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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Nov 16. 2023

김광석 -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너.들.이 06] 맑고 향기롭게 기억하고파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06


사람들의 입에서 그의 노래가 불리어지고, 겨울 볕 든 날 같이 짧은 그의 인생과 수수께끼 같은 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솔직히 참 불편했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를 좋아한다는 말이 그의 음성이 그립다는 말이 유독 자주, 크게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오랜 친구의 말처럼 "진작에 좀..."이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리 좀 좋아해 주시지,
사람 속 다 태워버리고...

- 동물원 멤버 김창기 인터뷰 -


언제나 둥근소리 (사진=한국 경제)

음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분명 유행과 흥행이라는 대중의 평가는 늘 차등적이다. 단지 특정 가수나 밴드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장르와 기조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는 지난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마주하는 시기였다.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도 커다란 강을 건너듯이 급변하던 시대였다. 영상 미디어의 확장과 물절적 풍요가 결합되며 대중음악은 본격적으로 '즐길 거리'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조류에 밀려 인간 본연의 감성과 사회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음악은 통기타와 함께 사라져 갔다.


화려한 음악들에 밀려 방송에서 보기 힘들어도 쓰린 속을 부여 담고 소극장 공연에 매진하던 그의 음악은 애잔했다. 평소에도 힘 죽어 보이는 말투에 작은 체구만큼 내려앉은 두 눈은 늘 웃고만 있지만 서글펐다. 사라질 것만 같은 노래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결국 생을 마감하였을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찾아들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되짚어 보는 일은 참 미안한 마음부터 앞선다. 그래도 그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가시 돋친 폐허 속에 남겨진 너의 평범함을 외면하지 말라고. 평범한 재주를 비범하게 아로새긴 목소리 김광석을 이야기해 본다.



'반토막' 소년이 무대 위의 거인이 되기까지


김광석은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가족 모두가 서울로 올라와 학창생활을 보냈다. 특히 음악에 관심과 소질이 많았었다. 바이올린, 오보에 등 클래식 악기를 배우고 고등학교를 진학해서는 교내 합창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체구가 작아서 어릴 적 별명이 '반토막'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회적인 모습에는 수줍음과 주저함이 늘 어른 거렸다. 음악을 제대로 하고자 했던 것은 명지대학교에 진학해서 비교적 늦게 만난 통기타 덕분이었다. 당시 대학생들, 그중 노래 좀 한다던 신입생들은 선배들 손에 이끌려 '노래패'에 들어가는 일이 흔한 것이었다. 1984년 그렇게 그는 민중가요 노래패 '새벽'의 일원이 되었다.


대학 졸업 (사진=나무위키)


우연한 기회에 민중가요에 대한 책을 읽고, 사회와 노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학전 소극장의 주인인 김민기(<아침이슬>의 그 김민기)의 눈에 들어 시대극 뮤지컬 '개똥이'에 참여하게 되고, 사전 검열이라는 시대의 뜨거운 모래폭풍을 경험하며 안치환, 배호 등과 의기투합하여 '노래와 찾는 사람들'이라는 민중가요 기반의 노래패를 결성하게 되었다. 동아리 골방의 벽이 아닌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고, 1987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해 발표회와 각종 집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찾사 1집'에 수록된 김지하 작시의 <녹두꽃>은 현장에서 회자되었으나, 정작 심의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공연과 후속 리코딩 코러스에만 참여하게 되었다.


김광석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노찾사'의 영향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우선 노찾사가 없었다면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배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노래극 배우를 뽑는다며, 그 제작자가 김민기라는 이야기를 전하자 설마 '아침이슬'의 김민기인지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전설 속의 오래된 위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의 뼈대를 이루는 '시대와 일상의 중창'이라는 아티스트로서의 방향성이 노찾사의 유산이었다. 가수로 제법 이름을 알린 후에도 당시의 노래와 인연들(배호, 백창우)을 이어 나갔다.


6개월의 짧은 군복무 후 고려대 앞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사실 지인들의 아지트에 가까웠다. 그런 인연들이 다른 카페 '무진기행'의 7인방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모여 결성한 밴드가 '동물원'이다. 팀에서 작곡이 뛰어난 김창기의 실력을 보고 당시 젊은 음악가들을 발굴 지원하던 '산울림'의 김창완이 지원하여 팀을 만들어 1988년 정식 앨범을 취입하게 되었다. '동물원 1집'은 사실 큰 기대를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노래 한곡이 대중들에게 큰 반응을 일게 하였다. 그 곡이 바로 김창기가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이다.


