테이프로 들어 보기를 권한다. 진짜 악기들이 내는 불확실성의 파장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평균의 음가를 내는지 섬세하게 느낀다면 음악이 다시 들리게 될 테니까. LP로 듣기를 권하는 노래들을 추천해 본다.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젠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는 앨범의 제호이자 타이틀곡이다. 습작의 제목이 <다시 만날 너를 위해>였다는 것으로 보아, "재회"를 희망하는 이별자의 후회와 기대의 고백이다. 그렇게 바보처럼 ‘그대’도 잊지 못하고 추억도 잊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다가 문득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이 ‘그대’의 것. "그때"의 사랑하던 "내 모습". 사랑은 그래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https://youtu.be/oEaxVe-g8aw
가슴 깊이 남은 건 때늦은 후회
덧없는 듯 쓴웃음으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네
예전처럼 돌이킬 순 없다고 하면서도
문득문득 흐뭇함에 젖는 건 왜일까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세상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지난날>은 "체념"의 노래이다. 체념은 포기와 절망과는 다른 말이다. 최선을 다한 후의 체념은 희망을 향한다.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는 희망의 준비인 것이다. 그렇게 준비해서 그대와 나의 지난날을 더욱 새롭게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기대하는 일이다. 이 노래 <지난날>의 백 코러스에서 이문세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
https://youtu.be/UncWuBcOMS8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서
나의 거짓 없는 맘을 띄웠네
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 없이 서로를 믿어요
<우울한 편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대와 만난 후, 화자가 ‘그대’의 편지를 받아서 읽는 부분과 그 편지에 대한 '나'의 답장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의 가사부터 '나'의 답장이 시작된다. 사랑은 늘 찌질함의 연속이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머리 같이 좁아지게 된다. 편지 한 장, 메모 한 줄에도 온갖 해석을 거듭한다. 그래도 이쁜 일이다. 이 노래는 후에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삽입되었다. 원작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 와요>부터 쓰였다.
https://youtu.be/jIC25lk6-zw
별 헤는 밤이면 들려오는 그대의 음성
하얗게 부서지는 꽃가루 되어
그대 꽃 위에 안고 싶어라
밤하늘 보면서 느껴보는 그대의 숨결
두둥실 떠가는 쪽배를 타고
그대 호수에 머물고 싶어라
<그대 내 품에>는 첫 소절부터 뭉클해진다. “별 헤는 밤이면”이라는 시작부터 가슴은 무장해제된다. 가장 "시와 같은 노랫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개인적으로 자주 부르는 레퍼토리이다. 이 노래를 듣고 몽글하지는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별을 헤아릴 만큼 그대의 음성을 떠올리다 잠 못 드는 밤을 알마나 자주 보냈던가. 그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전혀 세속적으로 들리지 않는 마법의 노래.
https://youtu.be/ty0DFs8FaW8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싸여진잡힐 듯 말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 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길을 잃게 되는 것일까? 특히 사랑하는 과정에서의 방향 상실은 당혹스럽기가 그지없는 경험이 된다. 안갯속에서 골프를 칠 때면 방향을 알려 주는 먼 곳의 반짝이는 라이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일이다. 늘 길을 잃은 다음 누구나 "이정표"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 가리워진 길의 이정표 중 가장 원하는 것은 바로 "그대"가 아닐까.
https://youtu.be/3uHDbEBE460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앨범 발매 시에 가요심의기구에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내 마음에 비친 네 모습’으로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재하는 ‘네 모습’이 아닌 ‘내 모습’을 꼭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별을 하면 화를 내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래는 ‘그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신에 자신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방향을 잃고 방황을 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황의 시간은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성찰의 시간일 수도 있다.
https://youtu.be/yPdUVGhmXWA?si=LzVz3YXomIE7wzgF
따스한 손길 쓸쓸한 내 어깨 위에
포근한 안식을 주네
저 붉은 바다 해 끝까지 그대와 함께 가리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나의 사랑 그대와 영원히
지금은 불순(不純)의 시대이다. 불손(不遜)과 헷갈리지 말자. 너도 나도 모든 세상이 순수함이 사라진 불순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저 시쳇말이 되어 버린 순수의 가치는 오히려 때가 묻어 날 수록 간절해진다. 유재하가 떠난 지 35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유재하를 듣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닐까. 유재하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세를 고쳐 앉아야 할 것만 같이 느껴진다. 메마른 내 눈동자에 촉촉한 감성을 담아야 하는 순간이니까.
여러 버전이 있지만, 이 노래의 감성은 이문세(3집 수록-1985년)의 목소리로 들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https://youtu.be/d2W130nJ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