아는 사람들은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동물원의 멤버들은 전업으로 음악을 할 생각이 크지 않았다. 김창기도 연세대 의대에서 수련의로 복무 중이었고, 연구원, 대학원생 등 사회 진출의 방향이 어느 정도 확고해진 멤버들은 2집마저 조급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우정은 괜찮았기에 김광석은 그저 기다리고 이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방송출연도 무직인 김광석 혼자 나온 경우가 많아서 "동물원에서 겨우 혼자 탈출했다"는 식의 뼈 있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989년 동물원은 2집을 끝으로 잠정 해산했다. 김광석은 홀로 음악을 하기로 결정한 후였다.


동물원 2집 당시, 왼쪽에서 세 번째 김광석 (사진=부산일보)


<너에게>와 <기다려줘>가 수록된 1집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여세를 몰아 한동준에게 받은 <사랑했지만>,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와 김창기의 <그날들>의 히트곡을 담은 2집을 1991년에 내었다. 인기를 얻어 불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DJ로도 활동하면서 정기적인 콘서트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들을 늘렸다. 주위에서 '변절'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이를 보기 좋게 눌러 주는 3집을 만들었다. <나의 노래>가 대중들의 귀에도 꽂히면서 시대를 노래하는 진정한 포크의 계보를 계속 이어 나갔다.


김광석은 사실 처음부터 작곡에 능한 싱어송라이터는 아니었다. 그의 자작곡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시기는 4집부터였다. 김광석은 곡을 고르는 감각이 탁월한 가수였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신의 음색으로 가두어 마치 자작곡 같이 착 달라붙는 소리를 내었다. 김광석은 주변의 천재들을 인정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그 친구들의 이야기와 노래에 늘 귀를 기울이는 탁월한 공감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김광석에게 친구는 참 중요한 존재였다. 친구들 사이의 '반토막' 꼬맹이가 '거인'이 되어 있었다. 우렁찬 그의 함성 같은 노래와 함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993년에 갑자기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짚어 정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 달이 넘는 매일 공연을 계획하고 자신의 음악의 두 축, 포크와 민중가요의 음악들을 정리하는 앨범 '다시 부르기- 1'를 기획하고 발매하였다. 그의 나이 만 스물아홉이었다. 포크 대표곡 <거리에서>와 민중가요의 <광야에서>를 다시 부르며 '리메이크 앨범'의 성공사를 썼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4집을 다음 해에 발매하였다. <일어나>는 <나의 노래>의 속편 같은 내적 선언의 노래이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서정작인 포크의 전형과 블루스 노트를 적절히 조화시켰고, 아직도 가슴을 울리는 이정표 같은 노래 <서른 즈음에>가 4집에 들어 있다.


1995년에 다시 장기 소극장 콘서트를 하며 '다시 부르기- 2'를 세상에 내었다. 다시 부르기 1집이 자신의 음악 여정을 정리한 것이었다면, 2집은 한국의 포크 음악이 걸어온 고독한 길에 대한 헌정이었다. 김목경, 김의철, 한대수, 양병집(밥딜런), 이정선, 백창우 등의 모던 포크 음악 선배들에 대한 헌정이자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표제의 공연 라이브를 담고 중간중간의 멘트도 인상 깊다. 그것을 기반으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가 증명, 선언되는 명반이었다.


1000번의 콘서트 (사진=한국경제)


그는 "또 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일 같이 라이브 공연을 돌았다. 1995년 8월 드디어 1000회 공연이라는 믿기 힘든 금자탑을 쌓았다. 그 공연에 학전 멤버로 초대를 받아 갔었다. 중고생, 20대 청년들은 물론 60대 노부부까지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이 지속된 두 달간의 관객석을 꽉 채웠다. 운 좋게 대학로 공연 뒤풀이에 가서 그와 소주잔을 나눈 기억이 있다. 하회탈 같은 얼굴이 참 행복해 보였다. 금세 취기가 오르는지 연신 웃음으로 댓구해 준 기억이 뚜렷하다. 생각해 보니 마치 마지막을 직감한 사람 같은 강행군이었다.


그해 11월의 미국 초청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다.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른 것이 세상에 남길 마지막 모습이 될지는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이 노래를 부른 뒤 7시간 30분 후에 그는 자택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애 의해 발견되었다. 방송 후 <내 사람이야>의 작곡자이자 민중가요의 동지였던 시인 백창우와 새 노래에 대해 상의차 술 한잔하고 새벽에 들어선 집에서의 일이었다.


자신의 팬클럽 회장에게 "앞으로는 TV출연도 많이 하고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겠다"라고 너스레도 떨었고, 그달 중순의 추가 공연을 위해 다음날 오전 약속까지 했다. 초저녁에 대학로 음반관계사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집 앞으로 안치환과 백창우 등을 만나 현대시를 음악으로 전파하는 운동을 상의하고 집에 귀가하였다. 그 뒤 자신의 집 계단에서 전깃줄에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여러 정황상 타살의 의문과 음모가 제기되었으나, 숱한 질문만 남긴 채 증거 부족으로 자살로 단정 지어졌다.

김광석과 그의 딸. 천국에서 만났겠지 (사진=매일신문)


당일 바쁜 그의 일정에 함께 만난 이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특히 백창우는 김광석이 집에 가서 한잔만 더 하자고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만류하고 돌아 섰기에 한동안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류근 시인이 작시하고 그가 부른 노랫말처럼 다시는 세상에 사랑으로 오지 말기로 하고 그립단  말들도 묻어 버리기 위한 갑작 이별이었을까. 너무 아프게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은 내 지친 시간들에 유일하게 위안이 되어준 그 노래에 대한 힘겨운 이별을 에둘러 밀어내는 아쉬움의 끝이었다.



완전한 일상주의자의 일상 예찬


김광석은 엄청난 가창력을 보유했거나 미려한 음색을 지닌 가수는 아니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노래에는 묘한 파장이 숨어 있다. 흔히 '염소창법'이라고 이야기하는 파형이 촘촘한 짧은 주기의 바이브레이션이 있다. 그가 실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이는 알게 된다. 노래와 함께 그의 몸도 함께 떨며 울어 댄다. 그래서 두성과 흉성이 복합된 묘한 파장이 퍼진다. 몸으로 부른다고 할까. 그의 떨림은 이내 청자의 울림으로 공명되는 것이다.


사실 김광석은 자신의 이런 목소리와 떨림이 콤플렉스였다고 한다. 어릴 적 노래를 부르면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고만 좀 떨어라"라고 핀잔이 늘어서곤 했다. 그래서 추계예대에 편입해 성악을 배우려 시도하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그의 가창의 진수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와 <사랑했지만>이 아닐까 싶다. 3옥타브 고음의 노트를 힘 있고 정확히 밀어낸다.


 노래 ‘사랑했지만 사실 별로  좋아했어요.
사랑하는데 바라보기만 한다는 가사 때문에….
그러다 좋아하기로 했어요.
어느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노래가 1926년생인 할머니 마음에 사춘기 소녀 감성을 불러일으켰다고.”

  

김광석이 1995년 8월 소극장 ‘학전블루’ 공연에서 한 이야기였다. 1000회 라이브 공연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김광석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항상 겸손했다. 자신은 그저 소리를 열심히 내는 사람이고 누구의 노래든 부를 수 있다면 부른다는 것. 그의 음악엔 이처럼 포장지가 없다. 그의 노랫말이, 그의 음성이 고스란히 자신 그대로를 드러낸다. 슬프면 슬프게, 즐거우면 즐겁게, 비장함이 필요하면 함성 같은 포효를 내 질렀다.


김광석의 앨범들 (사진=나무위키)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는 김광석을 '9번 타자'라고 평했다. 하위타선의 존재감 약한 9번이라니 무슨 이야기일까. 임진모 씨가 9번 타자라고 말한 뜻은 '마지막 타자'라는 의미에 가깝다. 황당한 음악과 이야기로 노래하지 않았던 마지막 가수라는 뜻이라고 한다. 김광석의 노래는 '일상'을 이야기한다. 조각구름과 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노래한다. 국화와 장미,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있는 점원을 이야기한다. 잡힐 듯 말 듯한 관념과 특별한 사건 같은 일을 노래하지 않았다. 다반사 같은 일상에는 '황당함'이란 좀처럼 없으니까.


짝사랑할 때는 <사랑했지만>, 입대할 때는 <이등병의 편지'> 이별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살 때는 <서른 즈음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할 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의 곡으로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이기도 하다. - 나무위키 '김광석' -


김광석의 음악을 '음악적 기준'으로 논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많다. 포크 음악을 흔히 '저항의 노래'라고 한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역사와 환경으로 체제와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되어 포크 음악은 늘 '노래로 하는 사회운동'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포크 음악의 '저항'은 모든 인간의 욕심에 대한 경고이고 성찰이다. 환경과 자연을 이야기하고, 시대와 세대를 고찰하며, 사랑과 이별의 변질을 지적한다. 김광석은 진정한 포크 뮤지션이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포크 음악은 '성찰의 음악'이다. 성철 스님이나 이어령 선생님 같은 거대한 성찰도 있지만, 문예반에서 시를 쓰던 내 어릴 적 친구의 성찰도 있다. 성찰은 머릿속이 번쩍이는 엄청난 유레카가 아닐 것이다. 성찰은 바로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노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잊었던 각자의 추억을 소환한다고 이야기한다. 추억을 불러내는 일도 성찰의 과정이다. 그의 노래는 옆과 뒤를 둘러보게 해 주는 용기를 준다.


다 관찮아 질꺼에요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또 하루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이란 큰 힘에서 한낱 작은 권력으로 힘자랑하고 살았구나. 산다는 것은 그저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는 함께의 여정인데, 주위를 좀 돌아보며 살면 어떨까.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절로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의 내 인생과 일상의 커다란 틈을 느끼게 된다. 그의 노래는 일면화된 우리의 자화상을 피카소의 큐비즘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인정하게 해 주는 힘이 있다. 그것이 김광석을 지금도 노래하는 진정한 이유가 된다.



33세 김광석이 52세 나에게


김광석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저마다 제각기일 것이다. 그의 노래가 되었든, 그의 반달눈이 되었든, 아니면 석연치 않았던 죽음과 저작권을 둘러싼 일들이 그렇든 말이다. 그 석연치 않은 것을 파헤쳐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서른하고 셋에 떠난 그가 오십하고 둘이 된 나에게 주는 이야기는 다른 모습이니까.


불교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1991년 불교방송 ‘밤의 창가’를 진행하며 법정 스님 등 불교계 인사들과 교류했었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원음’(圓音, 둥근 소리)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지은 빌딩이자 집의 이름이 '원음 빌딩'이다. 또한 '둥근 소리'는 김광석 팬클럽의 이름이 되었다. 동네에 사는 김민기 선생 덕에 학전 소극장은 주머니 가벼운 복학생에게 아르바이트의 기회와 함께 공짜 공연을 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광석의 전성기 공연을 함께 했고, 둥근 소리의 모임에도 참석하곤 했다.


대학 초기까지 빠져든 록 밴드를 접고 다시 통기타를 잡게 해 준 노래를 잊기란 쉽지 않다. 1996년 러시아 유학길에 오르던 내게 친구 한 녀석이 응원차 고기를 사주고, 내 차림이 허름해 보였는지 입고 있던 두터운 옷과 목도리를 벗어 주었다. 나는 친구에게 줄 것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아끼는 물건을 내주었다. 그것이 김광석 다시 부르기 1집이었다. 2집은 내가 간직한 채 러시아로 들고 가서 누군가 버리고 간 기타를 손수 수리해 외로운 기숙사 방에서 듣고 따라 부르곤 했다. 내가 김광석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둘러보아 준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기억하니? (사진=김광석.or.kr)


김광석의 노래는 확실히 차분하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 왠지 애잔하고 애틋해진다. 그럼에도 아쉽고 서글픔 속에서도 따뜻한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 내 기타는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그 좋아했던 노래들의 악보도 없어졌다. 젊은 친구들이 갑자기 통기타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송과 미디어에서 다시 김광석의 노래가 울리고, 그를 추모하는 거리가 조성되고 버스도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면 그럴수록 허전함과 그리움은 커져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에 허전함이 깊어졌다. 그립고 그리워할수록 그리움은 커지기 마련이니까.


나이 오십을 넘겨서 이겨내야 하는 삶은 고달프다. 노래 한 자락 듣기 힘든 날이 가득 채워졌다. 김광석의 노래를 부러 피하며 살았다. 그 허전함과 그리움이 더 커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시 주저앉으면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몸과 마음이 낡고 고장 나 있었다. 그러나 늘 김광석이 노래해 주고 있었다. 혼자 남은 외로운 밤에는 노래를 부르자고 삶에 여러 송이 희망을 주는 노래를, 그 노래가 내 눈물을 환하게 비추어 줄 것이라고. 일어나라고, 봄의 새싹들처럼 일어나라고.



혼자 남은 밤


이렇게 슬퍼질 땐
노래를 부르자
삶에 가득 여러 송이 희망을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김광석의 노래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우울하지는 않다. 애잔하지만 은연 힘을 준다. 어둠이 짙어지고, 외로운 밤을 혼자 지새울 때, 거리를 걷고 노래를 부르자고 이야기해 준다. 하얀 별빛이 나를 비추어 줄 것이고 그 별빛들이 송이송이 희망을 줄 것이라고, 골방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https://youtu.be/S5dcSZXdc7c



맑고 향기롭게


말없이 넌 말하지 더욱 같이 하는 걸
조금씩 날 물들이지 더욱 너를 닮도록
은은한 내 마음결 따라 피어오는 꿈 속에
맑고 또 향기로움이 멀리 있진 않구나


한 때 블로그명이 '맑고 향기롭게'였다. 그만큼 속을 깨끗이 해주는 주문이 되었다. 이 구절은 이해인 수녀의 시에서 작사가가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노영심이 작사 작곡하고 김형석이 편곡했다. 그래서 그런 이 예쁜 말속에 예쁜 생각이 스며드는 노래.


https://youtu.be/lPbWYDAgVAM



잊어야 하는 마음으로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누군가의 빈자리는 둘이 하나가 될 때 가장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100이 50이 된 것이니까.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잊히면 그만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만다. 아침이 되면 더 커진 방을 보게 되고, 그리움은 그 크기만큼 더 커지니까. 찌질한 이별이 아닌 애절한 그리움을 이렇게 시처럼 쓰는 가수가 김광석이었다. 영화 <홍반장>에서 고 김주혁 배우가 생각나는 노래.


https://youtu.be/3RBKFgsZPJQ




꽃이 지네 산과 들 사이로
꽃이 지네 눈물같이
겨울이 훑어간 이곳
바람만이 남은 이곳에
봄이 다시 돌아온 이곳
그대 오지 않은 이곳에


민중가요의 대표곡 <광야에서>, <동지를 위하여>의 문대현이 만든 곡이다. 묵직한 웅변조의 노래이면서 시를 음악으로 어우른 그의 창법이 인상작이다. 성악을 공부하며 노래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그의 노래의 울림에는 노래패 시절의 그 정신과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https://youtu.be/g7LZMGr86Qc



너에게


나의 어릴 적 내 꿈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하늘이랑
내가 그것들과 손잡고
고요한 달빛으로 내게 오면
내 여린 마음으로 피워낸 나의 사랑을
너에게 꺾어줄게


마음이 심란할 때 듣곤 했다. 눈을 감으면 장면처럼 펼쳐진다. 조각구름과 빛나는 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과 국화와 장미, 사루비아가 끝없이 피어있는 정원을 떠 오리게 된다. 그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콘서트 마지막 인사인 "행복하세요"를 노래로 만든다면 이런 고래가 아닐까. 김형석이 최고의 작곡가로 발을 떼던 시기의 노래.


https://youtu.be/YWVTqzEsbvI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바람이 불면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바람이 불면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동물원 2집에서 부른 김창기의 곡이다. 본과 3학년 마지막 시험을 앞둔 조급 함이었을까. 가사가 축약적이다. 왜 편지를 쓰는지 누구에게 쓰는지 내용이 무엇인지 없다. 그냥 상념이 많아 책을 덮어 놓고 일단 쓴다는 이야기. 아마도 김광석과의 마지막 활동이 될 노래이고 자신의 현실적 제한이 함께 한 모든 이유가 그저 친구에게 노래 하나 편지로 쓰는 것. 김광석의 후렴 스캣은 비틀즈의 <Hey Jude>가 생각날 정도로 하드 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노래.


https://youtu.be/Kt2X8_3YWCY



친구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뮤지션은 영감을 받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을 '뮤즈'라고 한다. 김광석의 두 어깨에는 '아저씨 두 사람'이 뮤즈로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은 동물원을 결성해 준 김창완 아저씨,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노래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준 김민기 아저씨였다. 김광석의 친구들은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참 아쉽다. 가족이란 굴레가 되기도 하니까. 구멍을 파는 저음의 <친구> 원곡(김민기)도 좋지만, 김광석의 친구도 참 좋다. 친구들 미안하고 고맙다.


https://youtu.be/Kt2X8_3YWCY



슈퍼 콘서트 실황


이번 추천곡은 유명하여 리메이크가 많이 되거나, 흥행한 곡들을 제일 하단의 <슈퍼 콘서트> 영상으로 갈음한다. 1시간의 분량이지만 그의 라이브를 기억하기에 좋은 영상이라 공유해 본다.


https://youtu.be/kqyw7Zcwyws



•참고
- '영원한 33세 김광석이 저편에서 이편의 사람을 일깨우는 이유' : 월간 조선
- '김광석 평전 - 부치지 않은 편지' : 세창 미디어
- '김광석,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 미디어어스
- '퍼포먼스·스마트시대…우린 왜 김광석에 열광하나' : 헤럴드 코리아
- 그리고 나무위키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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